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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구와 도약 1953 - 1960

오광수

1. 미술계 내분
1953년 8월 15일 기해 정부가 수도 서울로 환도함으로써 50년 전쟁 발발 이후 피난지 부산의 임시수도시대가 그 막을 내렸다. 휴전이긴하나 일단 전쟁이 끝났다는 안도감이 복구와 새로운 시대에로 향한 열망을 안겨다 주었다. 폐허가 된 명동일대에는 서울로 돌아온 예술가들이 집결하는 중심무대가 되었다.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던 피난지의 유목민의식은 그대로 이어져 그들의 창작의 산실은 그들의 작업실이 아니라 명동이란 폐허의 한 복판이었다. 고단하고 신산한 전후의 삶이었으나 한편으론 재건의 의욕이 예술가들 사회에도 불고 있었다. 피난지에서의 구차한 예술활동이 다시 규모있게 갖추어지기 시작했고 전쟁중 열리지 못했던 국전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커다란 변화란 미술가들의 인적 변동이었다. 적지않은 미술가들이 월북 또는 납북되었고 상당수는 전쟁에 희생되었다. 다른 한편 유엔군을 따라 남으로 이주해온 북쪽의 미술가들이 합류했다. 46년부터 문을 열기 시작한 각 미술대학에서 배출한 신진 미술가들이 역시 미술계에 편입됨으로써 화단의 구성은 전전과는 다른 구성인자들로 인해 새로운 모습을 띠었다.

대체로 53년에서 56년까지의 약 3년간은 복구의 시기로 특징지워진다. 폐허가 된 도시의 복구 뿐아니라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창작의욕의 재기도 포함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동안 외부에 의해 통제되었던 활동의 점진적 해제가 미술가들 내부의 구성적 와해를 가져다준 요인이 되었다. 적과의 대치란 절박한 상황에선 집단적 결속이 지상의 명제였다. 공산군과의 대결이란 명분은 모든 예술가들에게도 멸공, 반공의 기치아래 결속하도록 강요당했다. 이같은 시대적 명분아래 개인적 행동반경은 그만큼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휴전이긴하나 전쟁이 중단되었다는 상황은 지금까지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국가적 이념을 다소 느슨하게 만든 배경이 되었으며 상대적으로 억눌렸던 개인의 욕구가 비등하기 시작했다. 50년대 전반의 가장 두드러진 미술계 사건은 미술계분파와 국전파행이랄 수 있는데 이같은 사건의 단초는 이상과 같은 시대적 분위기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미술계분파는 이왕 존재했던 전체미술가들의 결속체였던 ‘대한미술협회’에서 한국미술가협회가 분리되어 나온 것을 말한다. 55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특정한 몇몇 인사의 감정적 대립이 발단이 된 것이었다. 고희동, 이종우, 도상봉, 윤효중, 이봉상 등 대한미협중심의 미술가들과 장발을 옹휘하는 김병기, 장우성, 임응식, 손재형 등 서울미대 교강사들의 반목이 끝내 분파로 이어진 것이다. 한국미술가협회의 이탈은 조형이념적 갈등에서 빚어진 건전한 분파가 아니라 순전히 인간적 감정의 대립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만큼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작품이념이나 행동 및 작가정신의 대결과 가치평가에 의한 지향의 방법을 내걸고 일으켜진 건전한 분립이 아니라 집단행동이란 하나의 이념에서 또 하나의 집단행동이란 이념을 내걸고 분열한 것”(1)이었기 때문이다. 유파를 초월하고 제너레이숀을 초월하여 예술인의 연합이 이루어진 것은 전쟁이 갖어다준 하나의 선물이었으나 그것의 명분이 퇴색해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라고 김영주는 진단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대미(대한미술협회의 약자)와 한미(한국미술가협회의 약자)의 대결은 이듬해인 56년 국전을 위요하고 폭발되었다.

