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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조와 비판 - 월전의 만년작을 중심으로

오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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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한중대가 장우성, 이가염>전은 월전으로서는 마지막 전시였다. 이 전시는 이미 작고한 중국의 이가염과 당시 생존해있었던 장우성의 세계를 한 자리에 놓음으로써 두 작가의 예술을 비교 음미해본다는 의도와 아울러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적 양식이 각각 어떤 변모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는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를 가늠해본다는 의미도 아울러 가졌다. 우리 연치로 구십이세였던 월전은 현역으로서의 자신을 확인하는 뿌듯한 의식과 더불어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감회도 아울러 가졌을 것이다.

해방 전, 주로 공필채색의 인물화와 해방 후 필선위주와 담채에 의한 현실적 모티프의 작품을 거쳐 2000년에 들어와서 제작된 만년의 작품까지 폭넓게 출품된 내역은 그의 생애에 걸친 작업의 전체상을 내보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여러 논객들에 의해 기술된 바 있다. 해방이후, 왜색탈피와 이에 대응된 민족회화의 건설이 월전의 경우, 필선의 가치와 고답적 구성, 여기에 현실적 모티프의 적극적 수용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새삼 거론할 나위도 없다. 과거의 고답적인 주제의식에서 벗어나 현실적 감각을 적절히 끌어들인 신문인화풍은 청대 말 민국 초에 오창석, 임백년, 제백석 등에 의해 크게 진작된바 있는데 해방 후 민족미술의 건설이란 모색기에 직면한 한국화단에서 신문인화풍은 그 적절한 대안이 되기에 충분했다. 중국의 신문인화풍이 미친 영향을 간과할 수는 없으나 월전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 땅의 신문인화풍은 문인화 본래의 격조에 의한 구성패턴을 유지하면서도 내용에 있어선 당대가 요구하고 있었던 이른바 새나라 건설이라는 사회의식을 강하게 띠었던 것이 특징이었다.

월전의 작품은 시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적 추이는 발견되지만 근간에 흐르는 격조의 문인화정신과 사회의식의 구현은 초기에서부터 만년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한 말로 격조와 비판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후반기로 오면서 비판정신이 승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홍선표는 비판적 현실소재가 보다 의식화하여 다루기 시작한 시점을 1979년 무렵으로 보고 있다. 1)





문인화는 전시대의 문인사대부에 의해 진작된 양식의 그림을 일컫는다. 고아한 정신의 세계를 연마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써 문인화란 화목이 즐겨 다루어진 것은 이미 주지하는 바다. 다른 한편 문인화는 지식인의 사회의식을 표명하는 독특한 수단으로서도 기능했다. 송말원초나 명말청초와 같은 정변기에 문인화가 성행하였고 뛰어난 문인화가가 배출되었다. 문인화가 단순히 심심파적에 운용되는 취미의 방편이 아니라 부조리한 사회현실에 직면한 지식인의 저항의 몸짓을 구현하는 수단이었다는데 그 독특한 존재양식을 간파할 수 있다. 월전은 70년대에 들어오면서 간헐적으로 비판적 의식을 담은 작품을 보여 오다가 70년대 후반이후는 더욱 구체화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예컨대 <오염지대>(1979)는 산업화, 문명화에 따른 자연파괴, 환경오염을 주제화한 것으로 고아한 자태로 창공을 날아오르는 학이 공해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비참한 정경을 담고 있다. 화제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람들은 근대화를 원한다. 어찌 공해가 무서운 줄 알았으랴. 불바람은 대기를 더럽히고 독한 오수는 강과 바다를 물들이네. 산천초목은 말라 들어가고 사람과 가축은 죽어가는구나. 아아 뉘우치면 무엇하리 인간 스스로 지은 죄인 것을.”

80년에 있었던 도불기념전엔 남북분단의 현실을 소재화한 <단절의 산하>(1973), <단절의 경>(1979) 등이 출품되었다. 분단의 비극이 가감 없이 길게 이어지는 철조망을 통해 사실적으로 묘파되어지고 있다. 길게 사선으로 뻗어가는 철조망과 그 위를 날아가는 새들을 그려 넣은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어떻게 보면 평범하기 짝이 없는 화면이다. 만약 그것이 분단의 아픔이란 역사적, 현실적 배경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그림으로서 성립될 수 있는 풍경적 가치는 어디서고 찾을 수 없다. 당시 도하 신문은 노작가가 우리의 비극적 현실을 대담하게 화폭에 담았노라고 했다. 분단의 비극이 회화작품으로 제대로 구현된 예는 많지 않다. 더더구나 수묵담채의 매재로 다룬 예는 찾을 수 없다.

