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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와 구도

오광수

대상에 충실히 접근하는 방법을 실사한다고 하고 그 결과물을 사실이라고 지칭한다. 사실은 대상에의 충실성을 객관적인 기준으로 잡는다. 그러나 때로 그리는 이와 대상간의 감정이입이 감동적으로 진행될 때 객관적인 실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채로운 대상을 목격했을 때, 경이로운 풍경을 직면했을 때 감동은 구체적인 대상의 묘파를 앞질러 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객관성에 얽매이지 않고 작가가 받은 감동이 관자에게도 그대로 전달된다. 이를 경우 객관성이란 적어도 회화의 경우, 거추장스러운 것이 될 수 있다.




이호신의 인도 기행화전은 사실과 감동의 문제점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나는 인도를 보았는가>란 명제의 이번 전시는 기행화문집 발간과 더불어 열리었다. 인도를 동서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대장정을 통해 얻어진 인상이 화폭에 담아지고 이에 대한 단상이 곁들인다. 이호신은 이전에도 기행 스케치와 인상기를 묶은 화문집을 낸 적이 있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이란 대개 밖에서 그려진 사생이 근간이 되고 있다. 사생에 대한 인식이 날로 희박해져 가는 오늘날 그의 작화의 태도는 고무적인 것이기에 충분하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새로운 자연과 삶의 양식에 맞닥뜨린다는 점에서 소중한 체험이 된다. 인도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풍부한 시각적 충격과 정서적 감동을 안겨주는 곳이다. 많은 볼거리와 많은 생각을 유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단상 가운데도 한 대목을 여기 인용해본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빛나는 아잔따, 엘로라석굴, 따지마할, 보드가야 대탑의 장엄과 박물관 탐방, 강가(갠지스)강에서 타오르는 생사의 불꽃 또한 잊을 수 없다. 한편 노숙자와 가난한 아이들의 파리한 눈빛, 호수같이 맑고 청순한 여인들의 애잔한 눈빛 또한 인류애의 가슴으로 눈물겨웠다. 또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인도신의 이야기와 현란한 사리복장이 보여주듯 다양한 삶의 방식은 움직이는 만다라의 세계였다.”
작가의 행적은 옛 유적을 찾아가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인도 하층민의 삶의 내면까지를 들여다보며 그들과 감정을 공유하는 경지까지를 보여주고 있다. 신비하고 이채로운 현실이 화폭을 누빈다. 기행은 실지로 본 현장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곁들여 현장에서 받은 감동이 진솔하게 구현되지 않아도 안 된다. 어떤 대상을 묘사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작가의 감흥에 기인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않는 대상에의 접근이란 있을 수 없다. 이때 받은 감흥이 고스란히 관자에 전달될 때 작품은 제대로의 완성에 도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작가와 대상간의 감정이입이 다시 작가와 관자와의 사이에 감정이입으로 이루어질 때 작품은 그만큼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이호신의 현장모사는 대단히 즉흥적이지만 작가가 받은 감동이 보는 이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된다. 간편한 도구에 의한 스케치가 아니라 먹과 모필이 중심이 된 동양화의 매재에 의하고 있어 많은 제약이 예상됨에도 현장의 분위기를 제대로 묘파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대폭으로 전개되는 <바라나시 갠지스강 생사의 노래>나 <아잔따석굴>은 먼 시점에서 걷잡아 한결 스케일감각을 살리고 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장면의 장엄함은 현장에서 보는 감흥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같은 대폭의 화면에 대비되는 소품의 작품들에서도 현장감에 충실하려는 의도가 제대로 살려지고 있다. 반면, 화면에 옮기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구도에 대한 배려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대담한 붓질과 가쁜 호흡이 묘사를 앞질러간다. 감동은 붓끝에 살아 소리치고 그리는 이는 이 소리에 휘말려 자신을 가다듬지 못한다. 묘사에 못지 않게 그림은 구도가 중요하다. 그림이 그림일 수 있는 요건은 화면을 어떻게 경영하느냐에 달려있다. 단순한 기록에서 작품으로의 차원을 만들어 가는 데 필요한 것은 먼저 구도다. 뛰어난 구도를 얻기 위해서는 냉철한 거리감이 전제되지 않고는 안 된다.





이재진은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다시 중국 천진미술학교 대학원에서 인물화를 전공했다. 어딘지 모르게 이채로운 인상을 주는 것도 이 같은 수업의 배경에 기인됨일 것이다. 그는 여러 차례 개인전을 전부 인물화전으로 열 만큼 인물화에 치중하고 있다. 물론 이번의 개인전도 인물화만으로 채워지고 있다. 인물 가운데서도 모델이 거의 젊은 여인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지금까지 우리 주변의 인물화들 대개가 채색 위주였다. 그런 만큼 선묘의 아름다움이 제대로 살려지지 않았던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재진의 인물화가 채색을 곁들이긴 하지만 선묘가 극명히 드러나고 있을 뿐 아니라 인물의 배치에 있어서도 인물과 여백의 관계를 긴장감 있게 추구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선묘의 아름다움이 이토록 구현된다는 것은 운필의 훈련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고도의 필력에서 나온 섬뜩하리만치 명확한 선묘는 그의 인물화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이다. 미세한 형태의 변화와 세부묘사에도 중봉을 유지한 치밀한 필선”운운한 윤진영의 지적에서도 그의 만만치 않는 운필력을 시사하고 있다. 전통적인 인물화법이 새삼 돋보이는 것은 우리 주변의 많은 인물화들이 전통적인 방법에서 멀어져가고 있다는 현실적 인식 때문이다. 섬세한 필선은 인물의 외형에 머물지 않고 인물의 내면의 감정까지를 담아냄으로써 잔잔하지만 깊은 여운을 자아낸다. 단순하면서도 탄력 있는 구도는 이를 더욱 뒷받침해준다. 실사와 구도가 적절히 구현되는 작화의 중심이 어떻게 진전되어갈지 지켜볼 일이다.

- 아트인컬쳐 2006.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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