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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과 이중섭

오광수

1.
통영과 이중섭에 얽힌 그럴듯하게 꾸며진 이야기하나. 2003년 초쯤으로 기억된다.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시절이다. 모처에서 걸려온 전화. 내용인즉 이중섭화백의 작품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좀 봐줄 수가 없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빅뉴스다. 그런데 아무래도 미심적은 것은 이중섭의 작품이 어디에 그렇게 무더기로 남겨졌을까였다. 한 두점의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으나 수백점이나 무더기로 나왔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작품의 진위를 알아보기 위해선 한국미술감정연구소로 가야지 왜 내게 먼저 봐달라는 것이냐고 했더니 감정연구소는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답변이었다. 의심을 더욱 부추기는 단서다. 확실한 믿음이 간다면 왜 감정연구소에 맡기지 못한단 말인가. 공식적인 기관을 의심하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은밀한 계획이 추진되고 있는 중이어서 공식적으로 밝힐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나는 현재 공직에 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감정을 볼 수가 없다고 완곡하게 거절의 뜻을 전했다. 그런데 몇 시간 후에 한 초로의 신사가 보따리 하나를 들고 사무실로 찾아온 것이 아닌가. 과천 현대미술관까지 찾아왔으니 박절하게 물리칠 수도 없고 해서 이왕 가져 왔으니 어디 물건이나 한번 구경하자고 했다. 문헌학자로 자신을 소개한 이 초로의 신사가 보여준 것은 30년대에 발간된 책자인데, 책의 표지이면과 내표지 그리고 여기저기 내부의 여백에다 이중섭이 그렸다는 그림이 열점 가까이 들어있었다. 그의 행색이나 거동으로 보아선 위작을 만들만한 그런 위인은 못되는 것 같았는데, 한장한장 들춰본 그림인즉 B급 수준의 위작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감정의 불문율 하나가 절대 감정의뢰인 앞에서 가짜라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피해라는 것이다. 잔뜩 기대를 갖고 온 의뢰인에게 이거 가짜요 했다가는 어떤 소동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는 가짜라는 말 대신 완곡하게 그냥 소장하고 있어라느니, 어디 딴 데로 한번 감정을 받아보라느니 해서 자신이 없다는 겸양의 인사로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해야 한다. 이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냥 보는 것이지 감정을 할 수 없다고 먼저 못 박아두고 그가 말하는 수백점(갖고 온 것은 그 일부)의 이중섭이 어디서 나왔느냐고 물어보았다. 대개의 가짜는 그럴듯한 이야기로 포장되어 있는 것이 통례다. 진짜라면 많은 수식이 필요치 않다. 하기야 작품의 진위를 따질 때 가장 주요한 항목이 출처다. 그리고 작품의 소장경로다. 누가 먼저 소장했으며 어떤 경로로 해서 현재의 소장가에게 이르렀느냐의 분명한 루트가 진위를 판별하는데 중요한 참고 단서가 된다. 의뢰인이 밝힌 이야기인즉 자못 흥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부산피난 시절인 50년대 초 이중섭은 통영에 와있었던 유강열(공예가, 판화가, 홍대교수역임)의 권유로 한때 통영에 들려 머문 적이 있는데 이때 한 전쟁미망인과 내연의 관계가 되어 그 여인을 위해 많은 그림을 주었다는 것이다. 오랜 훗날, 그 여인의 딸이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보니 장에서 이중섭이 그린 드로잉류의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다. 이중섭과 통영과의 인연은 퍽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는데 이 틈을 비집고 그럴듯한 러브스토리가 끼어든 것이다. 일본에 떠나보낸 처자와의 재회를 꿈꾸며 초조해있었던 이중섭에게 한 여인과의 잠깐의 러브스토리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사랑의 증표가 아니라도 한때의 신산한 삶을 어루만져준 보답으로 그림을 그려주었을 것을 충분히 짐작할만하다.

어쩌자고 이중섭과 통영과의 관계속에 이런 이야기가 끼어들었을까. 내 생각으론, 피난시절 이중섭에게 있어선 통영에서의 한때가 가장 심신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보는 것이다. 비록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현실에 적응해가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드라마가 끼어들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하다. 부산에서 느끼는 전쟁의 긴박함과 상황의 어수선함에서 벗어나 그지없이 평화로운 항구도시에서 심신의 안정감을 찾아갈 때 한 여인과의 인연이 끼어듬도 어색치는 않지 않은가.

