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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실경산수를 그린 거장, 소정 변관식

김달진

한국 근대미술의 대가를 찾아서 (6)

금강산 실경산수를 그린 거장, 소정 변관식


지난 5월 서울 관훈동에 있는 노화랑에서는 <박수근 VS 변관식>전 이라는 뜻있는 이색 전시회가 열렸다. 우리 근대미술의 대표급 작가인 박수근, 변관식의 작품을 비교 감상할 수 있었다. 박수근은 유화, 변관식은 수묵화로 재료는 서로 달라도 한국적 정서를 잘 표현한 거장들이다.


우리나라 회화사에 있어 조선시대 겸재 정선을 태두로 진경산수의 의의는 크고 여러 학자들에 의해 분석되고 높이 평가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과 일제시대에 들어와 맥을 잇기 어려운 비운에 처했다. 이런 환경에서 이상범과 변관식이 등장하여 각자 독특한 방식으로 진경산수화의 전통을 회복시키려 했다. 이상범은 서정성으로 양식화하였다. 특히 변관식은 체험과 관찰 사생을 바탕으로 실경정신은 한국적 자연을 독자적 양식에 의해 주체성을 체계화했다. 그는 자신의 주관적 감동을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해 대담한 변형과 복합적 시점을 자유롭게 구사하였다.

이 실현을 위해 분방하고 거친 필치와 먹을 강하게 사용하는 적묵법과 파선법의 형식을 낳았다. 적묵(積墨)은 먼저 붓에 먹을 얇게 찍어 그림의 윤곽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먹을 칠하는 것이다. 파선(破線)은 진한 먹을 퉁기듯 찍어가는 것이다.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植)은 황해도 옹진 태생으로 외할아버지인 소림 조석진에게 사사하였다. 그 후 일본에서 5년간 수학했다. 서화협회전과 선전에 출품했고 해방후는 국전에 심사위원도 역임했다. 서라벌예대 강의를 나갔고 1968년 5월문예상을 수상하였다. 1974년 개인전(현대화랑), 75년 동아일보사 주최 회고전(신문회관)이 개최되었다. 그에 대한 과소평가에서 벗어나 회화적 평가가 드높아가던 1976년 77세로 작고하였다.


그는 일찍 부모곁을 떠나 서울로 와서 외할아버지 댁에서 화업에 입문하였고 초년에 두 살된 딸을 남겨둔 아내와의 사별 등은 고독과 방황이었다.1937년 금강산에 들어가 커다란 전기를 맞는다.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각 봉우리의 산세, 바위의 형태, 물의 흐름, 나무의 형태를 자세히 살피고 스케치하였다. 금강산에서도 높이높이 치솟은 삼선암, 기운차게 흘러내리고 소용돌이치는 진주담 외에 옥류천, 보덕굴, 단발령을 다룬 작품이 많다. 둔중하고 거칠고도 힘찬 필치로 뻗어나간 산세와 기암절벽등을 역동적으로 그려냈다. 그가 평생에 가장 큰 감동으로 받아들였던 금강산 풍경을 통하여 진경산수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켰다.





한편, 우리나라 농촌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나의 이상향으로 그린 정형산수화가 있다. 이 경향은 <춘색 1944>,<무창춘색 1955>,<농촌의 만추 1957> 등이 있다. 1957년 국전 비리를 '공정 잃은 심사'로 신문에 폭로하고 화단을 외면한 후 재야작가로 작품을 제작한 반골(反骨)이었다. 적묵에 대해 너무 검다고 평하면 오기로 더 시커멓게 칠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그림속에 죽장을 집고 허위허위 길을 재촉하는 두루마기 입은 노인은 작가 자신으로 이야기 된다. 자신의 슬픔과 외로움마저 풍경처럼 객관화시키려는 심정으로 방랑자를 그려넣었던 것이다. 소정은 우리 국토의 최대 명승지인 금강산을 한국적 풍토의 갈색으로 귀중한 실경산수화의 맥을 이은 대가로 한국화 발전에 기여했다.


-포스틸갤러리 199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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