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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수의 인간과 예술

오광수

고절(高節)과 청정(淸淨) - 박노수의 인간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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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수는 해방 직전 이상범이 개설했던 청전화숙에 입문하여 그림을 시작했고 해방이 되면서 문을 연 서울대 예술학부에 입학하여 근원 김용준, 월전 장우성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다. 그와 동 연배인 해방 후 제1 세대로는 권영우, 서세옥, 장운상, 박세원 등이 있다. 박노수의 작품에는 스승으로부터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 방법적 특징들이 발견되지 않는다. 날카로운 초서 풍의 운필은 청전에게서, 문인화풍의 고답적인 화면 구성은 다소 근원이나 월전의 감화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뚜렷한 영향의 맥락을 찾기는 어렵다. 박노수의 작가적 위상은 일찍이 독창적인 방법의 추구에서 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개성의 발현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다져나간 드문 예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이 되면서 미술계에 밀어닥친 테제는 왜색 탈피와 민족미술의 건설이었다. 극복해야할 대상은 일본 색의 극복이자 이에 대한 대안은 다름 아닌 우리 고유의 민족 미술을 세우는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전통회화 분야에서 왜색의 감염은 그 어느 영역보다도 심각한 편이었다. 동양화란 명분 하에 전통회화와 일본화가 동거하면서 그 구획이 점차 모호해져간 데서 그 요인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서양화 분야에 있어서도 왜색의 침투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화는 애초에 일본을 통해 습득했기 때문에 일본적 감성에 의한 굴절양상은 피할 수 없는 한계였다. 그런 점에 비하면, 전통회화는 비록 그 뿌리가 중국에서 연원 되었다고 해도 동양 삼국이 그 지역적 특수성과 감성에 의한 각기 다른 양식적 전통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일본화의 침투는 조선미술전람회란 제도적 장치를 통해 급속도로 진척된 바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전통회화 장르를 동양화란 명분 속에 일본화와 묶었기 때문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루한 형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전통회화에 비해 당시 일본화는 상대적으로 신선한 감성으로 그 방법적 신장이 현저하게 진척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고루한 형식적 미망(迷妄) 속에 있었던 전통회화가 이에 쉽사리 휘말려 들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전통회화를 가꿀 제도적 장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정신의 피폐는 예술의 영역에도 깊게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몇몇 개인적인 도제식(徒弟式) 화실을 제외하곤 전통적 회화를 수업할 수 있는 제도적 통로는 없었다. 동양화를 수업하기 위해서 떠나는 유학이 다름 아닌 일본의 여러 미술학교의 일본화과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당시 젊은 세대 작가 지망생들이 찾아가야 할 곳이 다름 아닌 일본화과 밖에 없었다는 것은 일본화의 침투가 제도적으로 철저하게 뒷받침되었다는 사실을 웅변해주고 있다.

해방이 되면서 왜색의 탈피는 친일파를 박멸하자는 구호와 진배없는 절실한 시대적 과제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왜색에 대한 여러 특징은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도안풍이니 몽롱체니 하는 방법들이 일본 색으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민족미술 건설이란 시의적(時宜的)인 명분이 절실한 만큼 구체적인 방법론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몇몇 의식 있는 작가들에 의해 개인적인 모색이 서둘러지고 있긴 했으나 기술에 있었으나 이론에 있어 명확한 민족미술의 실체는 좀처럼 획득되지 못했다. 해방 후 민족미술의 모색에 앞장섰던 작가로선 김용준, 장우성, 이응노, 김기창, 박래현, 김영기 등을 먼저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서 김용준, 장우성은 새로 문을 연 서울대에 적을 두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이들의 실험이 곧 교육의 장을 통해 쉽게 검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이나 학생들이 목표했던 것이 다름 아닌 민족 미술이었기 때문에 선생과 학생은 어떤 의미에선 동지적인 입지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 후 제1 세대의 작가들이 뛰어난 개성의 구현자(具現者) 들이었다는 사실은 이 같은 시대적 상황과도 결코 무관치 않을 듯하다. 어떤 모델이 있는 것도, 제도적인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닌, 전적으로 새로 시작해야 하는 입지에선 개성의 발굴이 전체적인 모색과 더불어 현저히 진척될 수 있었다는 상황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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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수의 작가로서의 활동 범주는 주로 국전과 개인전으로 압축된다. 국전은 1회에 <청추>로 첫 입선을 한 이후 국전이 그 막을 내릴 때까지 가장 꾸준하게 참여하고 있다. 53년 2회 국전에선 <청상부>로 국무총리상을, 3회엔 <아>로 무감사 특선을, 그리고 이은 4회(1955)엔 <선수운>으로 대망의 대통령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리고 5회의 <월향>으로 특선을 차지한 후 추천작가가 되었다. 동연배의 작가 가운데서 가장 먼저 추천작가의 반열에 오른 셈이었다. 대개의 작가들 경우, 초기의 주요 작품이 그의 작가적 행보에 적지 않은 암시적 요인을 잠재하고 있는 편인데 박노수의 초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선소운>에서도 그가 앞으로 가야할 방향 같은 것을 들어내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선소운>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한복의 여인을 모델로 하고 있다. 한복은 짙은 검정 색으로 주름살이 흰 선으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선이 네가티브의 방식으로 구현된 것이다. 짙은 검정 치마 저고리가 풍겨주는 범접치 못할 단아함과 더불어 선조의 날카로움은 화면에 짙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이후 초기의 박노수의 작품의 대부분이 여인을 모델로 한 것이란 점과 대부분의 인물상이 단독상이란 점이 이후의 작품에까지 맥락되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인물에 집중된 초기작은 여인이 아니면 소년이 모델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후반으로 나아갈수록 여인보다 청년상이나 노인상으로 옮겨가고 있다. 또한 <선소운>에서 엿 볼 수 있듯이 짙은 채색과 선조의 구성이 후반의 작품에까지 연면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인물은 그의 특유한 정감을 표상하는 매개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인과 소년을 주 모델로 다루던 초기의 의식이 다분히 탐미적인 성향이 짙었다면 후반기로 오면서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노인이나 선비의 모습은 인생을 관조하는 작가의 심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서 말이다. 손에 꽃 한 송이 들고 있는 여인의 염염(艶艶)한 모습은 짙은 배경의 처리에 의해 꿈꾸는 듯한 상황을 연출해 보이는가 하면 깊은 산 달리는 말 위에서 힘껏 화살을 쏘는 소년의 기운에 넘치는 모습은 작가의 내면에 솟구치는 젊음의 기개를 유감없이 들어낸 것일 것이다.

