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근대기 미술작품 속에 나타난 아이들

오광수

1
아이들이 미술 작품의 모티프로 등장된 것은 그렇게 오래지 않다. 서양에서도 중세까지는 아이들이 다루어진 예가 거의 없다. 아이가 있는 경우는 성모상 속의 아기 예수나 세례 요한 정도가 고작이다. 우리에게도 옛 그림 속에 등장하는 아이란 관념 속의 동자상 _서양의 천사에 비견되는 - 이 중심이고 현실로서의 아이는 근대기에 이르러 등장되고 있다. 아이를 모티프로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대상화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비대상화란 바로 인격체로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부재했음을 의미한다. 속화가 등장하는 18세기경부터 부분적으로 아이들이 등장하는데, 예컨대 단원의 <서당>이나 <씨름>이 그 좋은 예이다. 물론, 단원의 속화 속에 등장하는 아이들도 풍속적 단면 속에 표상되는 것으로 특별히 모델로서의 의식이 강하게 반영되고 있지는 않다.

아이들이 모델로서, 또는 인격체로서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와서이다. 1923년 방정환을 중심으로 강영호, 정순철, 손진태 등이 발기해서 5, 1일을 어린이 날로 제정하면서 비로소 아이들이 어린이란 명칭으로 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린이운동은 조재호, 마해송, 윤극영, 정인섭, 이헌구 등 동경 유학생들에 의해 보다 체계적으로 진척되었다. 이들이 만든 단체가 색동회이다. 미술작품 속에 아이들이 등장하는 것도 대체로 이와 때를 같이 하고 있다.

아이들이 미술 작품 속의 모델로서 다루어지는 영역을 세분해보면, 먼저 단순한 묘사의 대상으로서의 모델이 있는가 하면, 놀이에 열중한 아이들, 노동(가사)에 종사하는 아이들, 풍경 속에 점경되는 아이들이 있고 내용에 있어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이는 것이 가족 속의 아이들과 모자상이다. 모델로서의 아이는 자신이 대상화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반면, 이 외의 경우는 자신을 의식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미술가는 모델로서의 타자를 의식하며 자신과 대등한 존재로서의 확인을 잠재시키고 있다. 모델은 미술가의 지시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지만 동시에 분명히 자신이 타자화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바로 이 점에서 모델과 미술가는 상대적인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모델로서의 아이 이 외의 영역은 그려지는 대상으로서의 아이가 자신이 타자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다. 여기서는 미술가와 아이가 인격적인 대등한 관계로서의 상대성이 빈약할 수밖에 없다.


2
모델로서의 아이 가운데는 단연 소녀가 많다. 근대기 작품 속에 나타난 소녀의 비율은 소년에 비해 거친 대로 분류하자면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다. 이 같은 비율은 대상화의 주 모델이 소녀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소녀가 모델로서 많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모델의 중심이 여인이란 사실과 연계된다. 남자가 단독의 모델로서 다루어지는 것은 퍽 예외적이다. 그만큼 단독 상으로서의 인물은 단연 여성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터이다. 여성의 모델은 누드와 코스츔으로 분류해 볼 수 있지만 소녀를 모델로 한 경우는 거의 코스츔이다. 장난스러운 여자 아이의 모습(이인성의 <침실의 소녀>)과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아기들의 모습(박래현의 <군동>)에서 벗은 아이들을 엿볼 수 있으나 이는 극히 예외적이다.

