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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서양화 도입 100년

오광수

올해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이 서양화를 배우기 위해 일본유학의 길에 오른 (1909)때로부터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다. 서양화가 도입된 이후 한 세기를 맞은 셈이다. 고희동이 전에몇몇 서양인 화가들 이 한반도를 거쳐가면서 당시의 풍물과 풍경을 서양화풍으로 남기기도 했으나 한국인의 손에 의해 서양화가 그려지기는 고희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고희동은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을 글로 남기고 있다. “나라 잃은 슬픔을 그림이나 그리면서 주국(酒國)에 빠지겠다”는 대목과 “처음 전통회화를 배우기 위해 당대의 대가인 안중식, 조석진의 문하에 입문했으나 지나친 형식적 방법에 환멸을 느꼈다”는 구절은 고희동이서양화를 배우기 위해 도일을 작심하는 결정적인 동인을 전해주고있다. 선각자의 길은 외롭고 고될수 밖에 없었음은 그가 동경에 갔을때나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을때 자신이 처한 상황을 통해 현실감 있게 피력해 주고있다. 동경유학생들 사이에서 우리가 지금 그림이나 그리게 되었느냐는 비방과 질책은 나라 잃은 사람들이 직면한 시급한 현실적 책무로선 그림이란 너무도 한가롭고도 한심스런 일로 치부되었음을 실감시킨다. 거기다 돌아와 사생이라도 나가게 되면 “고약 같기도하고 닭똥 같기도 한” 안료를 천(캔버스)에 처바르는 짓을 하기 위해 동경유학까지 갔느냐는 힐난을 서슴치 않는 일반인들의 서양화에 대한 무지에 직면해서는 그가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는가를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가귀국해서 10년만에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전향하게된 결정적 동인이 이같은 서양화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 있었지 않았나본다. 어떤 이유에서건 최초의 서양화 지망생이 서양화를 끝까지 지속하지 못했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뿐이랴. 2호, 3호라 할 수 있는 김관호, 김찬영 역시 서양화를 지속하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 서양화역사에 있어 비극적 사안이 아닐 수 없다. 기반을 놓아야 할 사람들이 자기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는 것은 기초의 부실이라는 우리 근대미술, 또는 서양화의 발전적 맥락에 있어 치명적 결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서양화는 꾸준한 명맥을 이어오면서 자기 위상을 다져왔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주로 일본에 유학했던 서양화 지망생들이 수학했던 것은 일본적 감성에 물든 서양화였으며 해방후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새로운 세대를 통한 혁신적 방법의 모색은 우리 독자적의 서양화의 길을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50년대 후반부터 세계로 향한 우리 미술문화의 진출은 동란을 통해 피폐화된 우리의 비극적인 양상과는 다른 놀라운 반향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미술가들의 치열한 의식과 새로움에 대한 열망이 비례되지 않는 현상을 능히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양화가 언제나 밖에서 오는 외래양식이란 본원적 인식을 서서히 지워나가면서 우리나름의 서양화란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최근에 해당된다. 언젠가 한 원로화가가 자신은 서양화가가 아니라 한국화가다란 주장을 하는 것을 감동적으로 경청한 적이 있다. 서양화 매체를 다루는 화가를 통상적으로 서양화가라고 불렀고 그의 이름에 붙는 명칭으로 통용되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직도 일부에선- 이렇게 주장하는것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서양화 매체로 작업을 하니까 서양화가, 동양화 매체로 그리니까 동양화가란 말은 자연스럽게 들린다. 그러나, 자신은 서양화가가 아니라 한국화가라고 주장한 한 원로의 주장은 자신은 한국인이니까 자기가 그리는 것은 당연히 한국화일 수 밖에 없다는 논리에 준거한다. 이 말이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은 ‘서양화가 이젠 단순한 외래양식이 아니다’란 의식이 우리 속에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음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주장을 더욱 천착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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