그러나 내용에 앞서 무엇보다 그의 작품이 갖는 요체는 다름 아닌 채색과 선조가 이루는 독특한 조형적 내면이다. 그것은 동시에 형식이자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릿발같은 선의 날카로움과 짙은 채색의 구성은 타협 없는 그의 조형의 절대성과 더불어 풍부한 정감을 유감없이 피력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후진들에게나 주변에 항용 강조한 것이 선이란 점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선이란 그림의 생명이요, 영원한 세계가 열리는 길, 무한의 공간을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피력한 그의 선에 대한 인식은 그대로 그의 작품의 근간이 곧 선임을 시사한 것이다. 동양화가 선으로 시작되고 선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을 그는 작품을 통해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선에 대한 투철한 인식은 아마도 그가 해방 후 민족미술의 건설에서 추구한 방법이 다름 아닌 선의 자각에서 비롯되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이 점은 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민족미술을 모색하는 작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경우, 선은 채색과 더불어 독특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였다. 그의 작품에서 채색이 없었다면 작품의 완성도가 그렇게 높을 수 있었을까를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채색이 곁들어지면서 비로소 선의 기운이 그 참 모습을 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선과 채색이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일체화되었을 때 그의 작품은 비로소 완성된다. 따라서 선은 골격이요 채색은 살결이다. 뼈와 살이 없으면 인체가 제대로 성립되지 않듯이 선과 채색이 적절히 어우러지지 않으면 작품은 완성되지 않는다.

초기 한 동안은 채색에 무게를 둔 적이 있다. <백로>와 같은 작품은 짙은 채색에 의한 장식성이 강하게 동반된다. 북종화의 색채감각이 짙게 표상된 이들 작품을 두고 이경성은 “과거의 북종화 화가들이 지니고 있었던 격조 높은 정신에서 세계를 바라다보는 그러한 기개가 남정 박노수의 작품 세계이다”(1)라고 지적한바 있다. 70년대 초반 한동안 진채에 의한 작품이 이어진 한편, 안료의 물질성이 두드러지게 들어 난 작품을 시도한 바도 있다. <수렵>과 같은 계열의 작품이 여기에 해당된다.

기법의 다양한 모색에도 불구하고 내용에 있어선 아무런 변화도 찾을 수 없다. 여전히 여인과 소년과 노인이란 인물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물들은 한결같이 고적한 분위기에 에워싸인다. 단아하고 고격한 품성이 날카로운 선획(線劃)과 그윽한 채감에 묻어난다. 속세를 떠난 은자의 회한 없는 삶의 향기가 투명한 색채를 통해 은은하게 반향(反響)한다. 그의 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 명제 - <산길><수하><강가><한일><행려><청화> 만 보아도 그의 전체적인 작품에 맥락되는 세속을 멀리하는 선비의 청아한 기운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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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성은 박노수의 작품을 형성하고 있는 요소로서 구성력, 색채감, 정신 내용을 든 적이 있다.(2) 구성력이란 일종의 경영위치를 두고 이름일 것이다. 대상을 일정하게 배치하는 구도에 해당되기도 하지만 대상과 대상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밀도를 지칭할 수도 있다. 박노수의 뛰어난 구성력은 특히 대상과 여백공간을 통해 한결 밀도 높은 세계를 지향한다. 초기의 작품들은 전면화가 주류를 이루지만 후반의 작품들은 대상과 여백의 탄력 있는 대비가 깊은 조형성을 대신한다.

