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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우 - 평면의 지각과 방법의 모색

오광수

평면의 지각과 방법의 모색
- 권영우의 작품세계에 대한 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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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우는 해방 후 제 1세대에 속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서울대학에 미술과가 개설되고 여기서 처음 수학한 이들을 해방 후 제 1세대라고 부르는데 박노수, 서세옥, 장운상, 박세원, 권영우가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은 해방공간에서 추구되었던 왜색탈피와 민족미술 건설이란 시대적 사명에 연루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한 이념적 색채가 이들의 생애와 작가로서의 방향에 주요한 인자로 작용했다는 사실은 결코 간과될 수 없을 것 같다.

왜색탈피란 무엇보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침윤된 몰선채화의 일본화풍을 극복한다는 것이다. 당시 동양화단에선 가장 절실한 당면 과제이지 않을 수 없었다. 1920년대 초에 출범한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는 조선인 서화가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에 체류하고 있었던 일본인 화가들도 참여했던 관전으로 전통적 양식의 산수화와 진채의 일본화가 동거할 수밖에 없었다. 동양화부란 명칭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주체성 말살을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라 전통적 양식의 작품과 일본화가 섞여있는 상황에서 고안해낸 대안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선전이 44년까지 지속되었으니까 한국인 화가들과 일본인 화가들의 동거가 20년 이상 이어진 셈이다. 전통적인 수묵산수에 비해 진채의 일본화가 현실에 바탕 둔 리얼리즘의 양식이어서 자연 감각적으로 관념적 산수를 앞질러 젊은 세대에겐 훨씬 진취적 방법으로 비치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화풍의 감염은 이 같은 제도적인 틀 안에서 진척되어갔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화숙이었던 김은호화실에서도 진채의 일본화풍이 적극적으로 구현되었다. 김기창과 장우성의 초기 작품들은 일본화풍이 진하게 반영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해방이 되고 미술대학이 열리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도 다름 아닌 이렇게 물든 일본화풍을 걷어내는 일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왜색탈피와 민족미술 건설이란 명제는 경중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서양화, 조각, 공예 등 미술 전 영역에 미친 것이었다. 그럼에도 유독 동양화 분야에서 이 문제가 심각했던 것은 상대적으로 동양화가 일본화로 인식되고 있었던 상황의 심각성 때문이다. 20년 이상 진척된 전통 산수와 진채의 일본화의 동거는 자연스럽게 감각적으로 우세했던 일본화 중심으로 기우러질 수밖에 없었다.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지도한 이는 근원 김용준과 월전 장우성이었다. 근원은 이미 해방 전부터 문인화의 세계를 추구한 작가이나 월전은 해방이 되면서 자신의 이전의 일본화풍을 적극적으로 탈피하고 새로운 모색기를 맞고 있다. 월전이 근원에게서 자극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의기투합해서 새로운 방법의 모색에 일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거나 근원과 월전은 서울대에서 동양화의 새로운 틀의 모색에 매진하였으며 그러한 분위기는 자연 이들에게서 배우는 후진들에게 이어졌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진채의 일본화풍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전통적 화법의 현대적 해석과 이의 방법적 모색이 병행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문인화풍의 선조의 강조와 담채에 의한 간명한 형식에 고답적인 관념이 아닌 현실세계의 취재가 가미됨으로써 격조와 리얼리즘을 동시에 획득할 수 있었지 않았나 본다. 현실적 모티프가 적극적으로 선택된 것은 현대회화가 지니어야할 리얼리티에 대한 자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새나라 건설이라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는 해방 후 제 1세대의 작가들이 지닌 의식은 근원과 월전으로부터 물러 받은 문인화의 선조 위주의 수묵 담채였지만 이들의 시도는 약간씩의 차이점을 들어내었다. 이념의 공통성 속에서 각자의 개성적인 방법이 모색되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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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우의 초기작에 해당되는 50년대의 일련의 작품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수묵 담채에 필선을 강조하는 경향이었다는 것이다. 같은 제 1세대의 작가들이 갖는 일반적인 방법의 공통성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진로는 각기 개성 있는 소재의 발굴과 혁신적인 모색으로 이어지고 있다. 권영우의 50년대와 60년대 초에 걸친 작품들이 현실적인 모티프와 구성력이 강한 특징을 들어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50년 작인 <검문소>는 군인 검문소를 취재한 것인데 극히 평범한 작품이면서도 안에서 밖으로 시각을 설정한 점이나 화면 가득히 대상이 밀집되어 있는 점은 그 독특한 구성력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50년대 중반 이후의 작품들에선 이 같은 구성력이 더욱 두드러지게 표상되고 있다. <조소실><화실별견><바닷가의 환상><섬으로 가는 길> 등은 간결하면서도 밀도 높은 구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이 가운데서 58년 국전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한 <바닷가의 환상>은 동양화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초현실적 요소가 가미된 작품으로 환시적인 설정과 더불어 시적 여운이 짙은 특징을 보인다. 50년대 후반의 작품으로 기억되는데 이번에 재 제작된 듯한 <섬으로 가는 길>은 <바닷가의 환상>에 잇는 작품으로 더욱 대담한 선조와 요약이 구성을 대신해주고 있다. <재즈 싱어>는 범속한 일상에서 취재된 내용으로 인물들의 간결한 묘출과 경쾌한 색채의 배합은 음악의 시각화에 상응되는 작품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현실적 모티프에서 벗어나 순수한 추상의 작품에 이른 것은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에 해당되는 시점이다. 어떤 계기에 의해 추상으로 진입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섬으로 가는 길>의 작품에서 엿보이는 대담한 생략과 압축은 추상으로의 추이를 충분히 암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구상적인 세계의 잔흔을 남기면서 점진적으로 변화해가는 전개의 과정은 엿볼 수 없다. 그의 추상적 패턴의 작품은 처음부터 화선지의 콜라주에서 출발되고 있다. 동양화의 기본적인 매재인 모필과 먹을 버리고 화선지를 화판에 콜라주해가는 순수한 종이 구성의 작품이다. 이는 동양화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전통적 방법을 일탈한 것에 다름 아니다. 붓과 먹 대신 종이와 풀과 칼이 도구의 전체로 대신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린다는 방법을 벗어나 만든다는 새로운 방법의 천착이 비롯된 것이다. 무엇을 그리느냐, 어떻게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구성해 갈 것인가 란 문제가 전면으로 나온 것이다.

