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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얼을 담는 꼴의 얼굴 혹은 초상화 다시 보기

윤범모

자기 세계가 분명하다는 것. 나만의 세계 가꾸기, 이게 어디 쉬운 이야기인가. 나만의 세계는 창조적 삶의 방식을 기초로 한다. 창조적 삶이라, 우리는 과연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을 만큼의 삶을 꾸리고 있었던가. 그래서 ‘얼굴’이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왜 부끄러움은 얼굴을 통하여 나타나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한 인생의 역사는 얼굴로 집약된다고 했다. 얼굴은 사람의 얼(정신)을 담는 꼴(형태)이다. 그래서 얼굴이다. 얼굴은 역사 그 자체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타인의 얼굴을 보고 대충 그 사람의 됨됨이를 생각한다. 얼굴들의 집합은 한 나라의 역사이다. 그야말로 역사는 얼굴을 들고 다닌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여기 한 노인의 얼굴이 있다. 세상의 산전수전을 다 겪었을 깊이와 무게를 보이는 모습이다. 깐깐한 자태는 자기 세계의 분명함을 의미하리라. 적당한 주름살과 단아한 표정 그러면서 기름기 없는 인상, 바로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자화상>(1782)이다. 표암 자신이 살아있는 듯 핍진함을 담은 초상화, 역시 조선시대 초상화의 장점을 온전히 수용한 걸작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뭔가 이색적인 면을 느끼게 한다. 언뜻 보아 꼬장꼬장한 노인의 풍모이지만 그 속에서 해학이 있는 어떤 여유를 살피게 하기 때문이다. 우선 옷차림을 보자. 옥색 도포를 입고 있으니 일상생활의 평상복이다. 그런데 모자는 입궐할 때 쓰는 오사모(烏紗帽)이다. 평상복과 관모(官帽), 이는 불균형이요 파격이다. 고급 양복 상의에 찢어진 청바지 꼴이라고나 할까. 표암은 왜 이 같은 모습의 자신을 그렸을까. 그것의 실마리는 초상화 위에 자필로 쓴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수염과 눈썹이 하얗구나.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야복(野服)을 걸쳤으니 마음은 산림(山林)에 있으면서 조정에 이름이 올랐음을 알겠다. 가슴에는 만 권의 책을 간직하였고, 필력은 오악(五嶽)을 흔드니 세상 사람이야 어찌 알리. 나 혼자 즐기노라. 노인의 나이 일흔이요, 호는 노죽(露竹)이라. 초상을 스스로 그리고, 화찬도 손수 쓰네.”
비록 몸은 조정에 나가 관직을 수행하고 있지만, 마음은 산림에서 은일(隱逸)하고 있음의 표현, 역시 표암답다. 아니 조선시대 선비들의 기상을 엿보는 듯하다. 하지만 표암 자화상에서 느끼게 하는 강인한 인상, 그것의 바탕은 무엇인가. 바로 표암 자신이 토로했듯이 가슴속 만권의 책과 오악을 흔들 수 있는 필력이 아닌가. 대단한 자부심이다. 하기야 이런 자존감 없이 어떻게 ‘인물’이 되겠는가. 표암을 일컬어 ‘18세기 예원의 총수’라고 부르고 있지 않은가. 시서화 삼절, 게다가 단원 김홍도의 스승, 표암의 <자화상>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자화상>을 포함 다수의 표암 초상화와 표암 관련 작품은 <시대를 앞서 간 예술혼>이라는 특별전에서 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탄신 300주년 기념으로 강세황 특별전을 마련했다.

초상화를 다시 보게 한다. 유교의 예술천시사상이 지배했던 조선왕조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초상화의 발달은 정말 고맙기 그지없다. 전북도립미술관은 <역사 속에 살다 - 초상, 시대의 거울> 특별전(7.19-9.8)을 개최하고 있다. 개막행사의 기념세미나에서 나는 국립초상화미술관 건립을 제안했다. 런던이나 워싱턴 같은 도시에 가면 ‘국립’ 초상화 미술관을 볼 수 있다. 그곳에서 그 나라의 역사를 실감할 수 있다. 초상화로 쓴 역사책이기 때문이다. 한 민족의 초상화는 한 민족의 역사이다. 전주지역은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봉안한 경기전이 있는 곳이고, 석지 채용신이 활동했던 초상화의 연고지이다. 이런 곳에 초상화미술관이 건립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같은 발표가 있었던 얼마 후 나는 깜짝 놀랄 보도를 접했다. 서울시가 초상화미술관을 건립하겠다는 것. 어허, 초상화미술관 건립! 넓은 의미로 인물화, 우리 시대의 초상화를 제작해야 하고 또 이것을 활용할 수 있는 미술관이 절실하다. 죽어가는 초상화 장르의 부활을 도모할 때이다. 초상화 문제는 미술 분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 구현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얼을 담는 꼴, 이것을 다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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