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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유자농원에서 허리 숙이기

윤범모


이왈종, 제주 생활의 중도(中道)와 연기(緣起), 2012, 한지 위에 혼합, 117×91cm

ⓒ왈종미술관


<유자농원에서>

농부
하늘로 치솟은 우듬지의 수직 줄기를 자른다
나뭇가지들을 끌어내리면서 수평으로 눕힌다
하늘보다 땅과 가깝게 철사로 묶는다

농부는 말한다
키만 크거나
수직으로 뻗은 가지는 열매를 맺지 않아요
덩치를 키우지 않고
그것도 옆으로 뻗어야
튼실한 열매를 열거든요

키만 크려 했던 젊은 날의 부끄러움을 안고
나는 키 낮은 가지의 노란 열매 옆에서
허리를 숙인다


나무는 태양을 향해 키를 키우는 습성이 있다. 소나무 숲을 보면 안다. 모두 쭉쭉 뻗은 늘씬한 키를 보여주고 있다. 비슷한 높이와 덩치이다. 물론 키 낮은 나무가 있다면, 그야말로 그늘 속에 잠겨 있게 된다면, 도태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무는 주변의 친구들과 덩치를 비슷한 수준으로 맞춘다. 더불어 사는 숲이다. 비슷한 수준의 키로 숲을 이룰 때 태풍도 견뎌낼 수 있다. 함께 살아가는 소나무의 지혜를 본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 숲이다.

얼마 전 제주를 다녀왔다. 유자농원에 가서 한 수를 배웠다. 하늘을 향하여 수직으로 키를 키운 나뭇가지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사실. 유자농원의 농부는 우듬지의 나무줄기를 자르는 것이 일이라 했다. 수직보다 수평으로 뻗은 가지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그래서 <유자농원에서> 라는 즉흥시가 나왔다. 덩치만 키운다고, 키만 키운다고, 능사는 아니다. 키만 키운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는 유자나무 옆에서 허리를 숙여 지난 세월을 반성해야 했다. 하늘보다 땅과 가깝게 허리를 숙이는 모습. 유자농원의 교훈이었다.

이제 미술관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평생을 ‘미술 현장’에서 보내기는 했지만 새로운 경험이다. 그것도 어려운 시절에 새로운 도전과 같아 걱정이 태산이다. ‘미술관 큐레이터 제1호’로서 각오를 새롭게 다져야 했다. 그래서 꿈을 꾸어본다. ‘세계 속의 열린 미술관’. 문턱이 있다면 더욱 낮춰야 할 것이고, 소통을 위하여 문을 더 활짝 열어야 한다. 물론 한국미술의 자존심을 곧추세우면서 국제무대로 나가야 할 것이다. 근래 자주 생각하는 ‘문화영토론’은 그래서 힘을 갖게 된다. 세계지도 위의 국경선보다 문화예술의 힘으로 국격(國格)을 키우는 것, 바로 문화영토이다. 이는 한류(韓流)가 입증하고 있다. 이제 대중문화에 이어 순수예술이 나서야 할 때이다. 미술품은 고가로 매매가 가능한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경제적 효과도 노릴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게 한다. 자동차 몇천 대를 팔아야 그 수익으로 피카소 그림 한 점을 사올 수 있을까.

남북 화해의 시대이다.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미술의 역할이 크기를 기대해 본다. 냉전체제를 마감하면서 미소 양국이 제일 먼저 한 교류사업은 미술전시였다. 판문점 미술관. 혹은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서의 휴전선, 이는 평화의 상징으로 우뚝 설 것이다. 그러나저러나 큰일이다. 영문판은커녕 내국용의 반반한 근현대한국미술사 관련 통사(通史) 한 권 없는 나라이니, 언제 국제화 운운의 실효성을 얻을까.

*이번 호로써 <윤범모 미술시평>은 마감합니다. 75회에 이르도록 그동안 함께해 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오랜 기간 지면을 준『 서울아트가이드』와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의 발전을 기원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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