월전의 비판적 의식은 80년대로 이어지면서 내용에 있어 한결 진폭을 지닌다. <단절의 경>(1983), <황소개구리>(1998), <노호>(2001), <단군 일백 오십대 손>(2001)은 작가의 비판의식의 진폭을 보여주기에 넉넉하다. 대체로 이 같은 내용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직관적인 것과 비판 속에 해학적 요소를 곁들여 한결 풍부한 의미로 해석의 폭을 넓힌 것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풍경적 소재가 대체로 전자에 속한다면, 인간이나 동물이 모티프가 된 작품은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철벽 일천리 분단 반백년 산과 물도 서글퍼 날아가는 저 기러기”란 화제의 <단절의 경>(1993)은 이미 70년대에도 다루었던 내용이다. 분단의 현실을 길게 이어지는 철조망과 이 위를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들을 포치함으로써 단장의 념(念)을 고양시킨 다분히 직관적인 작품이다. 비슷한 내용으로 <갯벌>(1994)이 있다. 유사한 소재의 작품을 반복한다는 것은 내용과 모티프에 대한 작가의 지속적인 관심의 표명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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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적인 내용의 풍경들에 비하면 <노호><황소개구리><단군 일백 오십대 손>은 은유적인 비판의식이 전면에로 나오고 있다. <황소 개구리>의 화제는 마치 신문기사처럼 리얼한 묘사로 이어진다. “우리나라 물은 원래 깨끗해 물고기, 자라들의 천국이었다. 바위 위에서 청개구리 울고 여울에는 붕어, 잉어가 뛰어놀았다. 따뜻한 봄에는 송사리 태어나고 가을철이면 쏘가리가 살 오른다. 하루아침에 낯선 도적 뛰어들어 못과 늪에 큰 난리가 일어났네. 뛰어든 자 그 누구냐? 수입해온 황소개구리 그 놈이다. 몸통은 크고 성질이 포악해서 도처에서 광란을 부리니 뱀장어는 바위 밑에 숨고 개구리는 풀섶으로 도망친다. 독사도 항거하다 힘에 부쳐 도리어 먹히느니 강하 삼천리 조용한 곳 없구나. 외래화가 이렇게 참혹한가” 황소개구리가 생태계 교란의 원흉으로 떠올라 심각한 사회문제로 회자된 지도 어제 오늘이 아니다. 비단 황소개구리 뿐인가. 작가는 황소개구리에 빗대어 수입된 외래종이 토종을 몰아내는 현 상황을 은유하고 있다. 외래 것이면 무엇이든 좋다는 맹목성이 종내는 우리들의 의식과 정체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외래화가 이렇게 참혹한가”란 마지막 구절은 이 시대를 향한 노작가의 서글픈 외침이 되고 있다.




동물을 빌려 인간사회의 비열함과 천박함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는 예는 일련의 침팬지 그림과 여우를 소재화한 <노호(老狐)>가 있다. 늙은 여우를 소재화한 <노호>는 “늙은 여우 배가 고파 굴에서 나와 마침 썩은 쥐를 만나 배를 채우고 호랑이 위엄을 빌려 으스대니 모든 짐승들이 맥을 못 추네. 아하 내가 산중의 왕인가 보다.”로 화제되어 있다. 썩은 쥐를 먹고 배가 부른 늙은 여우가 호랑이 행세를 하는 허세와 방종은 현실의 인간사를 빗댄 것이다. 온갖 부정과 부패가 자행되는 가운데서 막상 그러한 부정을 저지르는 장본인이 오히려 당당한 모습을 취할려는 서글픈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월전은 초기부터 인물화를 많이 다루어온 편이다. 물론 화조, 영모, 풍경 등도 꾸준한 화목으로 취급되지만 아무래도 작가의 득의의 영역은 인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단순한 모티프상의 인물 외에 특정한 대상으로서 과거 위인상도 적지 않은 편이다. <이충무공상><권율장군상><정약용선생상><김유신장군상><윤봉길의사상><정몽주선생상><유관순의사상> 등은 그 대표적인 예다. 최근에 그린 단순한 모티프로서의 인물화로는 <춤>(1993), <오원대취도>(1994), <단군일백오십대손>(2001)이 있다. 이들 인물화는 1953년에 그린 <성모자상>에서 엿볼 수 있는 간결하면서도 힘찬 묘선과 담채에 의한 은은한 정취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월전 독자의 전형성이 맥락되고 있음을 확인케 한다. 인물상도 그렇지만 다른 정물적 소재도 대상자체만을 오롯하게 부각시키는 화면구성의 특징은 그만큼 여백이 구성요건의 주요 인자로 작용한다. 화제를 써넣기 위해서는 여백이 필요하지만 대상을 더욱 부각시키는 강조의 의미에서도 여백은 중요성을 지닌다.

