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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필립 파레노 : 영속적인 시간과 공간을 유영하기

김영호

리얼리티 파크의 눈사람, 1995-2023, 캐스팅 얼음, 흙, 격자 받침대, 96×60×60cm, Edition of 10 ⓒ Philippe PARRENO


시하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흥미로운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 작가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 1964- )의 개인전 《보이스(VOICES)》가 흥미로운 이유는 전시 자체를 자신의 작품으로 제시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기존 전시들과는 다른 해석의 방식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작가는 전시회에 연출된 작품들이 완결된 의미를 품은 객체(오브제)가 아니라 항시 변화하고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내는 주체가 되기를 바란다. ‘세계 일부를 이루는 사물의 목소리’에 주목하자는 이 멋진 제안을 따르면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은 작품에 자신의 고유한 기억이나 지식을 비추어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고정된 의미를 넘어 하나의 새로운 사건을 창조하는 필립 파레노의 전시 예술은 ‘해체와 관계’의 원리로 짜여진 유기적인 세계로 보는 이를 안내한다. 그의 작품에서 질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와 반복’으로 이름 지어진 예술적 생성원리를 발견해 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아가 무상과 연기의 개념으로 설명되는 반야 철학의 공(空) 사상과도 연계될 가능성이 주어진다. 이렇듯 파레노의 전시는 관람객의 경험과 인식을 중요시하는 전시라는 점에서 기존의 전시와 차별점을 지니고 있다.

‘해체와 관계’ 그리고 ‘차이와 반복’ 따위의 어려운 철학 개념을 좀 쉽게 설명할 방도는 없을까. 우리의 삶을 염두에 두고 보면 해체라는 말은 변화와 유사한 의미로 이해된다. 해체하는 삶이란 기존의 제도와 관습의 굴레를 직시하는 일이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부조리의 이치를 알아차림으로써 삶의 변화를 꾀하는 일이다. 결국 해체하는 삶이란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가 무상하여 실체가 없음을 깨닫고, 주체들 간의 유기적 관계와 차이를 인정하는 사회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새로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사유가 기존의 규범과 가치를 갱신하거나 전복시키는 도구로 작용해 왔기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에 제기되기 시작해 포스트모더니즘의 이슈가 된 여성, 젠더, 인권, 식민, 제국, 폭력, 권력, 이념, 테러 등은 해체와 관계 그리고 차이와 반복의 개념 아래 전개되어 온 격변의 역사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내 방은 또 다른 어항, 2022, 헬륨, 마일라 풍선, 가변크기 ⓒ Philippe PARRENO 사진: 김영호


필립 파레노의 전시회로 돌아가 보자. 그 전시회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해석이 주를 이룬다. ‘영속적인 시간과 공간을 유영토록 하는 것’이 작품의 기본 컨셉이라 할 수 있다. 오브제, 설치, 조각, 영상, 사운드 등 다양한 매개물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잇는 현재라는 유기적인 시간과 공간을 체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확장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통해 사회적 맥락이나 개인의 경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일례를 들어보자. 〈리얼리티 파크의 눈사람〉은 얼음 조형물로 전시 기간 내내 조금씩 녹아가며 현실감을 드러낸다. 거기에는 시간의 흐름 속에 유한성과 변이성으로 운명 지어진 인생사의 메타포가 담겨 있다. 이러한 전시 연출의 방식은 대표작의 하나인 〈내 방은 또 다른 어항〉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전시장 곳곳을 부유하는 물고기 모양의 풍선들은 우연히 구성된 시간과 공간에 인간의 인식이 개입하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관찰자가 아닌 관조의 대상이 되어 전시장 안에서 가변적이고 우연적인 관계의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관객은 어느덧 능동적인 해석의 주체가 되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문명사적 전환기로 불리우는 21세기, 현대미술의 향방은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전과 다르게 인식하기를 요구한다. 현대물리학이 내세우는 상대성이론과 불확정성의 원리는 필립 파레노와 같은 작가들의 미술 노정에 견인차로 작용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원리인 해체와 관계 그리고 차이와 반복의 개념들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 줄지 진지하게 따져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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