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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어두운 밤과 차가운 바람을 가르다

김정현

2018년 9월의 어느 날, 종로구 한 단독주택 2층의 열린 창문 틈으로 뽀얀 먼지가 새어 나왔다. 건물 안 일꾼들의 분주한 움직임에 먼지는 쉬이 가라앉지 못했다. 서가에 꽂힌 발행일이 50년을 쉽게 넘나드는 시간대의 책들은 소장자의 학문에 대한 태도를 묵묵히 대변하고 있었으며, 여러 참고서는 소장자가 자신의 학문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간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를 엿보게 했다. 이 모든 책과 다양한 서류가 박스에 차곡차곡 담겼다. 일꾼들은 박스를 들면서 그 무게 때문에 작은 신음을 냈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오래된 나무 계단은 자료의 무게가 더해진 일꾼들의 걸음으로 삐걱 소리가 났다. 대문은 일꾼들이 가지고 온 손수레가 기대어져 활짝 열려있었다. 그렇게 2시간 정도의 자료 포장 및 상차작업이 마쳐지고 일꾼들은 자료의 소장자에게 인사하고 길을 나서려 했다. 소장자에서 기증자가 된 그 원로미술이론가는 한 일꾼에게 차 한잔을 권했다. 테이블에 앉은 기증자는 일꾼에게 사소한 일상부터 자신이 탐구한 세계에 관한 것까지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4년의 세월이 지나 그 서가에 꽂혀 있던 책과 서류로부터 시작된 전시가 준비되고 있다. 주제는 ‘한국독일미술교류사’이다. 전시는 독일에서 1957년부터 1962년까지 뮌헨대학교에서 미술사학을 수학하고 국내 초창기 독일미술전을 기획한 박래경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이 기증한 자료를 포함하여 한국과 독일 간 미술교류에 대한 기록으로 구성된다.

조선 후기부터 이어진 한국과 독일의 미술교류를 작가와 이론가의 활동 그리고 파독 광부, 간호사, 분단, 통일 등의 사건으로 살펴본다. 한국과 독일의 문화적 토양을 함께 흡수하고 자기화한 작가인 배운성, 백남준, 안규철, 뮌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그들의 작품도 함께 선보인다. 전시 부제 ‘어두운 밤과 차가운 바람을 가르다’는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의 첫 가사“바람이 부는 늦은 밤, 말을 타고 달리는 이 누구인가?”를 참고했다. 가곡 마왕이 오늘날까지 거듭 재해석되는 까닭은 극의 배경이 되는 밤과 바람으로 은유된 어려운 삶의 환경이 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반복되는 위기만큼이나 지속하여온 삶을 향한 의지의 표상으로서 부제를 정하였다.

‘미술자료’ 박물관의 학예사로서 무수한 자료를 엮어 과거와 오늘, 미래에 대한 나름의 유의미한 의견을 게재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미술사 연구 주제와 방법론에 관심을 두고 있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오늘날처럼 국가 간 장벽이 낮아진 시대에 미술사는 어떤 방향으로 서술되고 있는지, 또 어떤 방향으로 서술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최근 연구를 살펴보았다. 한국에서만 해도 3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탈식민주의 서사의 위세가 여전히 강하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적으로 유명세를 지닌 작가와 큐레이터에 대한 재해석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전시를 통해 정리될 자료와 여러 맥락을 지닌 작품들이 함께 놓였을 때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좌) 배운성, <모자를 쓴 자화상>, 1930년대, 캔버스에 유채, 54×54cm, 개인 소장
우) 백남준,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 테이프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 1958-1962, 
오브제·퍼포먼스, 50×36×3cm, 백남준아트센터 소장


배운성의 <모자를 쓴 자화상>(1930년대)과 백남준의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 테이프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1958-1962)이 우리 박물관에 오게 된다.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는 백남준이 1959년 독일 뒤셀도르프 갤러리22에서 선보인 그의 첫 퍼포먼스임과 동시에 이때의 소리 콜라주를 녹음한 릴 테이프 오브제 작품의 제목이다. 퍼포먼스에서 백남준은 피아노를 연주하고, 넘어뜨리고, 라디오와 녹음기로 비명과 뉴스 소리를 내보내고, 유리병을 깨뜨리는 등 과격한 행위를 했다. 백남준은 이를 “무음악” 공연이라고 칭하는데 이는 자신의 퍼포먼스를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무성조” 음악, 존 케이지의 “무작곡” 음악의 계보 위에 둔 것이다. 출품되는 자료와 작품은 한 세기를 넘는 시간의 흐름과 변화해온 미술의 내용과 표현양식을 대변한다.

서두의 테이블에 앉아서 들은 이야기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미술은 고정된 개념이 아니며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 그렇기에 연구자는 열린 태도로 낯선 것도 받아들이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 때로는 그 과정에 인내가 따른다는 것. 평범할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그 말처럼 살아낸 삶이었기에 그 무게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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