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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예술과 민족의식

오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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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에 있어 민족의식의 배양은 먼저 서북지방 보편의 개화사상과 기독교 정신의 만연이란 상황적 배경에서 숙성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이 더욱 원숙한 양태로 영글기 시작한 것은 오산학교의 교육적 환경에서 말미암았다고 할 수 있다. 이중섭이 평양 종로보통학교를 나와 평양고보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그 길로 정주에 내려가 오산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아마도 이중섭이 평양고보에 무난히 진학하였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중섭은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보통학교 시절 이미 교내에서 그림하면 이중섭을 첫 손에 꼽을 정도로 이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미술의 길은 별 무리 없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예술 속에 연면 하는 민족의식의 발로는 기대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의 체질상 소박한 민족주의자는 되었을지 모르나 작품 속에 민족의식을 구현한 뛰어난 예술가는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민족적 의식이 교육을 통해 구현되어지고 있었던 오산학교의 환경이 이중섭으로 하여금 한 사람의 민족의식이 투철한 예술가로 새로 태어나게 한 배경이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다. 당시 오산학교에는 미국과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임용연이 미술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중섭이 한 사람의 예술가로 발돋움하는데 크게 영향을 끼친 이가 다름 아닌 임용연이었다는 사실은 민족의식의 구현에서 뿐 아니라 새로운 예술에 대한 열망을 심어준 데서 찾을 수 있다. 임용연은 새로운 예술의 길을 예비한 스승일 뿐 아니라 민족의식이 예술 속에 어떻게 구현되는가의 방법을 예시해보인 선각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그는 탄압되기 시작한 한글의 자모로 대담하게 추상적 컴퍼지션을 시도해 보임으로써 은연중 민족의식을 자극하였다. 감수성이 가징 예민한 연령의 이중섭이 이에 깊은 감명을 받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중섭이 오산학교를 나와 동경 유학의 길에 들어서 선택한 것이 문화학원이었다는 사실도 어쩌면 서북지방 특유의 개방적 분위기와 서구의 민주주의 사상에 대한 열망이 자연스레 일치된 데서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본다. 문화학원은 문부성의 지시나 간섭을 일체 받지 않았던 그야말로 개방적인 교육기관이었다. 이에 동조하는 자유주의 사상의 집안의 자제들이 많이 다녔던 것도 이 같은 학교의 분위기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중섭이 문화학원에 입학할 무렵엔 이미 김병기, 문학수, 유영국 등이 재학하고 있었다. 평양 종로보통학교 동기인 김병기가 2년 선배로 다니고 있었던 것은 이중섭이 한 동안 원산으로 이주한 형의 집에 머물면서 쉽게 진학이 이루어지지 않았던데 요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복자로 태어난 중섭은 위로 터울이 긴 형과 누나가 있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중섭은 자연 형을 부친처럼 어려워했고 형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던 청년 실업가로서 동생의 미술학교 지망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있다. 그 때만 하더라도 남아가 미술을 지망하게 되면 온 집안이 나서서 말렸다. 깡통 찰 환쟁이가 된다는 것을 마뜻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일찍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개화된 서북지방은 다른 지방에 비해 나은 편이었다. 해방 전 미술가의 분포는 서울 다음으로 평양이 가장 많았다.