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어진 작품들은 화선지를 화판에 발라 올리면서 채 물기가 가시기 전에 손으로나 또 다른 도구로 표면에 일정한 자국을 내는 것이다. 손가락으로 꾹 꾹 눌러 작은 구멍을 무수히 내는가 하면 주걱 칼로 부분 부분을 밀어 바탕을 드러나게 한다든지 일정한 방향으로 칼질을 가하여 찢겨진 자국을 그대로 들어나게 한다든지 하는 것이 그것이다. 때로는 부분적으로 색채를 가하여 변화를 시도하기도 하고 섬세한 칼자국으로 암시적인 선조의 구성을 시도해 보이기도 한다. 흰 종이가 주는 균질한 질감 위에 일정하게 가해지는 충격으로 인해 생겨난 구멍이나 뜯겨진 자국은 은밀한 내재율로 인해 잔잔한 여운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더없이 고요하면서도 탄력적인 상호견인으로 인해 화면 전체에 밀도를 더하고 있다.

이 일련의 작업들은 화면과 작가와의 조화로운 대결의 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백의 화선지 위에 가해지는 예리한 칼자국과 질서 있게 들어나는 흠집은 아직도 사람의 발자국이 가해지지 않은 눈 온 날 들녘을 가는 더없이 해맑은 인상에 비유되어진다. 그런가 하면 먼 과거의 풍경이 아련히 겹쳐지기도 한다. 새로 하얗게 바른 창호지문을 개구쟁이들이 손가락으로 퐁퐁 뚫은 장난의 흔적이 웃음과 더불어 우리들의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화면에 가하는 충격은 손가락 뿐 아니라 칼이나 또 다른 도구에 의해 북북 찢겨지기도 한다. 격렬한 동작이 지나간 흔적은 화면과 작가와의 대결이 갖는 투명한 의식을 은밀히 바닥으로 침잠시킨다. 그것은 평면에 대한 끊임없는 자각의 퇴적을 대신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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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화면은 몇 차례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예리한 칼자국에 의한 선의 반복적 직조와 부분적으로 색채를 가하는가 하면 화판에 여러 오브제를 부착하고 이 위를 화선지로 덮는 방법이 시도되고 있기도 한다. 부채, 번호판, 실 꾸러미, 숟가락, 낚시 바늘과 줄, 병, 지연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브제들이 등장한다. 그것들은 때로 하나의 개별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여러 개의 집단으로 등장한다. 마치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어 화면 전체를 일정한 패턴의 반복으로 채워가듯이 같은 유형의 오브제들이 화면을 채운다. 화면은 이들 오브제의 두께로 인해 반 입체적인 평면이 된다. 평면에 대한 자각은 평면의 한계를 부단히 일탈 하려는 의지로 인해 또 하나의 긴장을 유도하고 있는 인상이다. 실지로 90년대의 몇 몇 작품은 입체적인 오브제의 구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평면에 대한 지각은 입체화란 단계에 이르면서 더욱 강인한 평면의 인식을 낳고 있다고 할까.

극히 최근작에 속하는 2000년대의 일련의 작품들은 다시 평면에로의 회귀현상을 강하게 들어내고 있다. 캔버스 천위에 일정한 이미지의 도형을 콜라주해 간다. 화판에 흰 화선지를 발라 올리고는 이 위에 여러 충격을 가하여 변화하는 패턴을 유도한 초기의 작품들이 갖는 해맑은 바탕이 캔버스의 천으로 대신 되면서 이미지를 한결 선명히 부각시키는 방법은 그것이 간결한 만큼 표백된 의식의 구현을 대신한다.

표면과 행위가 만드는 긴장감이 팽배했던 초기의 작품에서 부분적으로 색채를 가함으로서 풍부한 구성의 내연을 진작시킬 수 있었던 80년대의 작품을 거처 오브제의 부착을 통해 한결 입체화된 90년대의 일련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권영우의 작품의 편력은 평면에 대한 지각에서 점차 그것의 한계에 도달하려는 의지의 표상을 드러내면서도 종국엔 다시 평면의 강한 인식을 동반한 간명한 이미지의 콜라주로 귀착되고 있는 도정을 보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변화 없음에서 변화를 추구해온 그의 부단한 실험의지는 그의 작품을 내면적으로 더욱 풍성히 가꾸어준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의 화면은 동양화니 서양화니 하는 장르상의 구획에서 벗어나 일찍이 보편적 회화의 영역을 추구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실험은 처음부터 방법적인 탐구로부터 시작될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평면에 대한 투철한 인식의 전개에 다름 아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그가 도달한 지점은 화면은 평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회화는 종내는 평면을 지각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의 발견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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