소녀의 모델은 어린 소녀에서부터 처녀에 이르는 연령대를 보인다. 이들 소녀상은 대부분 여인상의 포즈와 유사하게 의자에 앉은 좌상이 많은 편이다. 그 외의 소녀상은 주로 얼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얼굴을 크로즈업한다는 것은 소녀 특유의 청순함이 화인이 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얼굴에 초점이 가지 않는 경우는 독특한 옷매무새에 관심을 쏟고 있다. 연령에 따라 변화가 다양한 의상의 모양이나 색상이 모티프로서 관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소녀를 모델로서 많이 다룬 화가는 임직순, 이인성을 먼저 꼽을 수 있다. 임직순의 작품 가운데 소녀를 모델로 한 것으로 <모자를 쓴 소녀> <꽃과 소녀> <해바라기와 소녀><노란 색 치마를 입은 소녀> 등을 들 수 있고, 이인성의 작품 가운데는 <소녀> <침실의 소녀><기도하는 소녀><빨간 리본의 소녀><애향> <여학생><소녀상><어린이><얼굴><책 읽는 소녀> 등이 있다. 미술가들이 여자학교에 미술교사로서 재직한 경우 그렇지 않은 미술가들에 비해 소녀상이 많다는 것도 발견된다. 쉽게 여학생들을 모델로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임직순은 1957년 제 6회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는데 이 때 작품도 의자에 앉은 소녀상을 다룬 것이다. <모자를 쓴 소녀> <노란 색 치마를 입은 소녀> <해바라기와 소녀> 가 다 의자에 앉은 좌상이란 점에서 대통령상의 <좌상>과 이어진다. 그러고 보면 그가 다룬 인물상은 한결같이 의자에 앉은 좌상이란 공통점을 엿볼 수 있다. 의자에 앉은 소녀란 이미 신체적 조건이 성숙한 여인에 비견되어진다. 그러기에 의자에 앉은 자세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임직순에 비하면, 이인성의 소녀상은 연령대가 훨씬 내려온다. 따라서 의자에 앉은 소녀상보다 서 있거나 바닥에 앉아 있는 소녀상이 대부분이다. 대상과 화가와의 거리가 임직순의 경우, 대단히 상대적인 반면, 이인성은 생활 속에서 만나는 소녀의 다양한 모습을 즉흥적으로 걷잡고 있다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이인성의 소녀의 모티프는 풍속적인 단면의 일환으로 선택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소년, 소녀들이 등장하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 <경주의 산곡에서>나 여인과 소녀를 다룬 <해당화> <가을 어느 날>이 그 예이다.


1930년대에서 1950년대에 걸쳐 특히 소녀들이 자주 선택되는 것은 그들의 앳띈 모습에서만 아니라 옷매무새와 의상의 색감에 들어나는 변화의 진폭에 대한 관심 때문일 것이다. 특히 30년대는 향토적 소재가 만연하던 시대이다. 향토적 소재로서 소녀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은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한복에 기인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한반도에 건너와 많은 풍속적 단면을 그렸던 영국인 엘리자베스 키스가 남기고 있는 작품 가운데도 특히 한복의 우아함에 매료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가 1921년에 제작한 다색 목판화 <세모 풍경>은 여성의 한복과 어린 소녀들이 입고 있는 한복의 우아함과 색조의 청순함이 극명하게 구현되고 있다.