이중섭이 입학한 문화학원은 프랑스에서 돌아온 전위적인 예술가 스다 세이슈가 있어 많은 학생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중섭을 두고 루오처럼 시커멓게 그리는 조선청년이 나타났다고 이중섭의 출현을 알릴 정도로 이중섭을 주목하였다. 세이슈를 중심으로 무라이 마사나리, 야마구치 훈 등에 의해 자유미술가협회가 출범하게 되는데 문화학원에 적을 두고 있었던 문학수, 유영국 등이 이 전시에 출품하였고 잇따라 이중섭도 참여하였다. 자유미술가협회가 출범하던 1937년은 일본의 전위미술이 어느 정점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 있었던 시점이기도 하다. 10년대에 싹터 나기 시작한 이른바 대정 데모크라시의 분위기가 그 마지막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던 형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분위기는 2,3년 사이에 급속한 하향 길로 접어든다. 주지하다시피 만주사변, 중국침략,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 일본 군국주의의 발로가 일체의 전위적인 미술 활동은 물론이려니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적 사상과 예술을 탄압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종내는 보국체제로 전환하여 시국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이 강요되었고 저들이 말하는 소위 성전의 완수를 위해 모든 예술가들을 옭아매는 상황으로 진전되었다. 뛰어난 미술가들이 전쟁기록화 제작에 투입되었고 자기 예술이념을 고집하는 화가들은 스스로 붓을 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유미술가협회란 명칭까지도 불온하다 하여 미술창작협회로 이름을 바꾸는 사태였다. 자유전에 참여하였던 한국인 화가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문학수 등은 서둘러 귀국하였고 이중섭은 전쟁 막바지인 44년에 원산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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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연대기는 대체로 다음의 세 시대로 구획될 수 있다. 동경시대, 원산시대, 월남이후가 그것인데 시대적으론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민족상잔의 비극적 상황이 이어진 시점에 해당된다. 동경시대는 문화학원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주로 자유전을 통해 활동하던 시기가 된다. 이중섭은 38년 자유전에 첫 출품한 이후로 43년 7회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출품하였다. 6회부터는 회우 자격으로 출품하였고 7회전엔 회원이 되었다. 당시 자유전에 출품된 작품은 남아있지 않다. 몇몇 작품만이 엽서나 미술잡지에 게재된 사진 도판으로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작품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유보될 수밖에 없다. 몇 점의 사진 도판과 주변의 증언을 토대로 개략적인 작품의 경향에 대해 언급할 따름이다.

주위의 증언에 따르면 이중섭은 초기부터 소를 모티프로 한 작품에 집중되었는데 다분히 설화적인 요소가 짙게 반영된 화풍이었다. 4회전의 출품작 <망월>은 풍경을 배경으로 누드의 여인이 길게 바닥에 누워 있는 뒤편으로 양과 새가 배치된 구도이다. 이중섭 작품에 나타나는 특징으로서 범신적인 요소가 이 작품에도 반영되고 있다. 인간과 동물, 또는 인간과 다른 사물이 대등한 관계로서 서로 어우러져 있는 설정은 만년에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5회의 <소와 소녀>는 새를 안고 있는 소녀의 옆으로 소가 고개를 내미는 설정이다. 앞선 작품과 마찬가지로 다분히 목가적인 분위기가 지배되고 있다. 7회의 <망월>은 둥근 달을 쳐다보는 소년과 소가 몽환적인 기운에 싸여 있는 다소 초현실적인 요소를 머금고 있는 작품이다. 이들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설화적, 초현실적 요소는 다분히 서구의 상징주의의 감화로 읽혀지며 한편, 30년대 한국 미술계에 풍미하던 향토적 소재주의에 대한 관심도 추적된다. 그의 주변에 있었던 미술가들의 회고에 의하면 “피카소와 같은 조형성과 루오의 선감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1)고도 하며 “중섭의 세계는 처음에는 피카소와 고갱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자국은 오래가지 않았다. ......중섭은 무엇보다도 고구려 벽화, 특히 강인한 선조와 원근감이 평면에서 처리된 고대 북방계통의 그림의 방법에서 그의 그림의 본질을 터득했다”(2)고도 한다. 이를 종합해보면 처음엔 피카소와 같은 분석적인 조형성에 탐닉되었다가 또 한 동안은 루오와 같은 굵고 강인한 표현에 경사되었던 내면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서 종내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엿볼 수 있는 강인한 북방적 선조와 평면화의 환원이란 자신의 고유한 방법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중섭이 태어난 곳인 평남 평원군은 옛 고구려와 낙랑의 고토로서 일찍이 고구려 벽화를 대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힘차게 달리는 선조와 퇴락한 색채감각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대로 겹쳐진다. 특히 50년대 그려진 앞으로 내딛는 흰 소의 모습은 고분 벽화 가운데 서벽을 채웠던 <백호도>를 연상케 하는 바가 적지 않다.

원산시대는 44년에서 50년에 이르는 시기이다. 해방과 동시에 분단 그리고 동란으로 이어진 격변의 시대에 해당되기도 한다. 원산시대의 이중섭의 행각은 그의 주변에 있었던 시인 구상, 화가 김영주, 화가 한묵 등의 증언에 의해 살펴볼 수 있다. 이 시기 이중섭은 문화학원 시절 사귀었던 일본인 여성 마사꼬와 극적인 해후를 통해 결혼에 이르게 되며 슬하에 두 아들을 두게 된다. 행복한 신혼생활로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시기였음에도 그의 예술가로서의 활동엔 많은 제약이 따랐으며 이로 인한 정신적 고통은 그를 떠나지 않았다. 소련군이 진주해온 북한 사회는 급속한 사회주의 사회로 정비되어 갔는데 예술가들에겐 언제나 선전 선동의 사회주의적 내용이 강요되었다.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던 이중섭에게 이 같은 목적의식의 작품이란 애초에 생리에 맞지 않은 것이었다. 자연히 이중섭의 위치는 부르주아 예술가로 낙인 되었으며 퇴폐적인 소재의 화가란 꼬리표가 따라 붙었다.