그의 화면에 있어 구성력의 풍부함은 그의 초기의 작품에서 이미 두드러지게 나타나듯이 북화적 요소와 남화적 요소의 대비에서도 찾을 수 있다. 북화적 색채감각이 주는 짙은 장식성과 남화적 운필이 주는 시적 여운이 어우러지면서 엄격함과 부드러움, 냉정함과 따스함, 엄격함과 고귀함이 서로 직조되면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구현해주고 있음이다. 꿋꿋한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는 선비의 높은 기개가 있는가 하면 한 송이 꽃을 든 여인네나 바위에 걸터앉아 홀로 피리를 부는 소년의 더없이 청정한 기운이 또 한 편에 있다.

색채감각은 초기의 강한 북화풍의 진채와 후반으로 오면서 부드럽게 번지는 선염의 남화풍에서 다같이 두드러진다. 채색은 선열한 대비를 통해 더욱 깊은 여운을 남긴다. 가뭇없는 쪽빛의 세계는 깊어 가는 공간감을 대신하고 있으며 관조적인 여유로움은 화면을 더없이 은은하게 만든다. 짙은 채색의 사용을 통해 그의 양식적 특징을 북화풍이나 남화풍으로 구획하는 것은 어쩌면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특히 그의 작품의 경우에 있어 그렇다. 북화의 철저함과 남화의 풍부한 상상력은 존재하나 채색의 짙고 여림에 따른 남북화의 구분은 애초에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색채감각은 오히려 회화의 본질로서의 감각에 대응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식적 분류는 언제나 미술사가들의 고식적인 호사벽(好事辟)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지적된 정신내용이란 무엇인가. 세속의 유혹과 허욕을 등지고 고고하게 살아가는 고절한 선비의 세계를 두고 이름이 아니겠는가.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인물상들이 한결같이 홀로 등장하고 있어 먼저 그 설정에서의 적료함을 비켜갈 수 없게 한다. 그리고 이들 인물들이 조용히 바위에 걸터앉아 독서삼매에 빠져있거나 피리를 불고 있거나 아니면 고요히 앞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관자는 어느듯 그림 속의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빠져든다. 강한 정신적 반향이 이루어짐일 것이다.

말을 타고 외롭게 산 속의 협곡을 가고 있는 나그네의 쓸쓸한 모습이나 강에 배를 띄우고 홀로 노 저어 가는 청년의 모습은 세상과 타협할 수 없는 은자의 단호하고도 맑은 정신의 지향을 극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어쩌면 이들 인물상은 이경성도 지적한 바 있듯이 작가의 자화상이거나 작가의 내면 풍경일지 모른다. 아니면 작가가 지향하는 이상세계의 순수한 표명일지 모른다. 긴 도포자락을 끌고 가는 선비의 눈길이 그러한 연상을 유도하고 있다. 인물들의 설정이 한결같이 자연과 더불어 이루어짐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귀의의 세계로 보려는 작가의 의지 역시 선명히 읽힌다. 이 점에선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도가풍(道家風)의 사상을 찾는 사람들의 관점에도 수긍할 수 있다.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전 시대적 관념의 취향일지도 모른다. 현실을 외면한 정신세계로의 도피적 현상이라고 매도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그러나 회화란 무엇인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나 회화는 관념의 소산이 아니겠는가. 어떤 이는 회화란 매체를 통해 현실을 고발하려고 하고 어떤 이는 회화란 매체를 무대로 정신의 유희를 구현하려고도 한다. 여기엔 어떤 잣대로도 비교의 차원을 만들 수 없다. 각자가 지닌 리얼리티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회화의 리얼리티란 작가가 회화란 매체를 통해 얼마나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구현하는가에 달려있지 그 내용에 얽매여 있는 것은 아니다.

박노수의 작가적 편력은 왜색의 탈피와 민족미술의 건설이란 시대적 의식에서 출발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구현해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개성적인 작업이 곧 민족미술의 추구가 될 수 있다는 의식은 그의 작가적인 출발의 축복이자 동시에 고뇌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쌓아올린 작업의 성과가 민족미술의 어느 한 영역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는 날 그의 세계는 진정한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 이경성 <박노수의 작품세계> 1977년 개인전 카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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