당시 국전 심사위구성은 예술원 미술분과에 의뢰되었는데 25인의 심사위원 천거가 문교부에 의해 수용되자 대한미협측이 문교부장관에게 강력히 항의하였다. 대한미협측 보다 한국미협측 인사가 더 많이 내포되었다는 것이었다. 결속된 미술계를 분열한 장본의 단체에게 더 많은 심사원을 배정한다는 것은 대의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검토하지 않은채 밀어부쳤다. 이에 격분한 대한미협이 성명서를 발표, 대한미협소속 작가들은 이번 국전에 일체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국전을 보이코트한다는 이 사건은 급기야 국전의 무기연기로 이어졌고 국회에 비화되어 문교위 국회의원들에 의해 중재되는 사태로 발전되었다. 중재 결과 대미측 인사가 한미측보다 많게 재배정되었다. 막상 타협은 이루어졌으나 전시 당일 한미측 일부 미술가들이 작품을 철거하는 소동을 일으켰다.

국전이 당시 미술계의 최대의 행사인만큼 여기에 거는 기대도 높았으며 상대적으로 실망 또한 높을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등용문으로서의 기능 외에 미술계의 위계가 국전을 중심으로 형성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술가들 자신 뿐아니라 일반대중들에게도 국전이 미술가를 평가하는 척도로 인식되었다. 원래 국전은 관전이기 때문에 아카데미즘의 중심이어야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국전규약 가운데는 어디에서고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전체 미술가를 위한 공통의 마당이란 애매하기 짝이 없는 명분만을 제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국전은 실제적으로 자연주의계열의 보수적 인사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새로운 경향은 애초에 수용될 수 없는 입지였다. 잇따른 국전에의 불만과 시비의 원천은 성격규명을 명문화하지 않은데 있었다. 국전의 1회만을 제외하곤 50년대를 통해 거의 변화없는 몇몇 원로작가들에 의해 심사가 독점되다시피 하였다. 국전의 보수적 성향은 더욱 심화되는 만큼 이에 반하는 불만은 끊이자 않았다. 국민의 세금에 의해 운영되는 국전이 어느 특정한 경향의 작품만에 의해 장악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이다. 60년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차례 제도적 개선이 뒤따르고 그 나름으로 다양한 경향을 수용할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노력이 수반되는 것만큼 이번엔 국전이 지녀야할 아카데미의 온상으로서 성격이 무화되는 아이러니를 노증시켰다. 국전과 대등한 현대전을 상대적으로 운용하였더라면 해결되었을 것을 국전 하나에 모든 것을 수용할려고한 정책의 안일성이 빚어낸 결과였다. 국전은 미의 표본으로서 아카데미의 형성에 박차를 가하지 못한채 진부한 자연주의의 양식에 얽메여 있었다. 이른바 좌상붐이란 고식적 소재주의의 만연은 국전 양식의 진부성을 노증해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2. 변혁의 의식과 새로운 양식
50년대 후반, 즉 57년에서 60년에 이르는 기간은 앞선 전반에 비해 변화의 물결이 높은 시기로 특징지워진다. 무엇보다도 의식의 변혁이 두드러진 점을 지적할 수 있다. 55년과 56년에 이은 미술계의 갈등과 반목 그리고 잇따른 분열은 의식있는 미술가들에게 상황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자각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었다. 50년대 후반은 이같은 자각을 바탕으로한 창조의 본래적 정신의 회복이 일부 미술인들 사이에 팽배해져갔다. 조형이념적 서클의 출현은 바로 그러한 창조정신의 회복의 실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57년 한해 동안 5개의 이념적 서클이 출범했다는 것은 일대 사건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공간(45 - 48년)에 출현한 그 많은 단체들이 실은 정치이념적 단체들의 이합집산이었음에 비해, 그리고 같은 학교 출신들끼리 모이는 친목단체가 고작이었던 시점에 조형이념에 의한 결속이 잇따를 수 있었다는 것은 변혁의 시대적 증후를 충분히 반영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영주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작년 가을부터 화단의 질서와 방향을 새롭게 진전시키고자 각성한 작가들에 의해서 몇몇 그룹이 형성되었다. 그룹을 통해서 과제를 내세우고 아울러 행동이념을 통해서 작가의식을 드높이는 그 일이 화단의 현황과 한국미술에 있어서의 현대적 의의를 밝히는데 얼마나 소중한가하는 문제는 거듭 말할 필요도 없다.”(2)

