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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 채색계열의 계보

오광수

채색의 맥
- 한국화의 채색계열의 계보를 추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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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란 말은 회와 화로 이루어진 두 개의 방법을 가리킨다. 회란 칠한다는 개념이며, 화란 그린다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회화라고 했을 때는 칠한다는 것과 그린다는 것이 함축되어 있음을 말한다. 칠한다는 것은 채색을 발라 올리는 것이고 그린다는 것은 사물의 외관을 떠내거나 어떤 형태를 파악할 때 구사되는 드로잉을 말하는 것이다. 동양의 그림이 오랫동안 화에 치중되어왔다면 서양의 그림은 채색을 중점적으로 한 칠하는 방법이 중심을 이루어왔다. 그래서 동양의 그림은 드로잉의 성격이 강하다고 하고 서양의 그림은 채색에 의한 성향이 강하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동양의 그림에 채색이 완전히 무시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동양화를 남 북종으로 나누는 분류법에 따르면 북종화는 대상의 사실적인 묘파와 현실적 채색을 구사하는 것을 가리키며 남종화는 수묵을 중심으로 한 사의적인 성향의 그림을 가리키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채색에 의한 사실적인 그림보다 수묵에 의한 개념적, 사의적인 그림을 더욱 높게 평가한 것은 명말 동기창의 <상남폄북론>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동기창은 역대의 화가들을 두 개의 유파로 분류하고 정비하였는데 기술적인 북종화보다 정신적 격조를 추구한 남종화를 우위에 두었다. 말하자면 장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북종화 계열보다 시인, 묵객들에 의해 구사되는 남종화 계열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문인 사대부에 의해 구사된 남종화를 높이 평가한 것은 동양 특유의 정신문화와 깊게 연계된다고 볼 수 있다. 채색화보다 수묵화를 우위에 둘려는 관념은 이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조선조 후기는 명, 청의 영향을 받아 남화를 높이 받드는 사조가 팽배하여 채색을 위주로 한 북종화의 명맥이 크게 위축되기도 했다. 그러나 장식적인 북종화의 수용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현재 남아있는 창덕궁의 벽화는 북종화의 근대기 대표적인 작품으로 북종화의 전통이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

