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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파괴와 신화의 창조

오광수

- 백남준의 예술적 기조와 궤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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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비디오 아티스트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가 예술가로써 발돋움하던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전위 작곡가, 행위예술가로 회자되고 있었다. 전위적인 실험엔 언제나 따라 붓기 마련인 스캔들을 동반한 그의 초기의 위상은 우상파괴자로서 더 강하게 인상되었다. 어쩌면 당시로선 생소한 후진국의 왜소한 젊은이가 재빨리 유럽의 예술계에 알려지기 위해선 그와 같은 강렬한 이미지가 절실했을지도 모른다. 충격과 기발함, 숨가쁜 정신의 가열찬 행적이 태풍처럼 사람들을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그는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백남준이 프랑스나 미국을 선택하지 않고 독일로 진출했다는 것도 어쩌면 그를 급속히 스타덤으로 끌어올린 배경이 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다는 것이 오늘의 백남준을 있게 한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서독)은 유럽 다른 국가들과는 다른 입지에 있었다. 2차 세계대전에 패망한 독일이 서서히 라인의 기적이라고 지칭되는 경제부흥을 실천해가고 있을 때였다. 그럼에도 전쟁으로 피폐된 예술계는 주변국에 비해 엄청난 후진적 양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같은 컴플렉스가 현상을 극복하려는 강렬한 욕구로 고양되면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실험의 장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실험의 장을 수용할 수 있었던 놀라운 유연성이 관객과 커랙터들의 즉각적인 호응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도 이 지역을 제외하곤 좀처럼 만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더욱이 자국의 젊은 예술가들 뿐 아니라 독일로 흘러 들어온 외국의 예술가들까지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실험의 열기는 쉽게 국제적인 이벤트로 격상될 수 있었던 사실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이 중심에 플럭서스 운동이 있었다. 플럭서스는 미국 뉴욕과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된 전위운동으로 그 정신은 다다(DADA)에 맥락된 것이었다. 62년 백남준과 마키우나스에 의해 공동 진행된 <음악에서의 네오 다다>란 표제에서도 다다와의 정신적 맥락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음악에 근간을 두면서도 때로 우스꽝스럽고 때로 엉성하고 때로 기지에 넘치는 이들 실험의 내용은 통일되지 않는 진행과 복합적인 속성을 지닌다는 점에서도 다다를 쉽게 떠올리게 하였다. 무엇보다 플럭서스에 대한 개념정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다가 스스로 다다이기를 거부한 자기부정의 미학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인상된다. 플럭서스에 참여한 몇몇 예술가들의 언급을 참고해보자.
“플럭서스의 가장 중요한 점은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로버트 와츠)
“플럭서스에 있어서 그 목적이나 방법과 관련하여 어떤 일치점을 찾고자하는 노력은 없었다. 만약 마키우나스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그것에 어떤 명칭을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 우리는 각자 자기의 길을 갔을 것이며 자신의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다.”(조지 브레히트)
“플럭서스는 하나의 예술운동이 아니라 일종의 정신적 자세였으며 결탁한 작가들의 집단이 아니라 고독한 이들과 아웃사이더들의 극도로 느슨한 연대였다. 그들은 예술시장과는 멀리 떨어져 오늘날에는 우리가 얼마든지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행위의 형식과 창조를 곰곰히 생각했던 이들이었다”(르네 블록)
