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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정현, 폐품의 미학

윤진섭

전시 전경


조각가 정현의 《덩어리》 전시(2023.12.20-3.17)가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덩어리. 조각의 가장 기본개념인 양괴(mass)에 초점을 맞춰 1990년 이후에 정현의 조각이 어떤 변천의 과정을 거쳤는가 하는 점을 살피고 있다. 조각가 정현의 열정적인 삶 속에 흐르는 기본 정신은 실험과 자유다. 아무 굴레나 속박에도 얽매이지 않으려는 자유로운 의식이 그의 조각적 실험을 추동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한 정현의 실험의식은 자연스럽게 재료에 대한 개방으로 이어졌다.

일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침목을 비롯하여 낡은 한옥을 헐 때 나오는 폐자재, 석유 찌꺼기인 콜타르, 폐철근, 녹슨 철판, 아스콘(아스팔트 콘크리트), 파쇄공 등이 정현이 주로 사용하는 조각의 재료들이다. 이번 전시는 이처럼 다양한 재료들로 만든 조각 작품들과 드로잉, 판화 및 각종 아카이브 자료가 어우러져 정현의 90년대 이후 조각의 개념과 변화의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준회고적 성격의 전시다. 정현하면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는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단순한 형태의 인간 군상이지만, 검붉은 콜타르로 그린 드로잉들도 그에 못지않게 강하게 다가온다. 정현은 드로잉을 본격적인 조각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밑그림 정도로 가볍게 대하지 않고 하나의 장르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자신이 하고 있는 조각과는 별도로 드로잉의 미학을 추구하며, 그것은 그 나름대로 뚜렷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드로잉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정현은 이번 전시에 독특한 판화작품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병원에서 구한 폐 엑스레이 필름에 흰색 수정액으로 인체 드로잉을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예는 미술에 대한 정현의 실험정신을 보여주는 것이거니와, 근래에 장도에 소재한 레지던시에 입주하여 보여준 행위는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레지던시에 머문 수개월 동안 정현은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돌들이 깔린 바닷가를 산책했는데, 거기서 마음에 드는 돌들을 수집한 것이다. 이 돌들이 이번 전시에 출품됐다. 그러나 이 돌들은 작품이 아니라 아카이브 자료들이다. 수백 개에 이르는 돌들이 2층 전시장 한 켠에 수북이 쌓여 있는데, 각각에는 고유 숫자가 적혀 있었다. 정현은 그 돌들을 스캔하여 얻은 돌의 단면을 바탕으로 남서울미술관의 정원에 세워진 석 점의 거대한 흰색 조각품을 제작했다. 

정현의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었다. 아스팔트를 깔 때 나오는 폐자재인 아스콘으로 만든 조각작품이다. 이 재료에 주목하게 된 이유를 정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는 것 중에 하나죠. 자동차 길 밑에 깔려 있는 아스팔트 콘크리트인데 그러고는 버리죠. 공사를 하면서. 보잘것없는 것들입니다. 하찮은 것들인데, 이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들도 이 재료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뜯어보면…(중략).”

정현은 재료가 내는 어떤 발신음을 들은 것 같다. 그는 재료의 특징을 분석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유추해 보면, 재료가 연약해 입상은 어려우니 누운 자세가 낫겠어서 머리와 가슴, 엉덩이, 다리 등으로 삼등분하되, 형태는 단순하고 얼굴 부분에 약간의 손길을 가해 그것이 인체임을 암시했다. 얼핏 미이라를 연상시키는 정현의 이 작품은 날카로운 예각의 형태를 보이는 몸통 부분에 주목하면 산을 연상시키는 추상 조각에 속한다. 정현의 실험정신은 드로잉 작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철판 드로잉이 주목할 만한데, 이번에 출품된 작품 중에서 흰색으로 칠한 사각의 철판을 승용차의 뒤에 매달고 달려 흠집을 낸 드로잉이 눈길을 끌었다. 

‘긁히면 녹이 나고 비가 오면 녹물이 흐르는’ 철판의 속성을 이용한 이 작품은 철판에 녹을 내기 위해서는 차 꽁무니에 매달고 달리거나 채찍으로 후려친다. 그렇게 해서 만신창이가 된 철판은 6개월 정도 지나면 녹과 녹물이 나게 되는데, 그게 요즘 시도하는 정현의 드로잉이다. 인체를 연상시키는 정현의 단순한 추상조각은 검붉은 콜타르 용액으로 단숨에 그린 파열할 듯한 추상적 인체 드로잉을 거쳐 사물과 시간이 합작한 철판 드로잉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음 작업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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