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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나현 : 아카이브의 박제성을 벗어난 미학의 확장

김주원


나현, ‘바벨 -서로 다른 혀’ 전시전경



나현의 작업은 형식에 있어서, 하나의 특정한 레퍼런스에서 시작하여 관련 자료나 다양한 형태의 문서는 물론 실재 인물을 인터뷰하는 등, 사건으로 구성되지 못했던 에피소드들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리서치 기반이 특징적이다. 이 같은 그의 작업은 객관화된 절대적 사실이라는 역사적 실증주의의 한계와 모호함에 의문을 제기하고, 역사적 사건이 되지 못한 에피소드 낱낱의 실존과 의미를 말한다. 

2012년부터 진행해 온 프로젝트 ‘바벨탑’은 대표적인 예이다. ‘바벨탑’은 작가가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1912년 독일제국의회의 혼혈혼 논쟁에서 본격화되었다. 이 논쟁의 핵심은 여러 인종 사이의 성적 교잡이 어떤 문제점을 드러내는가에 있다. 논쟁의 배경에는 식민지의 지배 인종이 피식민지인과 혼합됨에 따라 식민 주도세력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공포와 인종혼합이 종의 퇴화를 야기한다는 우생학 담론이 깔려있다. 여기서 나현은, 혼혈혼 논쟁에서 보여준 민족/순종에 대한 관념이 배태하고 있는 상대적 폭력성을 바벨탑과 같은 양상으로 보고 이를 식민주의와 근대주의가 지닌 한계와 모호함에 대입했다. 이에 대한 표상으로 베를린-악마의 산과 서울-난지도라는 두 도시의 인공산을 지목했다. 이러한 가설은, 악마의 산과 난지도가 언제부터, 왜, 어떻게 생겨나 오늘에 이르는지를 독일의회 회의록, 고지도, 사진, 카드, 벽돌 등 특정한 레퍼런스를 여러 개의 캐비닛에 아카이빙하여 그 역사적 인식 과정을 망라함으로써 증명했다. 또한, 베를린과 서울의 두 인공산에서 자라는 잡종/혼혈의 귀화식물들을 채집하여 작가의 인공산(바벨탑)에 심기도 하고 한편에는 채집된 식물을 드로잉 패널로 전시하기도 했다.  

나현은 최근 ‘바벨탑’을 규모와 형태가 각기 다른 전시와 작업으로 선보여 왔다. 

가장 최근인 지난 5월 초엔 베네치아비엔날레 기간 중 열린 동시대 한국미술 팝업전 ‘기울어진 풍경들-우리는 무엇을 보는가?’에, 특정한 레퍼런스들로 구성된 아카이브 캐비닛 <체리나무 바벨탑>(2013)과 식물채집 시리즈를 출품했다. 체리나무로 만든 캐비닛은 네 단의 서랍이 높이로 쌓아져 동서남북 사방으로 열리는 바벨탑의 컴팩트 버전이다. 서랍에는 두 인공산의 정치적, 시대적 이념에 따른 장소의 변화와 이를 둘러싼 논증의 레퍼런스들이 전시되었다. 

나현의 장기 프로젝트 ‘바벨탑’의 마지막 버전이자 최대 규모의 작업은 지난해 가을 대구미술관에서 선보였던 ‘바벨-서로 다른 혀’(2018.11.2-1.13)이다. 그는 미술관 1층 로비에서 시작되어 2, 3층을 관통하는 어미홀(층고16.8m)에 지구라트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미완의 제단 건축 ‘바벨탑’을 세웠다. 높이 8m, 가로 22m, 세로 11m의 건축은 여러 종의 귀화식물이 자라는 6층 계단 구조로 이루어졌다. 붉은 벽돌로 이뤄진 거대하고 단단한 건축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감각적으로 아름다웠다. 무너진 천장에서 바닥 내부로 깊게 향하는 역삼각형의 스테인드글라스엔 신(神)이 아닌 귀화식물 도상이 새겨졌다. 의심할 바 없는 주체로서의 민족/순종의 역사구성 과정에서 배제와 억압의 대상으로 타자화되었던 혼혈/잡종의 실존을 가시화했다. 잡종/혼종의 귀화식물에 신의 권위와 같은 빛의 권위를 부여한 것이다.

사실, 나현은 이미 잘 알려진 작가다. 그의 작업은 일반적인 리서치 기반 작업과는 달리 리서치 과정과 결과물의 형식에서 아카이브나 기록이라는 형식적 박제성을 벗어나 있다. 서사와 담론의 적절한 혼용과 균형을 유지하고 사건/역사와 그 인식 과정을 추적하여 역사의 새로 쓰기 가능성을 미학적 차원에서 열고 있기에. 단순한 듯 어려운 이것이 작가 나현과 그의 프로젝트를 추천하는 이유다.



나현

김주원 /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kimjuweon@gmail.com



- 나현(1970-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학사, 동 대학원 석사 졸업, 영국 옥스퍼드대학 순수미술 석사 졸업. ‘바벨탑’(2014, 독일 베를린 퀸슬러하우스 베타니엔), ‘PRO-JECT’, (2016, 독일 퀼른 Choi&Lager갤러리), ‘바벨-서로 다른 혀’(2018, 대구미술관) 등 개인전 및 ‘2013 에르메스 미술상’(아틀리에에르메스), ‘2015 올해의 작가상’(국립현대미술관) 등 단체전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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