채색화에 대한 폄하 현상은 해방 후 이른바 왜색탈피란 시의적인 명제에 의해 다시금 두드러지게 표상된다. 문화 전반에 걸친 왜색탈피는 절실한 시대적 이슈였든바 그 가운데서도 동양화에서의 그것은 더욱 구체적인 대상으로 도마에 올려진 것이 되었다. 20년대 초반에 문을 연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의 동양화부는 전통적인 수묵산수 계열 뿐 아니라 진채의 일본화도 동거하는 형국을 띠었다. 선전이 끝날 때까지 동양화부는 오히려 일본화 계통이 더욱 강세를 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같은 상황은 전통 산수계열의 위축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일본적 감성의 침투를 막을 수 없었다. 자연적으로 채색화는 일본화로 대변되었으며 그와 같은 상황이 20년 넘게 지속된 것이었다. 당시 일본화의 채색화가 준 뛰어난 감각은 수묵 산수계열의 전통회화를 압도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여기에다 당시 도제교육을 제외한 동양화 지망생들이 찾아간 곳이 일본의 미술학교 일본화과였다는 사실이 일본화의 영향이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배경이 되었다는 점을 말해 준다. 해방 후 왜색탈피의 명분이 유독 동양화에 그 절실성을 띠게 된 저간의 사정이 이로서 파악된다. 물론 서양화나 조각 및 공예 등에 걸친 광범한 영역에서의 일본적 감성의 침윤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당시 왜색 방법으로 지적된 것은 몰선채화에 도안풍으로 요약되었다. 여기에 곁들여 동 서양화 전체에 해당되는 몽롱체 기법이 일본화의 대표적인 기법으로 지적되었다. 몰선채화란 선을 지우고 채색을 중점적으로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선의 개념은 면과 면을 구획지우는 경계선에 불과했다. 선이 갖는 본래적인 가치가 지워진 채 윤곽선으로 남아난 것이었다. 북종화에선 채색이 중심이 되면서도 준법을 중요시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근대기 대표적인 채색화가인 김은호는 북화풍의 견고한 구성과 치밀한 묘법을 구사해보였으나 30년대 이후엔 일본화에 경사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인물을 제외한 일련의 산수화에서도 몽롱체 기법을 구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일본에서 수학한 이영일은 선전을 통해 각광을 받은 작가였으나 내용에 있어 향토색 짙은 모티프에도 불구하고 형식에 있어 일본화의 화풍을 지향한 대표적인 경우로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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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왜색탈피와 민족미술 건설은 전체 미술가들에게 지워진 과제였다. 일본적 감성을 걷어내는 일은 작가 개별에서도 절실한 문제였으나 교육 현장에선 더욱 절실한 것이지 아닐 수 없었다. 새롭게 문을 연 미술 아카데미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세계의 모색은 무엇보다 중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서울대와 이화여대가 문을 열고 이어서 홍익대가 개강하면서 우리 손에 의한 미술가 양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서울대는 김용준, 장우성이 교수로 초빙되면서 이들의 감화에 의한 동양화의 방향이 모색되기에 이른다. 김용준은 30년대부터 수묵 담채에 의한 문인화적인 방법에 심취되었으며 이론에 있어서도 격조와 아취를 높이 사는 남종 문인화에 경사되어 있었다. 장우성은 해방 직후 일본화의 영향을 탈피하여 선조 중심의 수묵 담채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장우성의 수묵 담채풍의 남종 문인화에의 경사는 김용준의 감화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거나 이들에 의한 수묵 중심의 화풍은 자연스럽게 서울대 동양화과의 전통으로 맥락되기에 이른다. 이들에 이은 박노수, 서세옥, 신영상, 정탁영, 이종상이 전통을 무리 없이 계승시켰다. 서울대 출신 가운데 채색 계열이 찾아보기 힘든 것은 이처럼 오랜 수묵화의 전통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서울대에 비해 이화여대나 홍익대는 이렇다 할 구체적인 방향 모색이 드러나지 않고 있는 편이다. 50년대의 홍익대를 보면 동양화 교수진이 이상범, 김기창, 천경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각기 경향이 다를 뿐 아니라 개성이 강한 세 작가의 화풍은 자연 통일된 분위기를 조성하기엔 무리가 보인다. 60년대에 들어가면서 천경자, 조복순, 박생광으로 교수진이 새로 짜여 지자 그나마 채색화 중심의 화풍이 맥락을 이루는 듯 보였다. 그러나 서울대의 수묵 위주의 전통에 비하면 극히 일시적인 현상에 끝나고 있다. 뚜렷한 계보 형성엔 못 미치고 있는 편이다. 이화여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개인에 있어 왜색의 탈피와 새로운 방법의 모색은 두 가지 방향으로 구획해 볼 수 있다. 종전의 채색화를 완전히 벗어나 수묵 위주의 기법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경향이 그 하나요 채색화를 지속시키면서 이른바 일본적 감각을 내용과 새로운 채색 기법의 완숙을 통해 극복해나가는 경향이 또 하나다.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장우성, 김기창, 박래현이며,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천경자, 박생광이라고 할 수 있다.

채색 계열의 작가들 가운데 제 1세대에 속하는 천경자, 박생광은 일본에 유학한 작가들이다. 이들은 그 출발에서부터 일본화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편이다. 천경자는 40년대 일본 여자미술 전문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박생광은 30년대 초에 교토 회화전문을 다녔다. 천경자는 재학 시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입선하였으며 박생광 역시 조선미술전림회에 여러 차례 입선한 것 외에 신미술가협회전, 명랑미술협회전, 일본 미술원전 등 여러 전시에 참가하였다.