무엇이 플럭서스인가? 누가 플럭서스의 멤버인가? 하는 끊임없는 물음에도 누구하나 정확한 답변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플럭서스 행사에 꾸준히 참여해온 이가 있는가 하면 한 두 번 참여한 이들도 있다. 플럭서스의 창시자격인 마키우나스 외엔 누구도 자신을 플럭서스 멤버라고 하지 않으며 누가 당신 플럭서스 멤버가 아닌가 하면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답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모호하기 짝이 없는, 르네 블록의 말처럼 느슨하기 짝이 없는 집결체이다. 비교적 잘 알려진 이들만을 꼽아보면 조지 브레히트, 존 케이지, 딕 히긴스, 라몬테 영, 조지 마키우나스, 로버트 와츠, 헨닝 크리스티얀센, 아더 쾨프케, 에멋 윌리암즈, 요셉 보이스, 벤자민 페터슨, 볼프 포스텔, 아이요, 오노 요코, 백남준 등이다. 명칭을 부여한 마키우나스의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에 대한 규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어느 속박된 틀 속에 가두어지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 어쩌면 플럭서스의 성격을 가장 잘 반영한다고 하겠다. 관습적인 예술형식과 방법을 벗어날려는 예술가들의 생각을 담는다는 목적 하에 만들어진 잡지의 표제가 플럭서스였는데 라틴어로 흐른다는 의미, 움직인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 어디에고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한다는 목적을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떤 형식도 어떤 강령도 거부한 이들의 몸짓에서도 1차 세계 대전 직후에 일어난 다다의 그것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50년대 말은 특히 새로운 음악에 대한 강한 실험의지가 라인강변의 여러 도시 쾨른, 뒤셀도르프, 부퍼탈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뒤셀도르프의 갤러리 22에서의 장 피에르 빌헬름, 존 케이지, 백남준의 공연이나, <새로운 음악을 위한 국제 하기 강좌(볼프강 쉬타이네거가 설립)엔 당시 음악적 아방가르드의 대표 주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이미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그러한 실험 무대가 호응리에 열릴 수 있었다는 것이 독일로 하여금 전후의 문화 예술적인 낙후 현상을 단번에 탈피할 수 있었던 계기였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일련의 행사의 중심에 백남준이 있었다는 것이 그의 장래를 확고한 어떤 것으로 담보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플럭서스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전위적 활동이 꾸준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활동을 뒷받침할 수 있었던 경제적인 지원과 생활의 안정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크냅 쉬타인의 증언을 들어보자.
“동시대의 실험적인 예술에 대한 예술시장의 성장은 독일로 들어온 플럭서스 집단의 작가들에게는 결정적인 생존의 기회를 주었다.......... 상당 부분 일반 브로커와 상업주의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끊임없이 예술시장에 회의를 품었던 작가들도 역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제적인 잉여는 독일 연방공화국에 어떤 융통성을 제공해주었고 아무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예술가와 이를 지지하는 관객이 존재해도 이들의 활동이 지속되기 위해선 꾸준한 경제적 뒷받침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점에서 당시 독일을 충분한 조건을 갖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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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초기 활동범주가 주로 음악에 집중되었다는 것은 그의 수학기의 영역과도 일정한 관계를 지니는 듯 하다. 그는 유년기부터 피아노를 습득했으며 이미 고교시절엔 작곡에 몰두하기도 했다. 주머니 속엔 언제나 작곡용의 오선지가 들어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해준다.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그의 판을 어렵게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새로운 음악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6,25동란이 나던 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대학에서 음악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고 독일로 진출하게 되는 데 독일에서의 수학의 범주도 작곡이었다. 뮌헨대학과 프라이부르그 음악 아카데미에서 작곡을 배웠다. 그가 쾰른의 라디오 방송국의 전자 스튜디오를 담당할 수 있었던 것도 프라이부르그 음악 아카데미의 스승이었던 볼프강 포트너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한 예술가의 탄생에는 그의 타고난 천부적 소양과 더불어 그의 예술을 지지해주는 주변이 없어서는 안 된다. 백남준이 타고난 기질이 있었다고 해도 그를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지지자가 없었더라도 그의 예술은 꽃피지 못했을 것이다. 