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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과 이중섭

오광수

박수근과 이중섭


1.

박수근과 이중섭은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미술가이면서도 대비적인 면모가 두드러진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이들은 출신 배경에서부터 수학과정과 예술가로서의 기질면 그리고 삶에 대한 태도에 있어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박수근은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으며 집안 사정으로 보통학교(초등학교)만을 나왔을 뿐 정규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미술의 길에 들어섰다. 반면,이중섭은 평남 평원군의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정주 오산고보를 거쳐 일본 동경의 문화학원을 나온 정상적인 미술교육을 받은 경우이다. 박수근은<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수차에 걸친 입선을 기록함으로써 미술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이중섭은 당시 일본에서 가장 전위적인 단체인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잇따른 입상을 기록함으로써 기장 촉망받는 미술가로 화려하게 데뷔하였다. 박수근이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미술가의 꿈을 실현시켜 나가려고 했다면 이중섭은 당시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가장 첨단적인 미술단체의 회우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모더니스트로서 각광을 받았다.


박수근이 강원도라는 지방에서 자라고 활동의 범주도<조선미전>이 유일했던 반면에 이중섭은 당시 예술의 중심지였던 일본 동경에서 활동했다는 점에서도 대비를 이루고 있다. 박수근이 소박한 시골의 화가였다면 이중섭은 전위대열에 참가한 선망의 미술가라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2.

박수근과 이중섭은 독학파와 유학파란 점에서도 대비를 이룬다. 박수근이 문명의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강원도 양구에서 누구의 지도도 없이 홀로 자신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면 이중섭은 당시 서구의 새로운 사조가 밀려들어오던 중심지인 동경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밀고나갈 수 있었다는 데서도 현격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같은 상황의 비교는 박수근이 대단히 척박한 환경에서 미술의 길을 걸은 반면 이중섭은 보다 여유로운 환경 속에서 자신의 길을 모색할 수 있었음을 말해준다. 미술가가 되기 위한 정규적인 시스템을 거치지 않는 경우 스스로 모든 것을 처리해 나갈 수밖에 없다는 조건은 대단히 긴핍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독자적인 방법을 일찍이 터득할 수 있다는 이점도 없지 않은 것이다.박수근이 그 유형을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방법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독학이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아마도 박수근이 정규미술학교를 나왔다면 오늘날 우리가 언급하는 박수근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학파를 대표해주는 이중섭이 일반적인 유학파와는 다른 진취적인 방법의 모색에 일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아카데믹한 미술학교가 아닌 문화학원 출신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본다. 문화학원은 문부성의 지시를 받지 않은 자유로운 교육이념을 실천했던 독특한 교육기관으로 자유주의 사상을 지닌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이 학교의 교수나 학생들 가운데 전위적인 미술가가 많았다는 것도 이에 관련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모더니스트 가운데 유영국,김병기,문학수,이중섭이 이 학교 출신이며 이들은 또한 가장 전위적인 단체인 <자유미술가협회>의 멤버로서 참여하게 된다. 


독학파로서 대표적인 미술가들로는 김종태, 김중현, 이봉상,이승만,이인성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조선미전>을 통해 두각을 드러내었을 뿐아니라 일본 유학파를 제끼고 최고상의 획득은 물론이려니와 추천의 반열에도 먼저 올랐다.이들이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비교적 많은 미술정보를 접할 수 있었던 입장인데 반해 박수근은 여러 면에서 가장 불리한 입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

박수근이 주로 다루었던 소재의 범주는 자신의 주변에서 취재된 것이었다.농가의 풍속적 단면이나 시골풍경이었다.생활주변에서 취재된 소재적 경향은 그의 만년에까지 이어지는 항상성을 보이고 있다.이에 비해 이중섭은 문화학원 시절부터 민족의식과 반항적 기질이 반영된 주제의 작품을 보여주었다.그가 가장 많이 그렸던 소는 초기에서부터 만년에까지 이어지는데 민족의식을 은유화한 대표적인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이중섭의 민족의식의 구현은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를 다녔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오산학교는 설립자에서부터 교사에 이르기까지 민족의식이 투철한 인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학생들 역시 이같은 분위기에 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영어와 미술을 담당했던 임용연은 미국 예일대를 나와 프랑스에서 한동안 활동했던 미술가로 학생들에게 조형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에 앞장 섰던 교사로 알려져 있다. 이중섭이 일찍이 민족의식이 강한 주제에로 경주될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은 교육의 분위기에서 가능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의식이 문화학원과 자유미협전을 통해 한결 성숙한 단계로 발전될 수 있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박수근이 <조선미전>이 지향하는 아카데믹한 화풍에 연연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에 비해 이중섭은 당시 가장 전위적인 경향으로 풍미되었던 야수, 표현파의 작풍을 구사하였다. 박수근이 대상을 정직하게 묘파하는 반면 이중섭은 격렬한 표현의 추세에 의해 부단히 대상을 왜곡하였다. 이중섭이 주로 그렸던 소는 단순한 소를 대상화하였다기보다 소를 통한 민족적 정서를 은유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흥미로운 것은 같은 평양출신에다 문화학원의 동창이기도 한 문학수가 말이란 소재에 집착한 반면 이중섭이 소에 집착했다는 점이다.이들은 다같이 말이나 소라고 하는 동물을 통해 민족적 의식을 구현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중섭이 한국인의 울분을 격렬한 동세의 소의 몸부림을 빌려 구현한 반면 박수근은 자신을 에워싼 주변에 따스한 눈길을 주었으며 그것을 담담하게 화폭에 옮겼다.그런 점에서 박수근의 작품도 단순히 대상을 묘사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인간의 진실된 감정을 투사하려고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박수근은1932년 <조선미전>에 첫 입선할 무렵부터 65년 작고할 때까지 소재의 일관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초기엔 주로 농가의 생활 단면이나 농촌의 풍경을 다루었으며 50년대 이후는 도시 변두리의 서민들의 삶의 풍정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농촌에서 도시 변두리로 그 무대가 바뀌긴 했으나 서민들의 생활상을 모티브로 했다는 점에서는 일관된 맥락을 보이고 있다.그의 작품은 한 시대의 풍속적 단면을 가장 진솔하게 묘파해주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가치 외에 사회사적 의미도 함께 지닌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4