최근 인물화의 대표격인 <단군일백오십대손>은 단순한 현실적 소재의 구현이면서도 해학이 곁들인 세태비판의 내용성을 담고 있다. 서술적으로 풀어놓은 화제는 이렇다. “우연히 어떤 젊은 여성을 만났는데 언뜻 보기에 외국인인가 생각했다. 더벅머리 붉은 루즈 색안경 쓰고 반바지에 배꼽까지 들어냈구나. 무슨 일 하는가 물어도 대답이 없고 이름을 물으니 미스 한이라고만 한다. 연거푸 담배를 피워 물고 하루 커피도 여러 잔 즐긴다고. 차츰 무간해져 가계를 물으니 단군 일백대 손이라 웃으며 대답한다. 아하 그러고 보니 한 뿌리의 종족이라. 문득 이질감이 느껴지는데 작별이 아쉬워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하니 붉은 손톱 날카롭기 매 발톱 같군. 집에 돌아와 인상이 깊어 그림을 그려보니 이 어찌 뒤바뀐 세태를 상전벽해라 아니하겠는가” 배꼽티에다 핸드폰을 하고 있는 젊은 여성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어디서나 담배를 빼어 무는 젊은 여성의 거침없는 모습은 노작가에겐 충격으로 비쳤을 것이 틀림없다. 단군 일백대 손이란 재치 있는 대답도 아득한 세월과 더불어 상전벽해의 심회를 효과 있게 전달해주고 있다. 지금까지 월전이 다루어온 인물의 범주에선 확실히 예외적이다. 그럼에도 화제나 그림에서 풍겨오는 풍자는 다른 어떤 작품에 비해서도 단연 압권이다. 도대체가 이 같은 현실적 단면을 회화화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웃어넘길 하찮은 일상사의 한 단면이 소재화 된다는 것 자체가 도도한 비판정신의 결정에 다름 아니다.

전시도록에는 미처 들어가지 못한 뒤뚱거리며 달리는 버스를 모티프로 한 것이 있다. 아마 전시준비가 거의 끝났을 무렵 제작된 것이 아닐까 추론해본다. 화면 속에 단순한 해학적 요소를 담는 것도 그만큼 작품을 풍부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거기다 예리한 비판이 곁들인다면 화면은 더욱 풍부한 내용을 이루게 된다. 이 작품도 해학과 더불어 굴곡 많은 우리들 서민의 삶의 단면을 구현해줌으로써 은근히 구조적 모순을 내비치려는 의도를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단순히 웃어넘기는 것과는 달리 웃음 뒤에 무언가를 생각게 하는 것이야말로 비판적 정신의 구현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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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전의 예술이 문인화풍에 기조 한다는 것은 먼저 화면구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상의 묘출과 적절한 여백, 그리고 이에 따른 화제는 형식적인 면에서 완벽한 문인화의 구조다. 문인화란 흔히 시, 서, 화 삼절을 이상으로 하고 있는데 월전의 작품만큼 이에 충실한 예는 흔히 찾을 수 없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우리시대의 진정한 문인화가니 최후의 문인화가니 하는 수식이 따르는 것도 이에 연유됨이다. 그림에 곁들인 시로서의 화제와 이를 구현하는 서예 외에 적절히 공간에 배치되는 낙관의 묘미는 문인화에서만 엿볼 수 있는 형식미라 할 수 있다. 규격화된 문인화는 우리주변에서 얼마든지 엿볼 수 있다. 문인사대부가 아니어도 규격으로서의 문인화를 답습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에 곁들인 시를 짓고 이를 서예로 구현해놓는 예는 좀처럼 찾을 수 없다. 이미 규격화된 화제를 그대로 써넣는 것이 고작이다. 단순한 형식으로서 문인화가 남아있을 뿐이지 진정한 정신의 표상으로서의 격조를 지닌 예를 찾기는 어렵다. 월전을 가리켜 우리시대 진정한 문인화가로 지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월전의 작품이 문인화에 기조 했다는 형식적인 면 외에 문인화의 비판적 의식을 담았다는 점에서 월전의 예술은 더욱 빛난다. 예리한 비판정신의 도저한 구현과 더불어 해학의 여유를 담고 있음은 유일하게 월전의 작품에서만 만날 수 있다. 문인화를 한갓 문인사대부의 음풍농월이라고만 할 수 없는, 문화적 저항의 몸짓이란 사실을 월전만큼 잘 구현해준 예도 찾을 수 없다. 월전을 두고 최후의 문인화가란 수식은 형식면에서만 아니라 실로 그 정신적 표상의 면에서일 것이다.
200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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