다섯 개의 그룹은 ‘모던 아트협회’(한묵, 정규, 박고석, 문신, 우영국, 이규상, 황염수, 정점식, 그리고 나중에 김경, 천경자가 가담), ‘현대미술가협회’(김창열, 장성순, 문우식, 김청관, 김영환, 김종휘. 하인두, 이철, 김서봉, 김충선, 나병재, 조동훈, 그리고 2회 이후로 박서보, 이양로, 이수헌, 정건모, 전상수, 정상화, 조용익 등이 참여), ‘창작미술가협회’(이봉상, 이준, 류경채, 장리석, 최영림, 박항섭, 황유엽, 고화흠, 박창돈, 홍종명), ‘신조형파’(변희천, 조병현, 이상순, 황규백, 김관현, 손계풍, 김창건, 이철이, 변영원), ‘백양회’(김기창, 김영기, 김정현, 천경자, 이유태, 박래현, 조중현, 이금추, 장덕)였다. ‘모던아트협회’는 중견작가들 단체로 이들은 애초에 국전을 외면한 순수한 재야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현대미술가협회’는 아직도 미술계에 깊이 발을 들어놓지 않았던 젊은 세대의 작가군이었다. ‘창작미술가협회’는 국전에 참여하고 있었던 중견작가들로 “기성의 울타리 속에서 내부혁신을 꾀할려는”(3) 그룹으로 성격지워지고 있다. ‘신조형파’는 순수한 화가들 만의 모임이 아니라 화가, 디자이너, 건축가 등 조형 전 분야에 걸친 조형예술가들의 결속체로 미술문화의 생활화를 조형이념으로 내세웠다. “순수한 행동이념을 현대미술의 새로운 방법과 결부시킴으로써 당면과제를 공동으로 밝히고자”(4)한 ‘모던아트협회’는 그러나 추상계열의 작가와 감각적인 대상표현의 사실주의 작가가 혼융되어있어 그룹의 취지와는 걸맞지않은 구성요건을 지니고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그럼에도 후기인상파 이후의 개성적인 작업의 적극적 추진이란 점에선 가장 건전한 재야의 모임으로 평가되었다. ‘현대미술가협회’는 애초에 “제도권에 편입되지 못한채 재야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신예작가들로 국전류의 예술적 생명력과 시대의식을 동반치 못한 창조적 고갈의 미술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국전과는 내용상, 형식상 구별되는 별개의 미술을 암중모색하기 시작”(5)한 것이었다. 이들의 암중모색은 1년이 지난 4회전에 와서야 구체적인 결실을 맺었다. 1958년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4회전(당시는 1년에 두 번의 그룹전이 열리었음)에서 공통된 의식과 방법을 보여주었는데 이들은 이를 앵포르멜미학이라고 불렸다. 이경성은 이들을 가리켜 “미의 전위부대”(6)라고 칭하면서 다음과 같이 전시소감을 피력해주었다. “육감적이고 율동적이고 음악적인 그들의 조형적 발언이 청년만이 가질 수 있는 독존과 반발 그리고 강한 부정의식으로 온 회장을 하나의 전쟁터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앵포르멜은 전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뜨거운 표현의 추상으로 이는 미국에서 풍미한 액션페인팅과 유사한 면모를 들어내었다. 형태를 애초에 설정하지 않는다는 비정형이나 그린다는 행위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다같이 기존의 작화의 태도를 벗어난 것으로 당시 ‘현대미협’의 방법이 보여준 것은 그린다는 자체가 하나의 실존의 물음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내가 그림으로써 살아있다는 절실성이 반영된 것이었다. 우선 이들 세대가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세대란 점(전투장에 직접 참여),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온 극한상황을 딛고온 세대란 점이야말로 기존의 가치관으로는 척도할 수 없는 절실성을 내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선언에서도 이런 점이 구현되어나오고 있다. “우리는 작화와 이에 따르는 회화운동에 있어서 작화정신의 과거와 변혁된 오늘의 조형이 어떻게 달라야 하는냐는 문제를 숙고함과 동시에 문화의 발전을 저지하는 뭇 봉건적 요소에 대한 안티테제를 모랄로 삼음으로서 우리의 협회기구를 가지게 된 것이다.”(7) 서성록은 이같은 일련의 ‘현대미협’의 이어지는 선언을 두고 “대체로 전통파괴와 비합리성의 옹호같은 허무주의적 색채를 저변에 깔고 있었던”(8)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의 행동이나 언술은 다분히 부정적이면서도 시니컬한 내면을 지닌 것이었다. “헤진 존엄들, 여기 도열한다. 그리하여 이 검은 공간 속에 부등켜안고 홍소한다. 모두들 그렇게도 현명한데 우리는 왜 이처럼 전신이 간지러운가”(9)라는 제 3선언의 한 구절에서도 이를 엿 볼 수 있다.