이중섭은 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44년에 귀국하였다. 일본에서 사귀던 일본인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 이남덕)가 뒤따라 건너오면서 이들은 원산에서 결혼하였고 두 아들을 두었다.6. 25 동란이 없었더라도 이중섭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1. 4후퇴 때 가족을 이끌고 부산에 온 그는 이후 제주,통영, 대구, 서울 등지를 전전하면서 삶을 영위해야만 했다. 생활고로 인해 처자식을 처가인 일본에 보내고 난 이후는 심신이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했으며 종내는 거식증과 정신착란으로 병원을 드나들었다. 신산하기 짝이 없는 생활 속에서도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구상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식당에서도 친구들과 만나는 다방에서도 그렸고 부두노동을 하다 잠깐의 휴식시간이 나도 그렸다는 것이다.그린다는 것이 그의 실존이었다.살아있기 때문에 그렸고 그렸기 때문에 삶을 지탱할 수 있었다. 이중섭의 대부분의 작품은 50년 피난와서 56년 작고하기까지의 5, 6년에 그려진 것들이다. 짧은 시기에도 불구하고 그 양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정확한 추정은 어려우나 그의 가까운 친구인 구상의 증언에 의하면 유화만 약3백 점, 드로잉은 이 보다 훨씬 상회할 것이라고 했다.피난과 수복의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이토록 많은 작품을 남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현대미술사를 보면 40년대에서50년대에 이르는 전쟁과 격동기에 남아난 작품이 가장 빈약하다는 사실이다. 창작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각박한 상황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이중섭이 남긴 작품이 지니는 의미는 더욱 빛나는 것이지 않을 수 없다.


박수근 역시 신산한 삶의 역정에 있어선 이중섭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는 미군 피엑스에서 미군을 상대로 한 초상화를 그려주고 생활을 꾸려갔다.이중섭이 그림 밖에 할 수 없는 생활의 무능력자라면 박수근 역시 그림 밖에 모르는 생활의 낙제생이었다고 하겠다.그러면서도 그는 미군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모은 돈으로 창신동에 작은 집을 마련할 수 있었으며 그의 그림을 알아보는 외국인들의 도움으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이중섭의 친구가 그를 돕기 위하여 신문소설의 삽화를 맡겼더니 내가 어떻게 호화로운 상류층의 생활모습을 제대로 그릴 수 있겠는가 하고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이중섭에게 있어 그림은 순수한 자신의 내면의 기록이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그러기에 한갖 수단으로서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순수성을 지키려고 몸부림쳤으며 그것을 위해 세상과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그림 그린 죄밖에 없다고 한 그의 넋두리는 세상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에 비하면 박수근은 생활을 위해 가족을 위해 간판쟁이들이나 하는 미군 초상화를 떳떳하게 그렸다.이들의 태도는 미의 순교자로서의 이상주의와 삶을 더 사랑한 현실주의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것이 참다운 예술가의 태도인가를 비교 논할 수 없다.예술이 먼저냐 삶이 먼저냐 하는 논쟁에서 과연 어떤 것이 먼저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가 있을가.

 

5

이중섭이 천재형이라면 박수근은 노력형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시 어떤 유형이 참다운 예술가의 타입이냐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우리 미술사에서 천재형과 노력형의 대표적인 경우를 든다면 천재형으로는 김관호,김종태,이인성,이쾌대,이중섭을 꼽을 수 있고 노력형으로는 김중현, 이상범,이응노,박수근을 꼽을 수 있다.


