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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미술 3제

윤진섭

1. 헐랭이와 국화빵
‘헐랭이’. 백남준 선생이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부른 말이다. ‘헐랭이’는 기질, 천성, 인간성, 삶의 태도, 세계관과 연관된 개념이다. 의식이 헐렁한 사람은 사고가 밀가루 반죽처럼 유연하며, 늘 경계에 있고, 허심탄회하며, 어린이처럼 솔직하고 천진한 편이다. 그래서 얼핏 보면 늦되고 뒤처지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섬광과도 같은 통찰력과 사자와 같은 용맹을 발휘,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어 역사를 창조해 나간다. 거기에 타고난 창의성과 무한한 상상력이 바탕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마치 칭기즈칸과도 같은 스타일인데, 백남준이 자신을 가리켜 ‘황색 재앙’으로 불러 서양인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일화는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각자 그릇만큼만 살면 아무 문제가 없다. 어차피 타인의 삶을 살 수는 없으니까.


2. 비물질이여 영원하라!
새벽에 일어나 묵은 책을 정리하다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저 많은 책을 그냥 버릴 게 아니라 설치미술이라도 해 보자. 요즘은 넘쳐나는 게 책이라 도서관에 기증한대도 받기를 꺼린다지? 지금은 비물질이 물질을 지배하는 세상이다. 수십 권의 책이 손톱 만한 USB에 들어가는 세상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쌓인 책을 하나하나 들춰보면서 마치 고향에라도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디지털 세대는 ‘비물질화된 세대’이다. 고향을 잃은 세대다. 세상은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할 정도로 편리해지고 있지만, 마음은 그만큼 고향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수천만 원의 송금을 손가락 하나로 해결하고, 실체 없는 풍경을 영상으로 감상한다. 스마트폰 동영상으로 엄마와 통화하면서 육친의 정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역시 실체없는 비물질과 대화를 나눈 것에 불과하다. 엄마 특유의 냄새, 살의 느낌, 눈의 표정, 등등 몸의 직접성이 주는 생생한 물질감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물질의 현존성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오버, 신우주도, 2023


책을 들추다 한 작고 작가의 화집 뒤편에 실린 빛바랜 흑백사진들에 눈길이 멈춘다. 그것은 분명히 물질들로 구성돼있다. 출판된 지 오래돼 빛바랜 종이 위에 찍힌 역시 빛바랜 사진들. 중절모자를 쓰고 친구들과 웃으며 찍은 사진을 보니 ‘1942년 9월 3일, 속리산 법주사에서’라고 쓰여 있다. 냄새를 맡으니 약간 퀴퀴하기는 하지만 역시 물질의 내음이다. 만일 스마트폰으로 내려받은 똑같은 이미지에 코를 가까이 댄다면 과연 어떤 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전자 유목민’이란 말도 있지만,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몸에 지니고 세계를 떠도는 현대판 대상들에게 사막 위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볼 때의 정취는 없다. 경제적 이익은 때로 자연의 풍경이 주는 장엄함을 몰아낸다. 이 또한 효율성이란 이름 아래 벌어지는 비물질의 승리이다. 글을 끝내려는데 몇 년 전에 뉴스로 접한 사건이 뇌리를 스친다. 한 젊은 부부가 아기에게 밥을 먹이는 전자게임에 몰두하다 실제 아기를 굶겨 죽인 사건. 그렇다면 이 또한 비물질의 승리가 아닌가?


3. 사물들(Objet)
내게 지고의 가치가 있는 것도 남에게는 빵 한 조각만큼의 가치가 없는 것이 있다. 오브제(objet)가 바로 그런 경우다. 남이 버린 물건을 주어다 재활용하는 일은 새로운 창조에 버금가는 일인데, 그렇게 만든 것이 남에게는 한 푼의 가치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역사라는 것은 참으로 묘해서 미술관은, 특히 현대미술관은 오브제의 관점에서 봤을 때 ‘쓰레기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마르셀 뒤샹, 쿠르트 쉬비터스, 백남준, 피에로 만조니, 아르망, 로버트 라우센버그, 이승택, 김구림 등 오브제를 활용한 작품을 만든 아티스트는 일종의 넝마주이가 아닌가? 버려진 쓰레기 틈에서 보석을 찾는 현대의 오브제 아티스트는 시간을 낚는 낙시꾼이다. 

작품은 사람이 만들지만, 완성자는 시간이고 관객이다. 시간의 두께가 쌓인 오브제에서는 특유의 향기가 난다. 그것을 가리켜 아우라라 해도 좋고 ‘시간의 층’이라 해도 좋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오브제에게는 ‘물격’이 있다. 오브제라 해서 다 같은 오브제가 아니다. 오브제는 발견됨과 동시에 생명이 부여돼 이력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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