이 가짜의 수백 점은 몇 년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희대의 위작사건으로 판정된바 있다. <통영과 이중섭>이란 글을 쓰자니 먼저 이 사건이 떠올라 그 내용을 적어본 것이다.
2.
이중섭의 작품가운데 십 수점 가까운 풍경소재의 작품이 있다. 그중 2,3점이 서귀포에서 제작된 것이고 나머지2, 3점이 왜관과 서울에서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중섭의 태반의 풍경 모티프는 통영에서 제작된 것임을 파악할 수 있다. 이중섭은 자연대상을 앞에 한 직설적인 묘사의 타입은 아니다. 분류한다면, 이중섭은 구성위주의 화가다. 소나 닭이나 가족과 같은 소재를 다루어도 직설적으로 묘파하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퇴고를 거쳐 도달된 양식화가 그의 작품의 경로다. 이 같은 양식화의 경로는 필연적으로 많은 드로잉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이중섭의 작품 속에 차지하는 드로잉의 편수가 엄청나다는 사실도 이와 연관된다. 무엇보다 은지화는 그 대표적인 항목이다.

이중섭이 통영에 머물렀을 때 주로 그린 것이 자연을 앞에 한 풍경화였다는 점은 이중섭 본래의 영역에선 약간 벗어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을 앞에 하고 그린다는 것은 자연에 대한 감동의 기록이랄 수 있다. 일련의 통영풍경은 통영이란 지역이 주는 풍광이 이중섭으로 하여금 감동을 자아내게 하였음을 말해준다. 잠시나마 현실의 긴박함을 접고 자연속에 묻힐 수 있었다는 것은 작가에겐 더 없이 심신의 안정감을 회복해준 것으로 볼수 있다. 통영은 조선시대 수군통제부가 있었던, 오늘로 치면, 해군사령부가 있었던 군사기지였다. 그러기에 일찍이 문물이 성행했던 곳이다. 토속적인 공예품의 생산지로서도 오랜 전통을 지녔던 것도 이에 관계된다. 뿐이랴. 한려수도를 앞에 한 다도해의 풍광은 남쪽 지방가운데서도 가히 첫손에 꼽을수 있게 한다. 뛰어난 감각의 소유자인 이중섭이 이같은 자연 속에 어찌 빠지지 않았겠는가. 휴전이 성립되긴 했으나 여전히 전쟁의 분위기가 가시지 않았던 부산에 비해 그지없이 한가롭고 평화로운 항구도시의 분위기와 시골인심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잠시 잊게 하였을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풍경은 부담이 없는 화목이다. 인물이나 정물이 일정한 구도에 따른 화면구성이 요청되는 것과는 달리 시야에 들어오는 정경을 적절히 포착하는 것일뿐이다. 물론 이때의 그리는 장소(자리)란 것이 여간 까다롭게 작용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예컨대, 박고석의 적지 않은 쌍계사 앞 벚꽃길은 어느 정해진 자리가 아니면 붓을 들지 못했다는 사례가 좋은 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가 있고 자신이 바라보는 시각의 선호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긴 해도 인물이나 정물처럼 인위적인 배치의 번거러움이 없으니까 그만큼 부담이 가지 않기도 하다. 이중섭이 남기고 있는 풍경가운데는 비슷한 시점의 것이 두 점 정도 파악되는 외에는 거의가 다른 시점, 다른 장소에서 포착한 것들이다. 개인전이나 3인전 같은 (성림다방에서 열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음) 전시가 열렸던 것을 감안하면 적어도 30점 이상의 풍경화가 제작되지 않았을까 유추해보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그 반에도 못 미치는 숫자다. 풍경외에 그가 즐겨 다루었던 소, 닭, 아이들과 같은 모티프의 작품도 끼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풍경하면 통영을 연상할 만큼 풍경을 제작할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많은 풍경화가 없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먼저 그렸던 장소가 분명히 인지되는 것으로 <길><선착장을 내려다 본 풍경><통영 충렬사 풍경><세병관 풍경>이 있고 장소를 확인할 수 없는 것으로 <초가가 있는 풍경><복사꽃이 핀 마을><까치가 있는 풍경><통영 앞 바다>가 있다. <길>은 내항을 건너 남망산으로 오르는 산길을 가운데 하는 풍경으로, 내항의 이쪽 편 약간 언덕진 곳에서 그린 것이다. 화면에 나뭇가지가 삐죽삐죽 나온 것을 감안한다면 바로 해안이 아닌 언덕에서 그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작품은 <남망산으로 오르는길>이란 지명이 없어도 분명한 남망산으로 오르는 길을 그린 것이다. 그것이 풍경인 한 어떤 가감도 없이 정직하게 화면에 담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은 마치 의도적으로 구성한 듯한 인상을 준다. 먼저 수평과 수직이 교차하게 하고 다시 여기에 사선을 가미하여 화면은 그지 없는 짜임새를 획득하고 있다. 바라본 대안의 바다를 끼고 이어진 해안길이 수평선으로 바다와 육지를 가로지르고 있으며 화면의 3분의 1정도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어 한결 안정감을 주고 있다. 화면가운데 쯤에 산으로 오르는 언덕길이 수직으로 연장되면서 수평과 수직의 기본적인 축이 화면구성의 요체임을 파악하게 한다. 여기에 바다쪽으로 흘러내리는 산자락이 사선을 이루고 있어 수평과 수직에 변화를 첨가시킨다. 화면 상단에 나와 있는 나뭇가지들이 만드는 사선의 구성도 변화를 보태고 있다.

