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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강하진, 감법(Negative)의 역설

윤진섭

인천에 소재한 선광미술관에서 ‘강하진-자연 질서의 세계’전(9.1-10.13)이 열렸다. ‘자연 질서의 세계’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사계를 주제로 한 그림들은 제각기 특색이 있다.

봄의 가볍고 따뜻하며 포근한 정취, 이런 류의 그림은 마치 복사꽃이 화사하게 핀 것처럼 연한 핑크색의 기미가 두드러진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핑크빛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림의 표면은 특별히 돌출되거나 되바라진 데 없이 전체적으로 평평한데,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은 꽃잎 크기의 붓자국들이 무수히 찍혀 있는 형국이다. 그러니까 평평하게 보이는 캔버스의 표면이 실은 연속된 자잘한 붓질의 조합인 셈이다. 연속적인 붓질이되, 강하진의 붓질은 추상표현주의 류의 추상화에서 흔히 보듯, 마구잡이로 찍는 그런 자의적인 붓질이 아니라, 조직적이며 구축적인, 즉 논리적인 붓질이다.

그렇다면 그의 논리는 과연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그는 “평면에서 가장 튼튼한 구조는 수직 수평의 구조”라고 말한다. 이를 그의 그림에 적용하면 마치 직물의 구조처럼 날줄과 씨줄이 교차하면서 드러나는 입체물임이 드러난다. 그것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점들이 사방으로 일정한 방향성을 지니며 나아갈 때, 거기에는 점을 찍을 때 작가의 내면에서 일렁이는 섬세한 감정의 파고와 미세한 숨결의 호흡이 각기 달리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논리적으로는 하나의 작품에 찍힌 수천, 수만 개의 점들이 겉보기에 서로 유사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개체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그림을 가까이 다가가 볼 때와 중간 거리, 그리고 멀리 떨어져 볼 때 다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강하진, 자연율, 1994, 어망용 천에 아크릴 채색, 220×230cm


거기에 덧붙여 강하진은 수직적인 구조를 강조한다. 여기서 수직적인 구조란 캔버스 표면이 일정한 두께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그 두께는 붓질의 반복에 의해 형성된다. 작거나 그보다 약간 큰, 그리고 색깔이 서너 가지, 예컨대 적색, 백색, 오렌지색, 은색을 띤 점들이 캔버스 표면에 찍히고 그것들은 종국에 가서 하나의 피륙처럼 평면을 이루게 된다. 강하진은 이즈음에 다시 붓을 들어 지우기를 시도한다. 그의 말을 빌리면 “수직 수평의 지우기를 반복하면 구성에서 벗어나 그림은 하나의 튼튼한 구조체가 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강하진의 작업은 격자형 철골 구조를 만들고 그 안에 작은 자갈이 섞인 시멘트 반죽을 부어 이루어지는 건축의 과정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건축의 공법이 재료를 덧붙이는 가법에 의존하는 것과는 달리, 강하진의 그것은 감법, 즉 지워서 없애는(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네거티브) 방식이되,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물감이 쌓이는 적층의 역설에 의존한다. 강하진의 작품을 들었을 때, 묵직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강하진은 1943년생이다. 올해 여든한 살의 원로작가이다. 90년대 초반에 그의 작업을 가리켜 “회화의 본질에 대한 끝없는 질문”이란 제목을 달아 평한 적이 있다. 그런데 30년이 흐른 지금 이제 와 다시 보니 강하진은 지팡이에 몸을 의존하는 지금도 회화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집요하게 묻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일정한 거리에서 보면 단색화로 오인받을만도 한데, 미술시장은 멀찌감치 그를 비켜 지나갔다. 그렇다면 이는 축복인가, 불행인가?

모르겠다. 오직 시간만이 알뿐, 고집으로 똘똘 뭉친 쇠심줄같이 질긴 강하진의 자존심이 그토록 오랜 세월을 버티게 만든 동인이라는 사실 외에는.

70년대 초반부터 실험미술 그룹 <신체제>를 중심으로 화단 활동을 시작한 강하진은 그동안 온갖 실험을 다했다. 평면은 물론 입체, 설치, 음향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한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작업에 몰두해 온 그다. 그런 그가 90년대에는 평면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망용 천 위에 활달하고 거친 터치의 표현적인 추상풍의 작업을 했다. 나는 천을 이용한 이 시기의 작품을 특히 좋아한다. 이때 그는 캔버스의 가장자리에 주목, 흠을 내는 등 매체실험적인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하진 작업의 본령은 역시 회화이며 <자연율> 연작은 탐구의 중심을 이룬다. 거듭되는 점찍기와 칠하기의 반복은 캔버스 평면의 묵직하고 깊은 느낌을 자아내는 요체이다. 사계의 느낌을 표현한 연작들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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