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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이승조 다시 읽기

윤진섭

이승조, 도열하는 기둥 전시전경(2020.6.18-11.8,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나를 ‘파이프 통의 화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별로 원치도 않고 또 싫지도 않은 말이다. 구체적인 대상의 모티브를 전제하지 않은 반복의 행위에 의해 착시적인 물체성을 드러내고 있음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물론 현대문명의 한 상징체로서 등장시킨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고(故) 이승조(1941-90) 작가가 남긴 것이다. 작년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그의 회고전을 둘러보면서 나는 복잡한 상념에 잠겼다. 작가란 무엇인가? 또 작품이란 과연 무엇인가? 특히 작고 작가의 경우,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차라리 살아있다면 대화라도 나누어볼 텐데, 그렇지도 못하지 않는가?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의 단색화’전을 기획할 때만 해도 이승조는 초대작가 명단에서 배제되었다. 당시 이 전시의 초빙 큐레이터인 나의 뇌리에 그는 기하학적 추상의 작가로 각인돼 있었다. 아마 어쩌면 ‘파이프’라고 하는 강한 이미지가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1970년대 초반과 작업의 중반기인 80년대에 간헐적으로 등장한 유채색의 사용은 그를 단색화 작가로 간주하는 데 고심하게 만들었다. 최종까지 주저하게 만든 요인은 예의 ‘파이프’ 형태였다. 화면을 뚜렷이 가르며 시각적 잔상을 남기는 기하학적 반복의 띠들이 단색화보다는 기하학적 추상의 작가로 분류하게 만든 것이다.

그 후 단색화와 관련된 여러 전시를 추진하면서 이승조의 작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의 초점은 1970-8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나타난 회색과 검은색 계통의 무채색 화면에서 예리한 선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에 모아졌다. 이는 80년대 초반에 시도된 한지의 사용과 함께 단색화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었다. 2016년 ‘LA ART SHOW’의 특별전으로 열린 ‘단색화Ⅱ: 4인의 궤적(Korean Dansaekhwa: The Traces of 4 Artists)’전(2016.1.27-1.31, LA Down Town Center)을 큐레이팅한 나는 안영일, 김형대, 유병훈과 함께 이승조의 작품을 소개하였다.

앞에서 인용한 글에도 나와 있듯이, ‘반복의 행위’는 촉각성, 정신성과 함께 전기 단색화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이다. 행위의 반복이라. 이승조의 경우,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을 통한 반복인가? 작년의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을 둘러보면서 유족의 증언과 전시된 관련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새롭게 안 사실이 있다. 그는 평붓으로 그렸다는 것. 그렇다면? 아차! 나는 이제까지 이승조의 화면에 나타난 색의 ‘단계별 흐리기(계조:gradation)’에 의한 시각적 잔상 효과가 스프레이 기법에 의한 것으로 오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붓으로 반복해서 문지르고 칠한 것과 스프레이로 뿌린 것과는 개념상 큰 차이가 있다. 전자가 신체를 통한 수행의 의미(肉化)를 지니는 반면, 후자는 기계적이고 차가운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신체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한 물질적 변형이 있는가의 여부가 중요하다. 붓을 통한 방법이 손의 반복적인 행위에 의해 유성 안료가 캔버스 천으로 스며드는 데 반해, 스프레이는 입자들이 쌓이며 표면에 정착된다.

너무나 기초적인 상식을 확인하지 않은 것은 나의 실수였다. 왜 나는 그것을 스프레이 기법으로 오인한 것일까?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마도 70년대 중반 그림을 그릴 때 스프레이를 써 본 나의 경험 때문인 것 같다. 당시 나는 철제 셔터를 배경으로 남성용 소변기 속에 손잡이가 달린 옷솔이 들어 있는 장면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적이 있는데, 엷은 베이지색의 셔터를 테이핑 작업을 통해 묘사하면서 비슷한 효과를 연출했던 것이다. 전시기획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의 확인임을 알려주는 값진 교훈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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