남망산으로 오르는 길은 지금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주변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통영사람이나 이곳을 오래전에 여행해본 사람들은 한눈에 남망산으로 오르는 언덕길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문화회관이 들어서 있을 뿐 아니라 야외조각장이 조성되어있다. 호수와 같은 잔잔한 내항의 바닷물빛과 산으로 오르는 황토길의 대비도 신선한 미감을 자극한다. 50년대 통영의 평화롭던 한 정경을 떠올려보게 한다.

<길>에서 시점을 약간 왼편으로 이동하면 <선착장을 내려다 본 풍경>이 된다. <길>에서 수평으로 이어졌던 내항을 따라 이어진 해안길이 세 갈래로 갈라지면서 뒤쪽의 해안풍경까지 화면에 들어오고 있다. <길>에 이어 뛰어난 시감이다. 원형은 어름풋이 짚어지지만 이곳도 많이 변했다. 그러나 바다의 물빛은 50년대나 지금이나 별다른 변화없이 잠겨드는 안온함을 전해준다. 이작품의 묘미는 세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 화면을 더없이 탄탄하게 조여주는 점일 것이다. 대담한 터치와 속도감 있는 진행이 화면의 밀도를 더 높이고 있는 점도 지나칠 수 없다.

장소가 분명한 또 하나의 풍경으로 <통영충렬사 풍경>이 있다. 언덕에 위치한 충렬사를 아래쪽에서 위로 향해 포착한 구도다. 사선으로 올려다보는 각도가 한결 긴장감을 자아낸다. 건물과 담과 계단의 구조물에 반영되는 양광이 퇴락한 시간의 누적을 음미케한다. <선착장을 내려다본 풍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풍경이 제작된 시점이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오는 때쯤이 아닌가 본다. 풍경속의 나무들이 한결같이 잎떨어진 나목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뭇가지들은 새잎을 틔울 듯 물이 올라오는 느낌이다. <복사꽃이 핀 마을>은 이미 복사꽃과 개나리가 피어있으며 <초가가 있는 풍경>에도 나뭇가지에 수액이 촉촉이 머금어진 모습을 엿볼수 있다.

풍경가운데 이채로운 것으로 <까치가 있는 풍경>과 <통영 앞바다>가 있다. 시야가 넓은, 그래서 풍경적 요인이 풍부한 정경이 아니라 풍경의 어느 단면을 클로즈업한 점에서 이채롭다. <까치가 있는 풍경>은 까치집을 향해 날아드는 까치를 소재로 한것이며, <통영앞바다>는 바다를 배경으로 이쪽의 마을의 집들과 엉킨 나무들을 화면 가득히 설정한 작품이다. 두 작품을 비슷한 장소에서 그리지 않았을까 본다.