이 점에선 백남준은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음악을 위한 국제 여름학교>에서 칼 하인츠 슈독하우젠을 만난 것을 필두로 존 케이지와 요셉 보이스를 만난 것이 그의 앞길을 열어준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 <피아노를 위한 습작>이 진행되는 가운데 갑자기 백남준이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자르고 작곡가 데이빗류더와 케이지를 면도 크림으로 뒤범벅을 만든 퍼포면스는 폭발적인 스캔들로 이목을 집중시킨 것이자 케이지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한 사건이 되었다. 당시 케이지는 선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그의 <4분 33초>란 작품은 일종의 무의 음악으로 선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작품은 피아노 앞에 앉은 연주자가 덮개를 열고 4분 33초 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는 상태로 있는 것으로 이 사이에 실내에서 일어나는 소음과 미묘한 시간의 진동이 작품으로 수렴되면서 작품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보이스는 백남준의 63년 부퍼발의 파르나스화랑에서 열린 첫 전시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젼>에 와서 도끼로 피아노 한 대를 박살내었다. 이들이 쉽게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보이스의 독특한 체험에 깊이 연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차 대전 중 나치 소년 항공단에 입단한 보이스가 남부 러시아 크래미아 반도에서 러시아군의 고사포를 맞고 추락한 것을 이 지역에 살고있었던 몽고계 타타르인들이 구해낸 것이 인연이 되어 보이스의 아시아인에 대한 감정이 특별했다는 것이 백남준과의 관계를 급속히 밀착시킨 요인으로 분석해 볼 수 있다. 백남준과 보이스는 88년 서울 올림픽을 기해 서울에 와서 한국의 무속들과 한 바탕 퍼포먼스를 할 계획을 세웠으나 86년 갑작스런 보이스의 죽음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백남준은 계획을 바꾸어 보이스를 추모하는 진혼 퍼포먼스를 무당들과 더불어 진행시켰다. 케이지와 보이스와의 특별한 관계가 그를 국제적인 스타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내 인생의 행운의 하나는 존 케이지가 완전 성공하기 전애, 요셉 보이스가 거의 무명일 때 만나놓은 것이다. 따라서 금세기의 두 연장자와 역경시대의 동지로서 동등히 교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자주 언급한 백남준의 고백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백남준이 뉴욕으로 진출한 것은 64년 칼하인즈 스톡하우젠의 주선으로 매년 열리었던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발>에 참여하면서다. 그는 여기서 음악의 신체화에 크게 기여한 동료 첼리스트 샬롯 무어맨과 만나고 그녀와 의기 투합하여 갖가지 스캔들을 대동한 퍼포먼스를 진행하면서 일약 뉴욕의 총아로 떠오르게 된다. 음악에 최초로 성을 도입한 <오페라 섹스트로닉>은 “왜 섹스는 미술과 문학의 지배적인 테마이면서 오직 음악에만 금지되어야 하는가”란 도발적인 이의 제기로 이후 음악의 관능화는 무어맨과 더불어 더욱 심화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백남준이 보여준 음악의 관능화가 결코 음흉한 것이 아니라 어느 면에선 밝고 건강한 내면을 지닌다는 점을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라>에서도 엿 볼 수 있다. 무어맨의 젖가슴에 플랙시 글래스 상자 안에 두 대의 텔레비젼 수상기를 넣고 이를 고정시킨 것이다. 백남준은 여기서 단순한 관능성보다 인간과 기계와의 새로운 화해의 장을 모색하는 또 다른 의도가 있음을 다음과 같이 언급해주었다. “TV를 인간이 가진 가장 내밀한 소유물인 브라로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테크놀로지의 인간적인 사용법을 보여주고 관람자로 하여금 뭔가 음흉한 것을 찾도록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는 새롭고 환상적이며 인간적인 방법을 찾아내도록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숭고함과 장난스러움이 혼재된 그 특유의 건강한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술이 지닌 유희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그의 기지는 TV브라에선 당혹감과 유쾌함, 감미로움과 익살이 경쾌하게 뒤섞이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핸하르트는 상식을 벗어나는 백남준의 기행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생명을 고양시키는 비젼과 파괴적인 유머를 통해 백남준은 우리의 허식을 비웃으면서도 우리에게 삶이란 글로벌 그루브(범 지구적인 한판 놀이)라고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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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가 처음 선보인 것은 63년 첫 전시 때였다. 