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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노충현, 살풍경한 인간적 풍경

이은주

노충현을 떠올리게 하는 본격적인 작업은 그가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한강시민공원을 직접 찍어서 회화로 재현한 ‘살풍경’ 연작이다. 사진으로 찍은 현실의 이미지를 회화적 이미지로 번안하는 것은 2000년대 이후 노충현, 강석호, 김수영, 박진아, 박주욱, 서동욱, 이광호 등 한국 회화의 한 갈래를 특정할 수 있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사진과 회화의 관계에서 출발한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회화적 방법론에 어느 정도 빚지고 있을지언정, 이들이 만들어낸 회화적 장면들에는 한국의 풍경이 가지는 어떤 로컬리티가 투영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노충현의 경우는 2000년대 이후 한국 현대 회화의 지형을 대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이 단색화를 계승하는 모더니즘적 회화전통이나 이데올로기와 현실 비판에 대한 상징적 장치로서의 풍경을 그리는 민중미술의 계보에서 벗어나는 방식에 있어서, 서울의 로컬리티를 드러낸 1990년대의 이석주나 ‘그린다’는 것에 대해 탐색했던 최진욱의 회화적 유산을 계승하는 지점에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노충현, 결(a wave), 2011, 캔버스에 유채, 112.5×194cm


노충현의 풍경은 장소에 대한 경험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것으로부터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둔다. 이는 전체적 풍광을 바라보기 위한 구도의 선택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동시에 대상으로부터의 감정적 거리를 유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감정의 과잉이 없는, 노충현의 작업 특유의 건조하고 까칠한 느낌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거리감은 풍경의 소재가 되는 장면 자체가 아니라 노충현이 현실의 대상에 대해 유지하고자 하는 감정적 거리와 분명 관련된다. 이는 아마도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이 압축된 중성적이고 무미건조한 서울의 풍경 안에서 자랐으면서도 그 ‘살풍경’에 완전히 동화되기 어려운 자가 느낄 수 있는 감정적 거리감일 것이다.

하지만 노충현의 그림에서는 이러한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 안에 개입되는 미묘한 정서적 울림이 느껴진다. 분명한 거리가 있으나 냉정하지 않은 그 풍경 안에는 서울 토박이인 필자가 느끼는 서울과 흡사한 공기가 담겨있다. 그의 대표적 연작이 된 한강시민공원 풍경들에는 계절별로 달라지는 장면에 대한 정서적 감흥이 투영된다. <결>(2011)과 같은 작업에서, 노충현은 황량한 한강시민공원에 썰렁하게 서 있는 인공적인 초록색 차광막 뒤로 무성한 나무들이 춤을 추듯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을 그렸다. 일상 속에서 자주 봄직한 평범한 장면이지만, 멋없는 한강고수부지의 공터에 불어온 바람이 공간 전체를 조용하게 흔드는 듯한 이 장면은 그 자리에서 작가가 느꼈을 정서적 반응을 환기시켜준다.



노충현, 속삭임(a whisper), 2018, 캔버스에 유채, 130×130cm


최근작 <당신의 바다>(2019) 연작에서는 노충현이 견지해왔던 감정선이 인물과 풍경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는 바다의 수평선에 맞추는 바다 풍경화의 전형적 구도에서 벗어나, 인물의 등신상에 맞추어 바다의 수평선을 축소시키는 세로 구도를 채택했다. 이러한 구도는 바다의 끝없는 광대함을 강조하기보다 풍경 앞에 서 있는 인물들의 뒷모습에 집중하게 한다. 과장 없이 그려진 그 뒷모습에는 어딘지 주저하는 듯하고, 일상에서의 해방을 원하면서도 두려워하며. 현실에 안주하고 싶으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우리 존재의 위상뿐 아니라, 세월호 사건 이후 바다 앞에서 청년들을 향해 갖는 집단적인 부채 의식과 같은 복잡한 감정까지 스며들어 있다. 결국 노충현의 작업에서 관람자인 내가 보는 것은 작가 자신의 시선과 정서와 감각이 포함되어 있는, 그렇기에 그 장소 안에 있는 작가를 느끼게 하는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실상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그 살풍경한 현실을 살고 있는 한 작가의 시선이 내재되어 있는 인간적 풍경인 것이다.



노충현



이은주 / 독립 기획자, 미술사가
tipasa_@hanmail.net


- 노충현(1970- )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석사. ‘자리’(2006, 대안공간풀),‘살-풍경’(2011, 조현화랑), ‘살풍경’(2013, 국제갤러리) 외 개인전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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