‘창작미협’은 김영주의 지적처럼 국전 내부에서 참신한 분위기를 조성할려는 그룹으로 자연주의에서 출발하지만 감각적인 대상파악과 향토적 정서를 적극적으로 구현할려는 중견들 모임이었다. 30년대를 풍미한 향토적 소재주의에 맥락되면서도 건전한 토착성의 현대화에 주력하였다. ‘신조형파’는 전후 건설의 사회적 요청에 적극적으로 상응한 조형단체로 1차 대전 후의 독일에서 전개된 바우하우스의 역할을 의식한 듯 하다. 그러나 창립취지에서 밝힌 의욕과는 달리 점차 화가들의 모임으로 변질되어갔다. ‘백양회’는 동양화의 고식적인 양식과 방법에서 탈피하고자한 중견작가들의 모임으로 대부분 이당 김은호의 문하였다는 점은 이당의 국전소외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그룹의 출현은 그룹에 의한 조형운동을 가능하게 했다.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로 이어지는 시점의 여러 단체가 보여준 활동의 내역은 다분히 조형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국전 내지 보수적인 화단의 분위기를 쇄신하고 새로운 창조적 열기를 고양시키는데 있어 이들 그룹이 담당한 역할은 결코 적지않았다. 57년에서 60년에 이르는 시기는 실로 그룹에 의한 조형운동이 한국현대미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3. 한국화, 서양화, 조각
해방이 되면서 왜색의 탈피와 민족미술의 건설이란 당면과제는 어느 분야보다도 한국화가 가장 절실성을 띠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화의 감각과 방법이 심하게 침투한 영역이 다름아닌 한국화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자각과 방법적 모색이 채 성숙되지도 전에 전란의 소용돌이로 인해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환도와 더불어 이 문제는 다시 제기되었고 몇몇 작가들에 의한 방법적 모색이 결실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서울대를 중심으로한 필선위주의 수묵 담채의 방법이 김용준, 장우성 등에 의해 추진되었고 이에 영향을 받은 해방후 제1 세대들에 의해 더욱 확산되었다. 서세옥, 박노수, 장운상, 권영우 등이 그 대표적인 1세대 작가들이다. 이들은 신문인화풍의 필선과 담채로 현실적 소재를 담은 새로운 화풍을 전개해 보였다. 일본화의 영향을 받은 김기창, 박래현도 해방이 되면서 간결하고 고답적인 필선과 구성의 화풍을 모색하였는데 이들의 성숙된 방법의 결실은 환도 이후 발표되기 시작했다. 형태를 대담하게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논리적 화풍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현대 회화로서의 한국화의 한 모델이었다. 이응로는 활달한 운필과 대담한 묵법을 구사하여 이미 추상으로의 잠재성을 내장하고 있었다. 50년대 후반 프랑스로 진출한 그가 서체적 추상으로 진전될 수 있었던 것도 이미 이 시기에 그 바탕이 준비되었음에 가능했다. 자획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이른바 문자추상이란 그 독자의 세계가 이로 인해 구현될 수 있었다. 백양회 소속의 김영기, 김중현, 천경자 등도 각기 독자한 자기세계를 모색해 나갔다. 특히 천경자는 진한 채색과 설화풍의 내용으로 이채로움을 더해 주었다.