이 외 한복을 입은 소녀로는 이영일의 <시골 소녀>, 정현웅의 <소녀>, 김종태0의 <노란 저고리>, 오지호의 <시골 소녀>, 김기창의 <가을>, 전찬영의 <소녀>, 심형구의 <물가>, 장욱진의 <소녀>, 김세용의 <소녀>, 권진호의 <소녀>등이 20년대에서 40년대에 걸쳐 그려진 작품들로 향토적 소재로서의 소녀가 대상이 되고 있는 예라고 할 수 있다. 한복을 입은 소녀가 모델이 되고 있는 경우는 이후 70년대까지 꾸준히 맥락되고 있긴 하나 점차 그 빈도가 줄어들고 대신 양장의 여인상과 더불어 소녀들도 뒤바뀐 시대의 의상에 익숙해져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미 70년대는 현대적 의상이 보편화됨으로써 전통적 의상인 한복은 상대적으로 낙후한 전대의 유물로 인식되게끔 되면서 급속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50년대와 60년대의 한복의 모델은 박래현의 <자매>(55년), 김형구의 <동녀 입상>(57년), 손일봉의 <소녀>(77년), 그리고 풍속적인 요소가 강한 소녀상을 많이 그린 박수근의 <아기 업은 소녀>(63년), <나물 캐는 소녀>(61년), <아기 보는 소녀>(63년) 등이 한복의 소녀상들이다. 풍속적인 내용물일 경우, 어두운 시대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소녀상은 상대적으로 소년상에 비해 연민의 감정을 더 강하게 자극하고 있다. 이영일의 <시골 소녀>는 아기를 업은 소녀와 그 보다 어린 소녀가 빈들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정경을 묘출한 것인데 그들이 소녀이기 때문에 더욱 어두운 한 시대의 긴핍함이 적나라하게 표상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삭을 줍거나 나물을 캐는 소녀들의 모습을 다룬 작품들은 내용상에서 노동에 종사하는 아이들과 부분적으로 겹치게 된다. 이삭을 줍는다든지, 나물을 캔다든지, 밭일을 도운다든지가 일종의 가사 노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수근이 많이 그린 아기 업은 소녀상도 아기를 본다는 가사 노동에 참여하고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의 노동이란 직업상의 당당한 한 사람 몫의 그것이기 보다는 주로 가사의 일부에 동원되고 있어 노동이란 개념에 그대로 적용시키기엔 무리라 본다. 이는 남자 아이들의 경우에도 대체로 일치한다. 김준근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남자 아이는 평상에 이부자리를 편다든가 할아버지 등을 주물러 드린다든가 하는 극히 사소한 영역에 머무는 것이다. 소몰이 하는 남자 애나 양젖을 짜는 소녀, 토끼를 기르는 남자 아이등도 간단한 가사 노동은 아니나 그렇다고 독립된 직업의 범주로 보기는 어렵다. 역시 가사 노동이라는 부차적인 노동 개념에 적응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아이들이 노동에 참여하고 있는 경우는 가사를 돕는 것임에도 그들의 신체적 조건에 비해 벅찬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아이들 고유의 성장을 방해하는 일이 되고, 아이들의 정서의 함양에 어두운 그림자를 지운다는 일이 된다. 아이들이 인격체로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은 밝고 건강하게 자라야 한다는 전제에서다. 그러면서도 어느 일면, 이들이 보여주는 노동의 정경, 또는 노동에 참여하는 상황의 단면은 한 시대의 풍속으로서의 다감한 정서를 자극하기도 한다. 예컨대 나물 캐는 소녀들의 모습은 노동이란 벅찬 작업이기 보다는 봄 날 들녘에 나가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한다는, 나들이의 즐거움이 오히려 강하게 드러난다. 아기를 업고 돌아올 엄마를 기다리는 소녀의 모습에서도 일한다는 고역의 표정보다는 가족의 화목한 한 때를 기대하는 여유로움이 선명하게 반영된다. 이에 비하면 이수억의 <구두딱기 소년>의 경우는 직업 일선에 나선 소년의 고달프기는 하나 가족을 부양한다는 긍지가 배여 나오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3
아이들의 놀이는 아이들 특유의 호기심에서 발동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놀이에 열중해 있는 장면의 묘출은 일종의 풍속적 모티프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아이들의 놀이 가운데는 전래로 전해져오는 고유한 풍속으로서의 놀이와 일정한 규범을 갖지 않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행동양식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이분해 볼 수 있다. 김윤민의 <그네>, 배운성의 <그네를 타는 아이들>, <제기차기>, <줄다리기>, 엘리자베스 키스의 <연날리기>, 박상옥의 <후방의 아해들> 등은 고유한 전통적 양식의 놀이이다. 구본웅의 시화첩에 나오는 제기차기, 연날리기, 그네, 줄다리기, 씨름놀이등도 이 범주에 속한다. 정해진 룰에 따른 놀이는 아니나 아이들이 장난으로 즉흥적으로 만들어내는 놀이는 훨씬 자유분방한 데가 있다. 들녘에 나와 딩구는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모습을 즐겨 다룬 양달석의 <소와 목동> 시리즈는 평화로운 자연 속의 아이들의 모습이란 점에서 자유와 평화의 상징적인 요인을 머금는다. 피리를 부는 남자 아이와 이를 듣는 여자 아이의 다정한 설정이나 들판을 뛰면서 딩구는 아이들의 장난기 많은 모습은 초록의 들녘을 배경으로 더욱 다감한 인상을 준다.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에서 유토피어를 상정하는 모티프 역시 적지 않다. 그 가운데서도 이중섭이 그린 아이들과 꽃의 어우러짐은 낙원의 그것이기에 충분하다. <서귀포의 환상>, <과수원의 아이들>, <꽃과 어린이>, <꽃과 어린이와 게>, <꽃과 노란 어린이>, <봄의 어린이>는 현실의 그것이기 보다는 낙원의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외 아이들의 놀이를 모티프로 다룬 것으로 임규삼의 <감 따는 아이>, 이수억의 <등꽃 필 무렵>, <느티나무 언덕>, 박상옥의 <한일> 등이 있다.

