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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인연

윤진섭

인연! 세상에 인연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까? 금아 피천득 선생은 『인연』이란 명수필을 남겼다. 내게도 오랜 인연을 되새김하면서 석별의 아쉬움을 그림 한 점으로 달래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 순간은 앞으로 다가올 훈훈하고 생산적인 관계를 예고하는 새로운 출발의 시간이었다.



박호길 원장과 필자


박호길 원장은 의료인으로 내과 전문의이다. 1941년생이니 만으로 올해 80세다. 1970년대 초반에 인사동에 있는 혜정병원에서 진료를 시작, 그때부터 그림에 관심을 두고 수집을 시작했다. 그 뒤 역삼동 사거리 근처에 박내과의원을 개업하면서 그림 수집은 더욱 전문성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수집 경력은 의료인으로서의 출발과 궤적을 같이 한다. 어언 50년에 가까운 세월을 그림 수집에 바친 것이다. 그러자니 자연 그림수집에 관한 시야가 트이고 나름 철학이 생겼다. 물론 그 역시 초기에는 적잖은 수업료를 물었다.

내가 박호길 원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압구정동과 무역센터 현대백화점이 직영하는 현대미술관의 총괄 관장으로 일하면서 컬렉터인 그와 상면한 뒤, 박 원장이 소장품을 바탕으로 양평에 닥터박갤러리를 열면서 더욱 자주 만나게 되었다.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끼고 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닥터박갤러리 건물은 건축가 승효상의 건축 미학이 잘 드러나 이내 명소로 떠올랐다. 이 갤러리가 특히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여러 차례에 걸쳐 TV 드라마를 통해 소개되면서부터였다.

닥터박 컬렉션의 특징은 부르델이나 콩바스, 부이 쑤언 파이와 같은 동서양 유명작가의 소장품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고 손동진 화백(1921-2014)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한 데 있다. 대표작을 포함, 약 70여 점에 이르는 명 컬렉션이다. 이는 질적·양적 측면에서 볼 때 손동진 회화의 연구에 필요한 절대적인 수치이다.

신라의 고도 경주 출신인 손동진은 일찍이 일본 국립동경미술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국립파리미술대학을 졸업하였다. 벽화연구에 일가견이 있어 서울시민회관 벽화를 비롯하여 국내외에 다수의 벽화를 남겼다. 벽화를 연구하기 위해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했으며, 루브르미술관 프레스코 연구 코스를 졸업한 프레스코 벽화에 전문적인 식견과 많은 제작 경험을 지닌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의 작품에서 두꺼운 질감이 나타나는 이유이다. 짙은 녹색과 붉은 황토색의 대비가 두드러진 손동진 회화는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 미적 보편성의 획득이라는 장점을 지닌다. 이는 유목민처럼 고향을 떠나 유럽을 비롯한 타향을 떠돌면서 거꾸로 마음은 늘 고향에 머물렀던 소회의 소산이 아닐듯싶다. 고향 경주의 남산이 지닌 푸르름과 황톳빛 서정이 한데 어울려 화폭을 수놓은 것이다. 올해가 그의 탄생 100주년인데 미술계에서 그를 기리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은 매우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다. 최소한 경주에서만이라도 그를 기리는 전시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1990년대 초반의 첫 만남 이후 지난 10여 년 간 정기적으로 그의 병원에 다니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박 원장은 의사로서는 자상하고 편안하여 환자를 안심시키는 명의였고, 갤러리에서는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등 정서적 안정을 꾀하려 노력하였다.

박 원장의 미덕은 무엇보다 끊임없이 연구하는 학구적 자세에 있다. 특히 손동진 화백에 관한 연구는 여느 전문가에 못지않아 책을 준비할 정도이니, 이는 긴 시간 손동진의 작품을 벗 삼아 대화를 나눈 결과다.

고령으로 박호길 원장은 이제 47년간에 걸친 의사의 직분에서 은퇴하여 손동진 연구자 겸 미술품 컬렉터로서 제2의 인생 출발선에 서 있다. 나의 개인전에 방문한 그에게 정성이 담긴 마음의 선물로 소품 한 점을 드리면서 오랜 기간의 인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그 순간이 나는 참으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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