그가 TV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어떤 의미에선 서구의 전통 음악이 지닌 우상 파괴적인 행위의 연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TV가 지닌 시각적 독점권, 즉 스크린과 방송망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엄청난 대중적 우상화를 예감하였으며 이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텔레비젼 방송망이 지니는 엄청난 대중적 권력화에 도전하는 한편으로 텔레비젼이 훌륭한 표현의 대안공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매체로서의 텔레비젼의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내가 처음 TV를 샀을 때는 무엇이 나올지 몰랐다. 주사선만을 조작했는데도 펑펑 새로운 그림들이 쏟아져 나왔다” 는 그의 말이 이 가능성의 확인을 실감시키고 있다. 처음 그가 한 것은 TV의 내부회로를 변경시켜 방송의 이미지를 왜곡시키거나 브라운관을 조작하여 다양한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평면이면서도 고정된 일반회화와는 다른, 시시각각 변모하는 생동하는 이미지를 창출해낼 수 있었다. 초기에 자주 시도한 것은 자석과 전자석을 이용하여 다양한 추상적 선묘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것이 60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테이프 작업을 통해 더욱 폭넓은 이미지의 획득이 가능하게 되었다. 휴대용 비디오의 출현은 그의 작업을 더욱 다양하게 전개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70년대로 접어들면서 설치작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이에 기인된 것이다. 초기의 설치작업으로 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들 수 있다. 불상을 텔레비젼 화면 앞에 놓고 화면 위에 설치된 폐쇄회로 카메라로 이 불상을 비추어 불상이 화면을 바라보게 하였으며 같은 구조로 로댕의 복제 <생각하는 사람>을 휴대용 TV 위에 놓고 조각이 다시 텔레비젼을 보고 있는 것처럼 꾸민 것이다. 테이프를 이용한 현란한 동영상의 폭주와는 또다른 침묵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많은 모니터를 설치한 작품들도 이 무렵에 쏟아져 나왔다. 대표적인 것으로 <비디오 물고기 75>, 을 들 수 있다. <비디오 물고기 75>는 일정한 높이의 기단을 만든 후 이 위에 20대의 모니터를 설치하고 이 앞에다 물고기가 들어 있는 어항을 놓아 모니터에서 나오는 각가지 영상과 실지의 유영하는 물고기가 겹쳐지면서 환상적인 시각적 충일을 이끌어낸 것이다. 날고 있는 비행기가 나오는가 하면 머스 커닝험의 느린 춤동작이 실지의 물고기와 겹치게 함으로써 현실과 환영의 교직이 시각적 충동을 유발시켰기 때문이다. 은 무성한 식물의 정원을 만들고 그 사이사이에 모니터를 설치하여 모니터 속에 흐르는 현란한 영상이 마치 활짝 피어나는 꽃의 이미지로 대용된 것이었다. 설치작업은 더욱 큰 스케일로 진척되었는데 <비디오 깔대기>가 그 첫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84년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지금 여기로부터>전에 출품된 것이다. 깔대기 모양의 철구조물을 실내에 설치하고 원형의 띠를 따라 모니터를 아래로 보게끔 매달았는데 도합 99대의 모니터가 매달려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면 현란한 밤하늘의 별의 우주 쇼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거대한 설치작품에 대한 발상은 88 서울 올림픽을 기해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된 <다다익선>에 와서 그 절정을 장식해주는 느낌을 준다. 미술관 입구의 원형 공간에 마치 5층탑을 연상시키는 총 1003대의 모니터가 동원된 높이 18미터의 대형 프로젝트이다. 개천절을 의미하는 10월 3일에 착상하여 1003대가 동원된 것이다. 램프를 따라 걸어 올라가면서 볼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으며 모니터에서 흘러 넘치는 현란한 동영상에 흠뻑 젖는 느낌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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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낙관주의와 기지에 찬 예감으로 이루어진 위성예술은 백남준의 또 다른 창안 가운데 하나다. <굿 모닝 미스터 오웰>(84년)과 <바이바이 키프링>(86년)은 각각 문명비평적 요소를 내포하면서 우주공간을 통한 소통의 새로운 방식을 모색한 것이다. 뉴욕의 카베트와 도쿄의 사카모토가 내민 손이 화면에서 악수를 하게끔 한 설정은 동서양의 만남을 시도한 기발한 설정이다. 흥행사로서의 뛰어난 기질과 천진한 의외성이 어우러지면서 문명적인 충격을 유도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양과 서양은 앞으로는 결국 만나지 못한다는 키플링의 예언을 뒤집어놓음으로써 동과 서는 너무나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역설을 가한 것이다.