원산시대의 작품은 피난 보따리에 묻어온 몇 장의 드로잉 밖에 전하고 있지 않다. 주위의 증언에 의하면 동경시대의 연장으로 여전히 소를 소재로 한 작품이 주를 이루면서 닭, 새 같은 향토적 소재와 새롭게 아이들이 모티프로 등장되었다는 것이다. 갓 태어난 두 아이를 모델로 했음이 틀림없다.

월남해서는 제주 서귀포에 잠시 머물고는 부산, 통영, 왜관을 거처 만년엔 서울로 이어지고 있다. 월남이후 작고하기까지의 기간이란 고작 5,6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기는 피난살이의 신산함과 아울러 처자와의 생이별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단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이중섭이 남기고 있는 대부분의 작품은 이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구상은 그가 남긴 작품을 담배 은박지에 그린 드로잉을 빼고 약 300점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00점도 채 못 되고 있다. 이중섭에 대한 연구는 자연 이 마지막 시기인 50년에서 56년에 이르는 기간에 제작된 작품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소를 중심으로 한 향토적 소재는 이 시기에도 꾸준히 그려지고 있다. 여기에 새롭게 첨가된 것이라면 아이들을 모티프로 한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 전까지만 하더라도 소를 중심으로 한 향토적 주제에 일관되었다면 해방 후엔 향토적 주제와 더불어 아이들과 게와 물고기가 어우러진 해학적인 작품이 다수를 이루는 형국을 보인다. 특히 담배 은박지에 그린 드로잉은 단연 후자의 작품 군이 압도적이다. 전자의 소재가 민족의식과 깊게 관계된 것이라면 후자는 자전적인 요소가 강하게 지배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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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예술에 있어 민족의식은 먼저 작품의 주제와 내용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와 같은 의식은 그의 일상적 행동의 범주에서도 반영되어 나오고 있다. 동경시대부터 이중섭의 소를 소재화한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깊은 감명을 받았음을 전하고 있다. 미술창작협회 경성전(40년)을 보고 논평한 김환기의 다음의 언급에서도 소에 대한 작가의 편향적 의식을 만날 수 있다. “작품 거의 전부가 소를 취재했는데 침착한 색채의 계조, 정확한 데포름, 솔직한 이마주, 소박한 환희 - 좋은 소양을 가진 작가이다. 솟구쳐오는 소, 외치는 소, 세기의 운향을 듣는 것 같았다. 응시하는 소의 눈동자, 아름다운 애련이었다.”(3)

이중섭은 경성전 외에도 매 회 소를 다룬 작품을 출품하였다. 부인 마사꼬도 이중섭이 일본에 오기 전 중학시절부터 소를 그리기 시작하여 일본에서의 활동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소를 다루었노라고 회고하고 있다. 부인의 술회에 의하면 원산시대 들녘에 나가 소를 그리는데 얼마나 소를 노려보았으면 소 임자가 소도둑으로 몰았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동경시대에 이어 원산시대에도 소를 주로 그렸음을 엿볼 수 있다. 김환기의 논평 가운데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소의 이미지와 세기의 소리를 듣는 것 같다는 표현과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소의 눈동자는 단순한 대상으로서의 소가 아니라 자신의 심회와 시대적인 울분을 의탁한 매개로서의 존재임을 시사해 보인다. 이민족의 발아래 짓밟힌 우리민족의 슬픈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중섭에 있어 소는 민족 뿐 아니라 자신에 비유함으로써 민족과 자신이 부단히 동의의 개념으로 진전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가 피난살이 제주 서귀포의 헛간 방 벽에 붙여놓고 바라보았다는 자작 시 <소의 말>은 곧 자신의 염원을 소를 통해 구현해주고 있다.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남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현재 남아 있는 소 그림은 <흰 소><싸우는 소><황소> 외에 소와 다른 대상과의 어우러진 <소와 아이><소와 새와 게>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흰 소 계통과 싸우는 소 계통은 한결같이 격정에 휩싸여 있다. 싸우는 소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단독의 상도 앞으로 격렬하게 내닫는 동세에 지배되고 있다. 소의 머리만을 클로즈업 시킨 작품들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으로 다분히 의인화되어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소는 이중섭만이 그린 소재는 아니다. 적지 않은 한국의 화가들이 소를 그린바 있다. 향토적 소재의 작품 가운데에선 소가 가장 빈번히 등장된다. 소의 육중한 포름과 근육의 힘의 표상이 많은 화가들의 관심을 끌었음에서다. 또한 농경 사회에서 가장 친숙한 가축으로서의 소의 이미지가 보편화되어 있었음에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중섭이 그린 소와 다른 화가들이 그린 소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이중섭의 소가 단순한 표현의 매개가 아니라 의인화되고 인격화 단계에 도달되었음에서 찾을 수 있다.

