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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상실’을 통한 인간의 내면 풍경 들여다보기

윤진섭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즉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망의 감정이 수시로 바뀌며 휘몰아치는 가운데 각 상황에 맞춰 각기 다른 반응을 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에 비유되기도 한다. 추위와 더위, 따뜻함, 포근함, 시원함 등등 천변만화를 부리는 자연의 모습이 인간의 성정(性情)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의 그런 다양한 감정 중에서 ‘상실’로 주제로 풀어낸 전시가 있어 눈길을 끈다. 대전시립미술관이 마련한 기획전 ‘상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2021.3.2-5.9, 홍예슬 기획)이 그것이다.





‘상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 전시 전경


이 전시는 4개의 섹션으로 구성돼 있다. 섹션1. 애도일기, 섹션 2. 사물일기, 섹션 3. 외면일기, 섹션 4. 전쟁일기. 

주제가 ‘상실’이라 그런지 전체적인 분위기는 다소 가라앉고 스산한 편이다. 그러나 신인과 중견, 중진작가들의 다양한 내용의 회화와 영상, 오브제 작품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시작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볼거리를 쏟아낸다. 전시장 입구에서 만난 강철규의 그림들은 소설과 그림을 병행하는 작가의 섬세한 감수성이 숲속에서 전개되는 인간의 이야기들에 진하게 배어있어 좋았다. 회화는 붙박이 그림의 형식이지만 대작의 장면 장면이 마치 연속적인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박진감이 느껴진다.

상실은 잃어버림을 의미한다. 사람의 경우처럼 죽거나 자발적으로 사라졌건, 동물이나 사물처럼 어쩌다 잃어버렸거나 혹은 저절로 소멸했건 지금 여기에 없는 상태다. 사람들은 그것들이 없기 때문에 그리워하고 애도하거나 기원한다. 결핍에서 비롯된 그러한 상실의 감정은 신미경의 비누작품처럼 언젠가는 소멸될 운명의 사물이거나, 백요섭의 콘크리트 작품처럼 철거된 재개발지에 남은 흔적의 파편들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기억이란 무엇인가? 과거의 경험이 진원지인 기억은 실체가 결여된 상태에서 이미지를 소환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따라서 행위가 없는 기억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섹션4 <전쟁일기>의 조해준은 아버지 조동환으로 하여금 기억도 아스라한 과거의 군대 시절 추억을 소환하게 했다. 따라서 조동환이 서툰 듯 그러나 능숙하게 그린 수많은 인물 스케치들은 기억 속에 존재하는 실존 인물의 모습들이다. 그것들은 실제로 한국 현대사를 수놓은 단면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개인의 추억을 넘어 역사적인 참조물들이다.

내게 단 13분만 주어진다면? 국내에서 처음 상영되는 크리스 버동크(Kris VERDONCK)의 <실신>(2010)은 높은 빌딩에서 뛰어내린 화자(話者)의 내레이션이 13분 동안 수직으로 천천히 이동하는 카메라 워크를 따라 전개되는 작품이다. “다시 시작되고 있어 태양을 봐”라는 독백으로 끝을 맺는 이 단편영화는 시적으로 압축적인 대사를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수작(秀作)이다.

간판의 사회사(社會史)! 졸속으로 이루어진 한국의 도시개발 이면을 살펴볼 수 있는 테마다. 빌딩마다 덕지덕지 붙은 간판들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을 상기시킨다. 그 풍경이 이젠 점차 사라지고 있다. 고정원의 <간판 교체 프로젝트>(2013- )는 이 개발 과정에서 나온 참신한 아이디어다. 낡은 간판을 새 간판으로 교체해 주면서 상점 주인들의 다양한 반응을 녹음하거나 기록한 다큐멘터리 작업이다.

이 전시에는 안규철을 비롯하여 정연두, 박이소 등 유명한 작가들의 기발표 작품들이 주제에 맞춰 출품되었다. 그리고 짧은 지면 때문에 언급하지 못한 김두진, 양정욱, 정영주, 서민정은 주제를 심도 있게 푼 작품들을 출품하였다. 섹션별 소주제들은 ‘상실’이란 대주제를 잘 구현하였다. 공간구성이나 디스플레이, 전시정보 등 전체적으로 잘 짜여진 전시여서 관람 분위기가 쾌적한 좋은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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