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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예술은 경전이 아니요, 심심한 물이다

윤진섭

작년 연말에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작가 겸 큐레이터인 중국의 차이 친(Qing CAI)으로부터 묵직한 소포 하나를 받았다. 카셀도큐멘타 기간에 카셀 시내에서 열린 대규모 퍼포먼스 행사의 후(後) 도록인 『Overlapping Kassel』 1, 2권이다. 총 1천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2009년에 한국에서 열린 국제 퍼포먼스 행사에서 만난 이후 차이와 나는 죽 친교를 맺어왔다. 우리는 서울을 비롯하여 북경, 내몽고, 몽골, 캐나다의 퀘벡 등 세계의 여러 곳에서 만나 국제미술의 동향을 논의하고 미래의 활동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였다.



카셀도큐멘타 기간에 카셀 시에서 열린 ‘Overlapping Kassel’ 도록, 2022


차이 친은 일찍이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적 발신기지 가운데 하나인 독일의 카셀도큐멘타(Kassel Documenta)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베네치아비엔날레와 함께 행사가 열릴 때마다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힘을 지닌 카셀도큐멘타는 지금은 고인이 된 요셉 보이스의 <7,000그루의 떡갈나무>로 유명하다. 보이스는 자신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를 ‘사회적 조각’이라고 불렀다. 1972년, 카셀도큐멘타에서 발원한 이 식목 프로젝트는‘100일간의 자유국제대학(F.I.U)’과 함께 보이스의 사회, 문화, 예술, 정치 등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철학을 대변하는 핵심이다. 요셉 보이스는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는 발언을 통해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창의력 개발이 중요함을 평생에 걸쳐 설파하고 행동에 옮겼다. 그의 예지력은 적중했다. 1986년, 요셉 보이스는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심은 7,000그루의 떡갈나무는 잘 자라 지금도 카셀 시내를 울창한 푸른 숲으로 덮고 있다. 일찍이 그는 자연과 생태의 위기를 예견했던 것이다.

요셉 보이스의 정신을 이어받은 차이 친은 2007년부터 카셀도큐멘타가 열릴 때마다 카셀에서 다양한 국적의 행위예술가들을 규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백미가 작년에 열린 ‘Overlapping Kassel-Now Live Art Tour 7’(2022.6.16-6.26)이다. 전 세계에서 약 60여 명에 이르는 행위예술가들은 프레데리치아눔 광장을 중심으로 카셀시내 전역에서 일종의 게릴라성 행위를 벌였다.

작년 초에 차이 친은 나를 작가로 초대하였지만 마침 같은 기간에 ‘전시가 겹쳐(overlapping)’ 참가가 어려웠다. 그래서 대안으로 작품을 보내기로 했다. 마침 나는 2018년부터 시작한 ‘비닐봉투 작업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내 기억에 90년대 후반만 해도 집에 우편으로 배달돼 오는 각종 전시 팸플릿과 엽서 등은 분명 종이봉투였는데, 언제부턴지 비닐봉투로 대체되었다.

하루는 “이거 환경 폐해가 심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그날부터 비닐봉투를 모으기 시작했다. 양이 만만치 않아 한 달이면 라면 상자에 가득 찼다. 네이버 검색해 보니 비닐이 완전히 썩는데 20년에서 400년 걸린다고 나왔다. 그때부터 비닐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달에 한 번씩 모은 비닐봉투를 상자에서 꺼내 청색 테이프로 공처럼 감았다. 작은 수박만 한 공이 50여 개가 모였다. 나무숲 속에 줄을 늘어트린 뒤 매단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2022)의 출품작은 그렇게 해서 모은 비닐 공의 겉면에 관객들이 환경에 대한 자신의 메시지를 적는 관객참여형 퍼포먼스였다.

‘Overlapping Kassel’에 보낸 나의 출품작은 일종의 메일아트+퍼포먼스 형식이었다. 두 개의 비닐 공 겉면에 ‘예술 폭탄(Art Bomb)’, ‘자본 폭탄(Capital Bomb)’이라고 쓴 다음, 국제특급우편(EMS)으로 차이 친의 주소로 보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사고가 났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사태가 우편배달을 지연시킨 것이다. 나의 원래 계획은 차이 친이 이 두 개의 공을 프레데리치아눔 광장에 놓아 관람객들이 축구를 하며 놀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팬데믹 사태로 우편물의 배송이 예정보다 많이 늦어졌고, 내가 도착했다는 전갈을 우체국에서 받은 것은 차이 친이 카셀을 떠난 뒤였다.

예기치 못한 비닐 공의 실종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예술과 자본의 게임을 축구로 풀어보려던 나의 꿈은 그렇게 해서 불발이 되었는데, 지금 미아가 돼서 카셀 시내를 떠돌아다닐 나의 분신은 먼 훗날 산산이 분해돼 미립자들이 한국에 있는 나의 곁을 떠돌지도 모를 일이다. 그 전말과 퍼포먼스의 의의가 이 책의 서문에 실려있으니 관심 있는 독자는 살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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