천경자는 같은 동경여자미술전문 출신인 박래현과는 달리 채색의 방법을 고수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다듬어나갔다. 소재에 있어 설화적, 문학적 요소가 짙은 내용성을 추구해나갔으며 안료를 두텁게 발라 올리는 기법 면에서 독창적인 세계를 열어보였다. 장식성이 농후한 일본화의 채색 기법과는 달리 육중한 안료의 단층을 시도하여 유화의 마티엘을 방불케 하였다. 안료의 물성은 내용을 앞질러 짙은 회화성을 표상해주었다. 50년대와 60년대를 통한 일련의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내용을 앞지른 색채의 향연은 회화의 자율성을 대변해준 것이라 할 만 하다. 당시 그의 작품은 장르상의 동양화란 굴레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입지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굳이 동양화니 서양화니 하는 구분이 통용될 수 없는 경지였다고 할까. 최순우는 그의 작품을 평하는 가운데서 동서양화를 구분하지 말고 그냥 회화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고 하였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그가 백양회를 탈퇴해서 서양화의 모더니스트들의 모임인 모던아트협회에 가담한 것도 이 같은 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70년대 이후 그의 활동은 남태평양과 아프리카 등 원생적 정서가 풍부한 지역으로의 스케치 여행으로 이어졌으며 여기서 목격한 이국적 풍경과 풍물을 화폭에 담는 등 이전의 작품들과는 다른 보다 구체적인 체험기를 구현해주었다. 무엇보다 풍부한 색채의 체험은 그의 색채화가로서의 내면을 풍요롭게 가꾸어준 것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박생광의 채색 기법은 천경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진채와 장식적 요소로 인해 일본화풍이란 오해를 오래도록 벗지 못했다. 해방 전 일본에서 수학했을 뿐 아니라 그곳 화단과의 인연은 70년대 한 동안 일본 체류를 통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독창적인 채색 기법과 그를 통한 새로운 회화세계의 추구는 그의 만년에 해당되는 70대 후반에 와서야 꽃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가 작고하기 전 5년쯤에 해당되는 짧은 기간에서였다. 이 점은 그 개인에게 있어서나 우리 미술 전체에 있어 실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일본화풍으로 오해받았던 지금까지의 화풍을 단번에 벗어났을 뿐 아니라 가장 독창적인 채색의 방법을 구사해준 것이 되었다. 정신적인 면에서는 전통회화의 뿌리를 민속에서 찾았으며 형식에 있어선 불화와 민화와 같은 고유한 회화 형식에서 그 모델을 발굴하였다. 그의 독창적인 채색화는 81년 백상기념관에서의 개인전을 통해 뚜렷하게 구현되기 시작했으며 이어지는 인도여행을 통한 불교유적의 답사는 그의 세계를 더욱 풍부한 종교적 영감으로 에워싼 것이 되었다. 무속화의 연작과 대작의 <명성황후><청담스님><전봉준>등은 그가 작고하기 2년 전에 완성한 것이었다. 구도에 있어 만다라세계를 연상케 하는 웅장한 상황의 전개와 굵은 윤곽선에 의한 대상의 파악은 화면에 팽팽한 긴장감을 유도해줌으로써 지금까지의 채색화가 지닌 장식적인 요소를 뛰어넘어 깊은 정신세계로의 길을 열어보였다. 민족 고유의 정감과 토착적인 색채의 구현은 전통의 재발견과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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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채를 구사하는 대표적인 작가로는 이숙자, 서정태, 김천영을 먼저 꼽을 수 있다. 서정태를 제외한 이숙자, 김천영은 홍대 출신으로 천경자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다. 서정태는 중앙대 출신으로 오랫동안 중대에 몸담아 있었던 오태학의 계보에 속하지만 작품상에선 뚜렷한 영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숙자는 여성 특유의 감수성이 짙은 소재의 탐구에 매진하였으며 종내는 보리밭이란 향토적 정감이 강하게 표상되는 세계에 도달하였다. 보리밭과 보리밭 속의 이브의 설정은 원시적 에로티시즘을 구현한 것으로 풋풋한 정감과 더불어 채색이 지니는 독특한 리얼리즘에로 진행되었다. 보리 이삭의 실체화는 회화와 현실세계의 경계를 부단히 뛰어넘는 것으로 만장과 같은 천을 화면에 직접 가져오는 방법의 신장도 여기에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김천영은 70년대 일련의 극사실주의와 연계되면서 극명한 채색과 투명한 사물의 묘출로 인해 시적 여운이 짙은 작품을 구사하였다. 그와 유사한 채색 기법을 구사한 작가들이 몇 몇 있었지만 계속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서정태는 내용면에서 독특한 상황의식을 구가해보였다. 극도로 왜곡된 인체의 묘출은 시니칼한 비판적 요소를 동반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유도해내었다. 중대 출신 가운데 비판적 요소와 상황의식을 짙게 구현하는 작풍이 하나의 계보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다분히 그의 영향이 아닌가 보인다.