해방 전부터 사경산수로 이미 자기세계를 확고히 다진 이상범, 변관식 등은 50년대로 오면서 더욱 무르익어가는 경지를 들어내었다. 간결하고도 경쾌한 필선으로 들녘의 사경을 주로 그린 이상범은 해방 전 무거운 화면분위기에서 벗어나 더욱 투명하면서도 서정이 풍부한 한국산수의 한 전형을 이루어나갔다. 변관식 역시 한국산수의 한 전형을 풍부한 구성과 스케일로 구현해주었다. 해방 전 오랫동안 답사한 금강산 스케치를 바탕으로한 다양한 변주의 작품은 그 뛰어난 예이다. 관념취가 풍부한 사경산수로 일가를 이룬 노수현의 세계와 고답적인 남화산수의 틀을 고수한 허백련, 허건의 방법도 산수화의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다.

서양화 영역에 불고 있었던 뜨거운 추상표현의 방법은 동양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60년에 등장한 ‘묵림회’는 대담한 필선과 번짐, 흘리기, 튀기기 등 다양한 자동적 방법을 구사하는 비정형의 작품을 펼쳐보였다. 서울미대 출신들- 서세옥, 안동숙, 남궁훈, 민경갑, 송영방, 정탁영, 신영상 등-로 구성된 ‘묵림회’는 동양화에서의 비구상의 영역을 더욱 확대해가는 역할을 다하였다. 이외 안상철, 송수남 등도 개별적으로 순수추상을 시도해 보였다.

서양화 분야에서 두드러진 변화의 양상은 50년대 후반의 변혁의 소용돌이였는데 소단위 그룹중심의 조형운동이 ‘현대작가초대전’(조선일보 주최)에 의해 대단위로 결속되면서 국전에 대한 재야의 형성이 한결 뚜렷해졌다는 점이다. 추상미술의 급부상은 구상이냐 추상이냐의 논쟁을 낳기도 했으나 홍수처럼 넘쳐나는 추상의 열기를 맊을 수는 없었다. 젊은 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 일부 기성 작가들까지 추상미술에 편승되는 현상을 빚기도 하였다.

60년에 들어가면서 출범한 ‘1960년 미술가협회’는 ‘벽동인’과 더불어 덕수궁 담벽에 작품을 진열함으로써 작품으로 시위하는 또 하나의 양상을 들어내었다. 닫혀진 공간에서 열려진 공간으로 진출함으로써 현대미술이 지닌 폐쇄적이고 고답적인 인식을 스스로 타파할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1960년미협’은 연령상으로는 ‘현대미협’과 격차를 지니고 있으나 조형이념이나 방법에 있어선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62년에 들어가 이들 두 단체가 발전적 해체를 통해 악뚜엘이란 새로운 단체로 연합될 수 있었던 것도 이에 말미암은 것이다.
환도하면서 특히 서양화분야에서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로 꾸준한 해외진출을 꼽을 수 있다. 54년 남관을 시발로 김흥수, 권옥연, 김환기, 손동진, 나희균, 이세득, 함대정, 장두건, 변종하, 김종하, 문신, 한묵, 박서보, 이응노, 이성자 등이 파리로 진출하였다. 일부 중견작가들의 파리진출은 일본을 통해 수용될 수밖에 없었던 서구의 미술을 직접 체험한다는 사실 외에도 한국미술의 해외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평가될 수 있다.