이중섭이 어떻게 해서 소 그림에 집착했는가의 동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중학시절부터 소를 집중적으로 그렸다는 점은 오산학교 시절의 민족주의에 대한 감화가 소라는 대상을 매개로 구현되어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가 특히 흰 소를 많이 그렸다는 것은 소가 단순한 표현의 매개가 아니라 하나의 상징체계로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민족은 고래로 흰 옷을 즐겨 입는다고 하여 백의민족이라 일컬었다. 이중섭이 소를 희게 그렸다는 것은 흰 옷을 입고 있는 우리 민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에 다름아니다. 다른 화가들이 그린 소가 향토적 소재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지 못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이중섭의 흰 소는 민족의식으로 고양된 단계가 아닐 수 없다.

시인 구상은 이중섭의 격렬한 싸움의 소 그림을 두고 동족상잔의 비극적 내면을 담은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해방 전의 소 그림이 목가적인 분위기에 싸여 있거나 몽환적인 초현실적 상황에 놓여 있는 것에 비해 해방 이후의 소들은 한결같이 격정에 휩싸여 있거나 격렬한 대결의 장을 연출해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남기고 있는 소 그림 가운데 평화로운 장면으로 등장하는 예는 <길 떠나는 가족 1, 2>가 있으며 <소와 새와 게><소와 아이> 등 극히 한정된 몇 점이다. <길 떠나는 가족>은 소달구지에 실린 가족이 어딘가로 떠나는 장면을 묘출한 것이다. 앞에서 소를 끌고 있는 남정네는 이중섭 자신이고 달구지 위의 여인과 두 아이는 그의 부인과 두 아들이다. 편지지 위에다 드로잉한 것과 유화로 그린 작품이 두 점이다. 편지에는 “아빠가 엄마, 태성이, 태현이를 소달구지에 태우고 아빠가 앞에서 황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함께 가는 그림을 그렸다. 소달구지 위쪽은 구름이다”로 적혀 있다. 따뜻한 남쪽 나라로 향하는 이주는 그지없이 축복의 무드에 휩싸여 있다. 소달구지에 타고 있는 여인과 두 아이는 꽃을 뿌리는가 하면 비둘기를 날려 보내기도 한다. 소를 몰고 가는 남정네는 흥에 겨워 비스듬히 하늘로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다. 그 위로 노을에 물든 구름이 길게 깔린다. 따뜻한 남쪽 나라는 어디일까. 그가 피난시절 잠시 머문 서귀포일까 아니면 그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상상의 유토피아일까.

<소와 아이>와 <소와 새와 게>는 해학적인 요소가 짙은 작품들이다. 누워있는 황소의 뒷다리 사이로 들어가 장난을 걸고 있는 아이의 천진한 모습과 귀찮다는 듯이 엉거주춤 뒷다리를 올리고 있는 소의 표정이 대조를 이루면서 유쾌함을 증폭시킨다. <소와 새와 게>는 더욱 해학성이 짙다. 자고 있는 소의 뒷다리 사이로 들어간 게가 소의 불알을 무는 장면이다. 놀라는 소의 왕방울만한 눈과 고사리처럼 끝이 휘말린 꼬리의 모양은 상황의 긴박함을 알리고 있다. 충격적인 상황이 흥미롭게 반영되고 있다. 나이프로 안료를 미어부친 바탕 위에 연필선으로 단숨에 그려나간 드로잉이어서 그 즉흥적인 발상과 분방한 선획의 경쾌한 속도감이 단연 화면에 팽팽한 긴장감을 농축시키고 있다. 선을 타고 흐르는 힘의 리듬은 화면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상황에서 오는 긴장감의 폭발하는 단면의 묘출에 머물지 않고 그의 주제의식의 전환이란 상징적인 의미 항을 지니고 있다. 소로서 표상되던 민족의식이 게로 표상되는 자전적 내용으로 대체됨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자와의 별리 이후 이중섭의 작품의 중심은 아이들과 게와 물고기의 모티프로 이동하고 있다. 구상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더욱이나 그의 만년의 작품, 특히 은지화의 모티프는 거의가 가족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에 꽉차있어 그의 정황을 아는 사람으론 예술적 감상보다는 눈물이 앞설 지경이다” (4)