오태학은 굳이 채색화로 분류하기엔 애매함이 있다. 수묵과 채색을 혼용하고 있는 편이며 채색 기법에 있어선 벽화의 감화가 짙게 반영된다. 그는 홍대에서 천경자보다는 김기창의 영향을 많이 받은 편으로 대담한 구성과 스케일 감각면에서 특히 그렇다. 벽화에 대한 화면 구성과 스케일 및 육중하면서도 퇴락한 채감은 김근중, 김선두로 이어진다. 김근중은 벽화가 지니는 독특한 질감의 수법을 구사하였으며 원시적 도상과 상징적인 기호를 통해 신비로운 고대 회화의 원형에 다가가고자 하였다. 김선두의 화면에서도 벽화적인 스케일과 고졸한 미의식을 드러낸다. 그가 다루는 내용은 극히 일상적인 생활 주변에서 온 것이지만 그것들이 설화적 체계를 획득함으로써 어떤 극적인 상황으로 진전된다. 들풀, 황토길, 푸른 들녘 등 그가 나고 자란 남도의 풍물이 간단없이 명멸함으로써 짙은 풍토성을 구현해보이기도 한다.

적지 않은 한국화 계열의 작가들이 전통계승과 현대화로의 변혁이란 명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정종미의 채색의 방법도 전통적인 기법으로서의 채색의 명맥을 탐색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불화의 채색 기법과 잃어버린 고유한 염료의 개발이 그의 조형적 관심의 중심을 이룬다. 천연 염료의 기법적 재현은 단순한 회화의 영역을 넘어 고유한 채색과 그 채색이 지닌 정감의 발견이란 보다 종합적인 차원으로 진행된다. 서울대 출신이면서 채색화로 분류된 작가로는 정종미 외에 민경갑이 있다. 민경갑은 원래 채색에서 출발한 작가는 아니다. 그는 초기 묵림회 회원으로 가담하면서 수묵의 방법을 구사하였다. 그가 채색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 역시 수묵과 채색을 병용해온 적지 않은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채색 기법은 다분히 수묵의 구현을 방불케 하는 점이 적지 않다. 다시 말하면 선염의 기법으로서 채색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김보희의 화면에서도 채색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그 기법은 수묵 선염의 은은한 여운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최근작들은 자연을 거대한 매스로 파악하는 독특한 형태 해석을 동반한다. 마치 서서히 물들여지는 염색의 그것에 비유됨직한 기법의 구사는 색채자체를 시적인 여운으로 변형시킨다. 이화대학에서도 채색 계통의 작가들이 적지 않게 배출되었지만 계보를 형성할 만큼 뚜렷한 면모는 찾아볼 수 없다.

한국화에서의 계보의 추적은 특히 채색화의 맥락의 추적은 난감하고 당혹스러운 작업이 아닐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였다. 몇 몇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채색계통의 작가들이 개별적인 작업으로서 채색을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어도 서울대의 수묵 계통의 작업이 보다 뚜렷한 계보를 형성해주는 만큼 채색화에서 이에 견줄 만한 계보를 만나기는 어렵다는 사실이다. 60, 70년대를 통해 어느 정도 형성되어 가던 홍대에서의 채색의 계보는 겨우 몇 몇 작가에 머물 뿐 뚜렷한 맥락을 잇지 못하고 있는 편이다.

- 한국화 1953~2007전, 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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