천재형은 일찍이 천부적인 소양을 드러낸다. 그러기에 천재형은 10대나 20대의 젊은 나이에 혜성과 같이 나타난다고 한다. 세상에서의 경험이 쌓이기 전에 타고난 천부의 재능을 쏟아놓는다는 것이다. 김관호는 한국인으로 두번 째 서양화를 배운이지만 일본인들을 제치고 최우등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일본의 관전인 문부성 전람회에 특선에 올라 주변을 놀라게 하였다. 김종태는 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조선미술전을 통해 수차에 걸친 특선을 획득하여 일본 유학파들을 제치고 한국인으로 최초로 추천작가의 반열에 올랐다.이인성은10대에 조선미전에 입선을 시작으로 20대 초반에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였다. 이쾌대,이중섭은 일본화단에서 떠오른 신인으로 각광을 받았으며 그들의 예술은 이미 20대에 확고한 자기세계를 이룩한 것이었다. 


반면에 노력형은 일종의 대기만성형이라고 볼 수 있듯이 그들의 예술은 오랜 시간을 거처 서서히 무르익어가는 특징을 보인다. 천재형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불꽃같은 정념은 없지만 꾸준함의 미덕이 서서히 완성에로 진작되면서 확고한 자기세계를 이루어나간다. 


천재들의 경우, 대체로 요절하는 공통점을 보이기도 하는데 마치 불속을 날아들어 활활 자신의 전체를 불사르는 것과 비유된다. 이인성, 김종태,이중섭이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각각 세상을 등지고 있다. 따라서 천재들에겐 항상 불우한 생이란 딱지가 붙기 마련이다. 그들의 삶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연민의 감정이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도 이에 말미암는다고 할 수 있다.노력형의 예술가들에겐 화려한 외양이 없는 만큼 신화적 요소도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을 파고드는 꾸준함이 독특한 자기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박수근은 노력형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초기는 누구의 눈에도 쉽게 띄지 않았다. 평범한 보통화가에 지나지 않았다.그러나50년대를 지나 60년대에 들어오면서 그의 예술은 독특한 무게로 다가온 것이 되었다.돌처럼 단단하고 보석처럼 빛나는 고유한 자기세계를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6.

이중섭의 예술은 자연을 앞에한 사실적 묘법이 아니라 독특한 양식화를 통한 서술적 내용을 지닌다. 초기에 많이 그린 소나 닭 같은 소재 역시 사실에서 시작하여 꾸준한 퇴고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기만의 독자한 양식에 이른다. 가족과 게와 물고기와 아이들이 어우러진 제주 이후의 작품들 역시 아이들의 동작이나 과장된 표현을 통한 해학적 요소의 가미는 이중섭에서만 볼 수 있는 고유한 것이다.그러기에 그림은 대단히 구성적이며 동시에 환상적인 서술의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자연을 정직하게 묘사한 작품으로는 일련의 통영 풍경이 있을 뿐이다. 


이중섭의 작품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구상적인 내용이다.그럼에도 소나 닭이나 아이들의 모습은 대상에 얽매여 있지 않고 은유적이거나 상징적인 요소를 띠고 등장한다. 울부짖는 소에서는 시대의 아픔을, 화려한 비상의 암수의 닭이 보여주는 입맞춤은 닭의 그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랑의 모습을 희화화한 것이다. 그의 소재는 제주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자전적 요소를 강하게 표상시킨다. 가족과의 해후를 꿈꾸는 작가의 절실한 염원이 담겨지기 때문이다.


이중섭의 은유적, 상징적 내면의 작품에 비해 박수근은 초기에서 만년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맥락을 보여주면서 소재에서보다 조형상의 완숙을 기해나가는 변화를 엿볼 수 있다.현장에 밀착된 서민들의 진솔한 삶을 기록한 점에선 리얼리티가 풍부한 작품이면서 동시에 조형 고유의 리얼리즘을 추구한 점에서 그 독특한 내면을 발견할 수 있다.

 

7.

이들의 방법에 있어 대비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면서도 짙은 향토색과 민족적 정서 면에서 공통성을 보여주고 있다. 기법에 있어 이중섭은 활달한 운필과 격정적인 표현이 전면화되는 반면, 박수근은 대단히 정적이면서 소박한 질료의 구사가 두드러지는 편이다. 이중섭은 드로잉적인 유연한 묘법이 앞서는가 하면 박수근은 안료를 중층적으로 쌓아올라가는 구축적인 묘법으로 일관하고 있다.그러면서도 이들의 질료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일종의 반유화적 감성이라고 하겠다. 유화 안료의 기름진 질료에 대한 거부적 정서가 이들 작품의 바탕에 짙게 깔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서양의 방법을 수용하면서도 우리 고유의 정감에 굴절된 변형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중섭의 작품에 나타나는 오래된 벽화를 보는 듯한 희뿌연한 안료의 느낌과 박수근의 작품에 나타나는 거칠고 건조한 돌팍과 같은 느낌은 한국인들이 지닌 보편적인 미감의 한 결정체라 볼 수 있다. 박수근, 이중섭이 우리의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로 특히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이처럼 민족적 정서를 누구보다도 두드러지게 표상하고 있음에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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