그룹활동보다는 개별적으로 자기세계를 일구어나간 일군의 작가들을 간과할 수 없다. 김환기, 장욱진, 이중섭, 박수근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고유한 정서에 조형적 가치를 추구한 김환기, 토속적인 정감을 고도로 절제된 표현양식으로 추구한 장욱진, 활달한 드로잉과 해학적 내용의 이중섭, 서민들의 삶의 풍경을 소박한 양식으로 담은 박수근은 한 시대 미의식의 도도한 물결에 비껴나면서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풍요롭게 가꾸었다.

조각은 해방전부터 양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채 그것이 6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조각영역의 활동도 양적 왜소에 따른 상대적 빈곤을 감출 수 없었다. 50년대를 통털어 개인전이 두 번(54년 김찬식전, 58년 김영학전)이 고작이고 그룹전도 60년대로 가면서 등장되기 시작했다. 국전을 중심으로한 조각의 양식은 오랫동안 모델링조각에서 탈피치 못했다. 금속에 의한 새로운 방법이 등장되면서 비로소 비구상적 경향이 시도되었다. 용접에 의한 철조는 송영수, 김종영, 김정숙 등에 의해 먼저 추구되었다. 뜨거운 추상표현주의는 조각의 영역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60년대에 이르면서 용접에 의한 철조가 조각의 중심방법으로 대두되는 것도 이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해외와의 접촉은 윤효중에 의해 최초로 이루어졌다. 51년 유네스코 국제예술가회의에 참가한 그는 이태리에 머물면서 마리노마리니, 홧치니, 그레코 등과 교유하면서 그들의 방법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후 무브망과 기념비적 성향의 작풍은 이 때 받은 영향이었다. 또 하나의 국제적 접촉은 53년 영국 테이트미술관에서 공모한 <무명 정치수를 위한 모뉴멘트>전에 김종영이 입상되면서였다. 한국 현대조각이 최초로 해외에 소개된 예였다.

조각은 주로 국전을 무대로 발표되었으나 58년 2회 ‘현대작가초대전’에 조각이 초대됨으로 인해 추상조각이 발표될 수 있는 무대가 만들어졌다. 60년대 중반에 이르자 추상조각이 대세를 형성하면서 국전에도 그 진출이 현저해졌다.
전쟁중 호국의 영웅을 기리는 사업이 활발히 추진되어 여러 지역에 동상이 건립되는데 이 가운데는 개인우상화에 해당된 것으로 4,19 이후 철거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52년 진해에 윤효중에 의한 이충무공동상이 건립된 것을 비롯해서 김경승의 부산, 통영의 이충무공동상, 윤효중에 의한 민충정공상, 이승만대통령상, 김경승의 안중건의사상, 맥아더장군상 등이 잇달아 세워졌다. 선열동상은 이후 60년대 군사정권에 의해 다시 체계적으로 건립되어지고 있다.


(1) 김영주 <미술인의 양식에 호소함> 신미술 2호 1956, 11
(2) 김영주 <신감각파의 집단> 조선일보 1957, 5, 31
(3) 위의 글
(4) 김영주 <화단과 그룹운동> 세계일보 1967, 6, 29
(5) 서성록 <전통의 파괴, 현대의 모험> 한국추상미술 40년 1997, 재원출판
(6) 이경성 <미의 전위부대> 연합신문 1958, 12, 8
(7) ‘현대미술가협회’ 창립전 카다로그
(8) 서성록 위의 글
(9) 아뚜엘전 카다로그 제3 선언 1962

-현대미술 100년전 (국립현대미술관) 카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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