풍경 속에 등장하는 아이의 소재는 특별히 아이들이 화면의 중심 모티프는 아니다. 풍경이 위주이면서 풍경적 요인을 자극하기 위한 장치로서 아이들이 점경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풍경 속의 아이란 자연과 더불어 있는 관계로서 선택되는 예도 적지 않은 편이다. 전자의 경우는 오지호의 <남향집>, 이대원의 <뜰>, 이인성의 <정원>, 도상봉의 <성균관>이고 후자의 예는 류경채의 <가을>, 박창돈의 <성지>, 김흥수의 <마을과 소녀>를 꼽을 수 있다. 전자는 풍경의 한 부분으로 아이들이라면, 후자는 아이와 자연이 어우러져 어떤 정서를 진작시키는 경우이다. 만약 오지호의 남향집에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 아이가 대문에로 나오는 정경이 아니었다면 이 작품은 남향집이란 독특한 향취를 자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우선 화면을 차지하는 모티프의 크기에 있어 인물은 자연과 대등한 비율로 자리 잡는다. 대개 이 계통은 계절의 정취가 중심 모티프로 선택되고 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풍경 속의 아이들은 장욱진의 작품 속에 가장 빈번히 등장한다. <까치와 아이>, <집과 아이>, <아이, 해, 달>, <아이>등은 아이가 화면의 중심 모티프로 등장하지만 <마을>,<풍경>, <나무>, <호작도> 같은 풍경이 위주인 작품 속에서도 아이는 주요한 인자로서 자리 잡는다. 장욱진의 아이들은 간략한 선묘로 처리되어 성별이 애매할 때가 있긴 하나 거의 남자 아이다. 가족의 모티프 속에서도 아이는 언제나 남아이다.

4
아이를 독립된 개체로 보다 가족의 일원 또는 모자나 모녀로서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려는 예가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인다. 이는 아직도 아이들이 독립된 존재로서 대상화하기보다 항시 어른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한다는 관념의 소산일 것이다. 특히 엄마와 아기의 모티프는 사랑, 평화, 자애와 같은 상징성으로 인해 가장 빈번히 다루어지고 있다. 서양에서는 엄마와 아기의 모델이 성모자상으로 연결되어 있어 그 역사는 오래인 편이다. 성모자상은 한국의 근대기 작가들의 작품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특히 장우성이나 김기창의 경우는 성모자상을 한국인으로 치환해서 묘사함으로써 수입된 도상으로서의 범례가 아니라 토착화된 기독교 사상을 반영하고 있어 특별한 종교적적 감화를 수반하고 있다.

근대기의 대표적인 엄마와 아기상은 채용신이 그린 <운낭자상>이다. 전통적인 재료에 의한 작품이지만 전반적으로 명암에 의한 입체감이 두드러진 점 서양화의 기법이 원용되고 있다. 이 외 모자상은 이유태의 <정>, 배정례의 <봄>, 한묵의 <모자상>, 심죽자의 <어머니와 두 아이>, 이수억의 <모자상>, 양달석의 <모정>, 박항섭의 <모자상>, 최영림의 <모자>, 백영수의 <전원에서>, 김홍주의 <문>, 전화황의 <건강하게 잠자는>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조각에서도 엄마와 아기의 모티프는 빈번히 다루어졌다. 김정숙의 <엄마와 아기>는 목조, 석조 등 여러 재질을 통해 구현되어진바 있다.


가족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이로 나타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경우이다. 아이가 둘 이상인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다. 장욱진은 가족이란 모티프를 자주 다룬 편인데 언제나 아버지, 어머니, 아이의 세 사람으로 한정되었다. 어쩌면 이 아이는 한 사람으로보다는 아이들 일반을 대표해주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본다. 실지는 아니지만 그림에 나타난 가족은 두 어른과 한 아이란 설정이 균형 감각이 맞는 구도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영선의 <농부의 가족>이나 함대정의 <가족>, 심죽자의 <가족>이 세 사람이기 때문에 화면 구성상 짜임새를 얻고 있다. 물론, 이는 보편적인 예이고 실제의 자신의 가족을 숫자대로 설정하는 예도 없지 않다. 박고석의 <가족>, 이만익의 <가족> 김종식의 <인간가족>, 배운성의 <가족>은 아이가 여럿 아니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들어가는 경우, 더 나아가서는 대가족을 다룬 예도 없지 않다. 배운성의 <가족도>는 일가 전체가 포함되는 대가족도이다.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의 아이의 이미지는 가족 구성원의 관계를 더욱 밀착시켜준다는 점을 먼저 들 수 있다. 따라서 아이가 없는 집은 가족이란 개념이 그만큼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아이의 역할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겠으나 구체적인 작품으로 등장한 것은 근대기에 와서라고 할 수 있다. 아이가 인격체로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그의 역할이 구체적인 작품의 모티프로 구현되어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5
대부분의 아이들이 있는 풍경은 묘사적인 경향이 압도적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대상성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시대가 하향될수록 야수파적인 요소, 입체파적인 요소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같은 모티프를 다룬 경우에도 구사한 방법에 의해 그것의 감화는 차이를 들어낸다. 사실적, 묘사적 방법 외에 여러 경향이 점검된다는 것은 그만큼 표현의 진폭이 넓어지고 있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기도 하다. 먼저 야수파적 표현파적 경향의 작품들이 사실적 방법 외에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인다. 구상적 경향 가운데서도 야수파적, 표현파적 방법이 이미 50년대에 와서는 보편화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극히 제한되기는 하나 입체파적인 방법의 구사도 가끔 발견된다.