4
작품을 통한 민족의식의 구현 외에 이중섭의 일상의 단면에서도 민족의식의 투철함이 반영되어 나왔음을 그의 주변은 증언하고 있다. 이중섭과 평양 종로보통학교 동기이자 같은 문화학원에 다녔던 김병기는 남녀 학생들이 어우러진 행사 같은 데서 노래를 부를 기회가 주어지면 이중섭은 일본 학생들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오산학교에 배운 우리 말 노래를 힘차게 불렀다는 것이다. <소나무여 소나무여>와 <사자수 흐르는 물에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는가>란 노래를 특히 즐겨 불렀다는 것이다. 옆에 있던 김병기는 자신이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싶은 심정이었노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 말은 눌변이지만 노래는 잘 불렀으며 운동은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건장한 체격에 호남 형이어서 많은 일본의 여학생들이 흠모했을 것이라고 한다. 이중섭이 굳이 우리 말 노래를 고집한 것은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밴 민족의식의 자연스런 발로가 아닌가 본다.

처자를 일본에 보내고 난 후의 이중섭이 너무나 괴로워하는 것을 보다 못한 주변의 친구들이 어찌어찌 임시 선원증을 만들어주어 도항시켰는데 일주일 만에 되돌아와 한다는 소리가 일본의 빽빽한 산보다 우리의 민둥산이 더 좋아 돌아왔노라 했다는 것이다. 이중섭의 내면에 도사린 민족의식이 어떤 절박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자연스레 발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변의 친구들은 이중섭이 일본에 가 그 곳에서 자리 잡아 제대로 그림을 그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되돌아온 것은 단순한 현실적인 사정보다 남들은 전쟁의 어려움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데 자신 만이 그것을 피해왔다는 자격지심과 더불어 민족의 불행을 자신만이 외면할 수 없다는 의식의 발로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의식은 투철한 이념형이기보다 본능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병기는 이중섭의 민족의식은 서북지방 보편의 개방정신과 일제 강점에 저항하는 분위기에서 형성된 관념의 그것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아직 마르크스나 레닌 이해 이전에 있었다고 보며 체질적으로 그의 민족의식은 그러한 사회의식을 동반하지는 않았다”고 부연한다. 이 지적은 그의 민족의식이 이념적인 사회주의의 바탕과는 애초에 거리가 있는 그래서 더욱 소박한 관념의 그것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소박한 관념의 민족의식이 극적인 상황을 겪으면서 신화적인 체계로 영글었다는 것이다. “이중섭 예술에 나타나 있는 민족주의 혹은 상징주의 성향은 그의 바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아직 관념의 세계에 불과할지 모른다. 이것이 동족상잔이란 극한 상황의 장을 얻음으로 해서 관념이 하나의 감성이나 몸부림으로 압축되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의 관념은 새로운 시간 속에 하나의 신화의 모습으로 우리들 앞에 나타나고 있다”(5)고 한 김병기의 술회에 기대면 이중섭은 해방 전에는 관념으로서의 민족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동족상잔의 비극적 상황을 체험하면서 투철한 민족의식으로 고양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그린 일련의 소 그림에서 나타나는 의인화는 다름 아닌 관념의 영역에서 신화의 체계로 고양되는 이중섭 특유의 민족의식의 구현에 다름 아니라 할 수 있다.


(1) 김병기, <이중섭> 오광수 편, 17페이지, 시공사, 2000
(2) 김영주 <이 땅의 사람들>(뿌리깊은 나무) 1976, 3
(3) 김환기 <구하던 1년>(문장) 1940, 12
(4) 구상 <이중섭의 인품과 예술과>(이중섭작품집, 이중섭기념사업회, 1979
(5) 김병기 <친구 이중섭 이야기> 이중섭과 서귀포 세미나, 조선일보 주최, 2002

-오산학교 100주년 기념 세미나 주제 발표(2006 .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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