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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필주광 안재후 박광호 3인의 건망증과 수준급 연기

김정





좌) 필주광과 필자 김정, 1970년 동인전시때, 중) 김정, 안재후 드로잉, 우) 김정, 박광호 드로잉


오늘의 주인공 세 분은 제각기 특이한 버릇이랄까, 체질이 유별난 화가로 살다 가신분들이다. 아마도 그림에 열중하다보니 이런 기이한 모습도 보이는 듯했다. 

국제급 건망증이셨던 필주광(1929-73) 선생은 27세 때 불멸의 작품 <감자 깎는 여인>을 그려 일약 스타가 되셨다. 그리고 17년 뒤 44세에 먼 길을 떠나신 가슴 아픈 작가다. 그는 H대 출신으로 앙가주망 창립멤버였다. 본인도 건망증을 알면서도 금방 잊는 이중 건망증이었다. 예컨대 홍길동이라고 얘기한뒤 1분 뒤 다시 말할 때 홍동길이라고 기억하는 증상이 심했다.

필자가 70년 초 그룹전 총무 시절 그분 때문에 헷갈렸던 일이많았다. 김서봉 선생을 김서보라 박서보 선생을 박서봉이라 생각한 필주광 선생의 말을 믿었던 것이었다. 바꿔말하면 박서봉도 김서보도 없는 이름이다. 그런데도 필 선생에게는 늘 박서봉과 김서보가 존재하고 있던 것. 박서봉 선생한테 전화하라던가, 김서보가 만나자고 하는 경우엔 난장판이 된다. 김서보와 박서봉이 헷갈리는 원인은 서봉과 서보의 유사한 발음을 착각한 것이다. 본인은 서봉과 서보를 구분하지만, 성씨만 붙으면 혼란됐다.

필 선생은 1960년대 인사동 근처 미술 교실을 운영했다. 인근엔 이봉상 선생 화실도 있었다. 가끔 이봉상 선생도 이상봉으로 뒤집어 불러 면전에서 혼났다고 고백했었다. 이 사실을 털어놓는 본인도 헷갈리는 게 속상하다고 했다. 사람이름을 기억하려 적어 놓고 암기했지만, 자꾸 혼돈돼 힘들다고 했다. 그러나 늘 웃고 지내는 필 선생의 명랑한 성격이 그를 살려준 것이다. “세상에 맘만 먹으면 안되는 게 없는 거지”하는 만사형통의 낙천주의자다. 별세 전엔 광화문에서 안재후와 필주광은 공동 화실을 운영했다.그분의 넉넉한 인간성과 착하게 웃는 모습은 주변 사람에 감동을주셨다.

안재후(1932-2006) 선생과 박광호(1932-2000) 선생은 연극배우 기질이 있는 화가이다. 안재후 선생이 늦게 장가가서 신혼살림을 은평구 녹번동에 차린 지 몇 달 지났을 때다. 어느 날 안선생은 우체부에게 등기우편을 받아 뜯어보곤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점점 손이 떨렸다. 내용인즉 “사랑하는 재후씨, 저에요. 당신 딸이 벌써 귀여운 3살로 잘 크고 있어요. 보고 싶어요. 00에서 당신의 박광자보냄” 편지지엔 하트 그림도 그려놓고 사랑한다는 문구가 넘쳤다.

그 편지를 받은 안재후 선생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편지를 얼른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곤 담배로 마음을 달랬다. 하루 담배 한 갑 반을 이틀에 세갑을 피는 애연가였다. 편지를 받은 후 하루 두 갑을 태워도 모자라는 고민에 빠져있었다. 혼자 고민하다가 어느 날 부인에게 이상한 편지를 받은 얘기를 했고, 그 편지 이후 안재후 부부 사이는 늘 전쟁 같은 상태로 폭발직전 생활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에 사는 박광호 선생이 술을 사 들고 안재후 선생 집을 찾아왔다. 오랜만에 온 박광호 선생을 맞은 안 선생은 핑계김에 술 한잔 같이했다. 술상에서 안 선생은 며칠 전 그 문제의 편지 얘기를 꺼냈다. 조용히 듣고 있던 박광호 선생은 큰대접에 술 두 잔을 가득 붓고 “속상해할 테니 자, 이걸로 한잔 쭉합시다.” 다 마신 뒤 “후후후 하하하~ 으하하~” 크게 박장대소 하는 박 선생은 그 편지 좀 보여달라 하고 편지를 찢어 주머니에 넣곤 “이게 다 내가 보낸 편지였다오”라며 본인의 소행임을 자백하며 그날 밤새도록 술을 먹고 오해를 풀었다. 워낙 두 분은 동갑나이로 우정이 두터워 끝나고 말았지만, 안 선생의 아량이 넓었기에 조용히 끝난 것이다. 안재후 선생도 평소 유머가 풍부한 선량한 분이었다.

박광호 선생은 평소 말수도 적고 우락부락한 스타일로 경상도 사나이다. 무뚝뚝한 표정과 말투로는 전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엉뚱한 연극 연기엔 천재적 기질이 숨어있었다. 박광호 선생은 대구의 그룹회원으로 전시 오픈 땐 늘 상경했다. 당시 대구교대 교수로 줄담배 애연가며 씨름장사처럼 거인이었다. 정말 어여쁜 새 색시로 분장할만한 용모나 언행은 전혀 아니었지만, 그분의 연기력은 기가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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