야수파적, 표현파적 경향으로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경우는 한묵, 박고석이며, 입체파적 경향의 대표적인 예는 심죽자, 이수억, 박래현, 함대정이다. 한묵의 모자상은 대상을 대단히 요약 파악하면서 진득한 마티엘을 구사하고 있어 중후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모자상에 비해 대상을 구성적 패턴에 의해 구조화하고 있어 야수파적인 요소와 입체파적인 영향이 공존하고 있는 느낌이다. 박고석의 <가족>과 <소녀>는 두터운 마티엘과 강인한 터치가 두드러진다. 류경채는 감각적인 표현주의를 지향했다가 점차 순수한 추상으로 변화되어가는 편력의 작가다. <가을>과 <소녀>는 분할적인 터치와 다감한 색채의 구사가 돋보이던 50년대와 60년대의 작이다. 대상에서 점차 벗어날려는 의지가 부분적으로 표착된다. 최영림은 토착적인 정서를 기조로 하면서 자유분방한 표현을 구사하고 있다. 많은 그의 모자상은 낙원에서 딩구는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구가하고 있어 설화적인 내용성이 두드러지는 편이라 할 수 있다. 김원의 <모자>와 김경의 <소녀>는 강인한 선획과 중후한 마티엘이 구사되고 있는 표현파적인 경향이다. 김흥수의 <마을과 소녀> 역시 부분적으로 입체파의 감화를 보이면서도 대상에 가해지는 강렬한 표현적 추세는 조만간 대상을 극복해보일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인상파의 주류에서 벗어날려는 진취적 경향은 1930년대에 와서 일부 화가들에 의해 추구되기 시작한다. 이 새로운 경향 가운데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이는 것은 야수, 표현파적인 경향이다. 이에 비하면 같은 진취적 경향인 입체파를 추구하는 화가들은 극히 제한되어 있는 편이다. 아마도 그것은 야수, 표현파가 우리들 정서에 쉽게 수용되는 반면, 논리적인 대상의 분석과 구성적 과정이 요청되는 입체파는 그만큼 우리들 정서에는 쉽게 수용될 수 없는 한계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몇 몇 화가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는 입체파의 방법은 완벽한 입체파의 이해라기보다는 부분적인 입체파의 방법적 원용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심죽자의 <어머니와 두 아이>의 경우는 입체파의 체험이 밀도 있게 반영되고 있는 경우다. 함대정의 <가족>은 강인한 직선에 의해 대상을 요약해 들어가고 있어 입체파의 감화와 표현파의 원용이 어우러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박영선의 일부 작품들에서도 부분적인 입체파의 감화가 감지된다. 이수억의 <6,25 동란>과 <모자상>은 전면적으로 입체파의 방법을 적용시키고 있긴 하나 대상을 분석하는 해체적 방법에 있어 부분적으로 무리가 보인다. 박래현의 <자매><아이들><이른 아침>은 동양화의 매재와 기법에 의한 입체파의 원용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영역을 보이고 있다. 장욱진의 방법은 야수파다 입체파다 라고 한계지울 수 없는 대단히 요약된 대상의 구현이면서 때로는 입체파적인 분석이 시도되는가 하면 표현파적인 분방한 구사를 즐기기도 한다.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방법의 천착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근대기 미술작품 속에 나타난 아이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