비교적 후반기에 집중적으로 제작된 <로봇>연작은 형식에 있어선 다분히 조각적인 요소를 띤 것이다. 여전히 기지와 익살이 번뜩이는 점에서 일반적인 조각형식에선 엿 볼 수 없는 그 특유의 비판적 내용을 간과할 수 없게 한다. 로봇은 이미 64년에 최초로 만든 것이 있다. <로봇 K-456>으로 명명된 이 작품은 원격조정을 통해 움직이게끔 하였다. 93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독일관에 다시 출품된바 있다. 한스 하케와 같이 독일 작가로 출품하여 국가대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것은 베니스가 완성된 거장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오랜 전통에 힘입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후반기에 집중적으로 제작된 로봇 연작은 낡은 비디오 수상기와 라디오 수상기를 수집하여 이를 조립한 것인데 수상기 앞면엔 비디오 테이프를 장치하여 역시 현란한 동영상이 흘러나오게 하였다. 로봇 연작 가운데는 가족 시리즈(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있고 자신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이들이 모델로서 차용되었다. 예컨데, <머스 커닝함> <케이지>등이 그들이다. 백남준의 가장 만년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첨단 매체인 레이저를 사용한 빛의 공간 창출을 들 수 있다. 2000년 서울의 로댕 갤러리에서 열린 백남준 개인전에 나온 <야콥의 사다리>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의 왕성한 실험의지는 병고에 쓰러진 이후에도 식지 않고 이어졌다. 그가 좀더 연명되었더라면 레이저에 의한 빛의 작품이 독특한 형식을 부여받으면서 다양한 변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백남준의 작품의 영역은 비교의 차원을 만들 수 없을 만큼 폭넓은 것이었다. 초기엔 기존 음악에 대한 우상파괴적, 문명비판적 자각에서 출발하면서 비디오의 발견과 그것의 시공간적 매체의 잠재성을 확대해 가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후 설치와 조각 또는 인공위성과 레이저에 의한 매체의 시공간적 가능성을 무한히 탐색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니까 초기는 퍼포먼스를 통한 파괴적 행위에 집중되었다가 비디오의 발견으로 인해 영상의 조작과 매체의 풍부한 가능성을 추구해 가는 왕성한 실험으로 연계되었다. 브라운관이 평면의 회화를 대신할 것이란 예언은 이 같은 일련의 실험을 통해 얻어진 확신의 선물일 것이다. “1965년에 나는 콜라지가 오일 페인팅을 대신하듯이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보면 콜라지는 오일 페인팅을 대신하지 못했어도 브라운관은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 확실하다”. 영상의 범람이 그 어느 때보다도 극성을 피우는 오늘의 상황은 그의 예언이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란 생각을 갖게 한다. 물론 회화의 종말을 쉽게 예단할 수는 없으나 영상예술이 차지하는 영역의 확대는 당분간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백남준은 특히 영상문화를 우리민족의 정체성과 결부시킴으로서 영상문화의 주도적 가능성을 예시해주기도 했다. “우리민족은 오랫동안 유목민이었으며, 유목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주어도 가지고 다닐 수가 없다. 즉 무게가 없는 예술만이 전승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 유목민족에 대한 백남준의 인식은 부단히 그의 작품의 기저를 흐르고 있는 핵심적인 요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머물지 않고 흐르는 동영상에서부터 이미지의 파편화와 복합화 또는 다층화는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유동하는 유목민족 특유의 의식을 유감시킨 것에 다름아니라 할 수 있다. 국제인, 또는 세계인이 되면 될수록 자신의 뿌리에 대한 강한 회귀의식이 나타난 것도 백남준 예술이 갖는 후기적 특징이랄 수 있다.

- 문학사상 200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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