<까치가 있는 풍경>은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급히 날라드는 까치의 모습이 시각적 충일을 자아낸다. 여기에 비해 <통영 앞바다>는 바다를 배경으로 얽힌 나뭇가지들을 속도감 있는 터치로 처리하고 있어 그 자체가 구성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통영을 소재로 한 풍경화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이 <세병관 풍경>이다. 어떻게 보면 싱겁기 짝이 없는 모티프라 할 수 있을듯하다. 세병관의 뒷벽과 기와지붕, 그리고 그 앞에 서있는 앙상한 나무 한 그루와 절구통이 전부이며 화면 오른쪽 위로 바다가 가까스로 점경된다. 대부분의 도판에선 이 부분이 짤려나가 있다. 전체의 풍경이 황토빛으로 마감되고 있어 벽과 땅과 기와지붕이 온통 같은 색조로 연결된 듯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주는 독특함은 간결함에서 오는 밀도다. 가운데 앙상한 나무한그루, 그 앞에 절구통, 그리고 세병관 건물의 통기창과 기와골이 가까스로 풍경적 요인으로 걷잡힐 뿐 도무지 풍경적 묘미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비어있는 듯하면서 꽉차있는 정경은 무언가 깊은 명상에로 이끌어 가는 힘이 있다. 풍경을 바라본다기보다 풍경 앞에 맞딱뜨려진 인상이다. 이 같은 상황은 보이는 피사체와 보는 주체가 상대적이지 않고 부단히 일체화되는 느낌을 자아낸다. 깊은 명상에로 이끄는 요인이 여기에 있다.
3.
이중섭의 피난이후 작고시까지의 약 6년에 걸친 행각은 부산, 제주서귀포, 부산, 통영, 대구, 왜관, 서울로 이어진다. 통영은 부산에 머물때이며 통영을 모티프로 풍경들이 제작된 것도 1953년 전후에 해당된다. 53년이면 휴전이 성립되고 부산으로 집결되었던 피난민들이 환도를 따라 서울로 이동하고 있을 무렵이다. 이중섭은 홀홀단신으로 쉽사리 서울로 옮길 처지도 못된채 부산, 통영, 대구로 전전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춘수의 이중섭 연작시에도 광복동, 남포동(부산), 서귀포(제주), 동호동, 한려수도, 남망산(통영) 동성동, 팔공산(대구) 등 지명이 빈번히 등장한다. 신산했던 당시의 이중섭의 상황이 현장감 있게 구현되고 있다. 부산과 통영이 등장하는 두 편의 시를 여기 소개해본다.

“광복동에서 만난 이중섭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뼘 한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내가 만난 이중섭)

“충무시 동호동
눈이 내린다.
옛날에 옛날에 하고 아내는 마냥
입술이 젖는다.
키 작은 아내의 넋은
키 작은 사철나무 어깨 위에 내린다.
밤에도 운다.
한려수도 남망산,
소리 내어 아침마다 아내는 가고
충무시 동호동
눈이 내린다. “(이중섭 5)

이중섭에 대한 시는 60점을 상회한다. “아마도 한 개인이 시인들로부터 집중적인 관심과 애정을 받음으로써 중요한 시적 대상으로 부상되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리 길지 않는 시간상의 거리를 두고 60점 이상의 작품이 그를 향해 씌여졌다는 사실은일면 기이하고도 놀랄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정효구-문화평론가) 고 할 정도로 독특한 예를 만들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김춘수의 이중섭 연작은 이 무렵(1953년 전후) 이중섭의 행각을 따라가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가장 장소성이 분명한 시작품이며 그럼으로써 이중섭이 처한 당시의 상황이 실감된다. 김춘수의 이중섭 연작시가 어떻게 쓰여졌는가를 엿들어보자.

“....나의 연작시 <이중섭> 은 이중섭의 그림 몇 폭을 염두에 두고 씌여졌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한 그의 전기적인 일면과 나 자신의 사적인 경험들이 어우러져 있다. 나는 그를 예술가로서 본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희귀한 자질의 인간으로서 보았다. 지리학적 속도와 변동의 시대에 있어서 그와 같은 인물은 하나의 기절일수도 있다. 개체로서 그는 그렇게 시달리고 버림당했는데도 그가 원천적으로 잃을 것은 한 개도 없다. 그는 퇴화된 그대로 문명의 생리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문명인인 나에게는 그 모습이 신기했다. <이중섭> 연작시는 시로서는 내가 추구하고 있는 지점에서 한발짝 물러서고 있다. 그에 대한 나의 호기심 때문에 그런 희생을 나로서는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아마도 김춘수외에, 그리고 60여 편에 달하는 시를 쓴 시인이외에 이중섭에 대한 시는 앞으로 계속 쓰여질 것이다. 그리고 통영과 이중섭에 대한, 아직도 미답의 부분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추진될 것이다.







① 시집 이중섭 / 1987/ 문학과 비평사
② 시집 이중섭 / 1987/ 문학과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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