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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작가전>과 한국화의 실험

오광수

1. <청년작가>전 출범의 배경과 의의

<청년작가>전은 국립현대미술관의 덕수궁 시절인 1981년에 처음 열리었다. 당시 미술관의 상황은 간판뿐으로 단순한 전시장 개념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60년대 후반 경복궁에서 간판을 내건 국립현대미술관은 70년에 들어오면서 덕수궁으로 이전하여 주로 <국전>을 위한 전시장으로서 그 기능을 다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국근대미술전>을 제외하곤 기획이라야 <동양화대전><서양화대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79년 내가 처음 계약직으로 전시과에 들어 갔을때도 학예직제가 없어 전문위원이란 타이틀을 사용했다. 행적직과 일부 기능직 외에 전문가가 한사람도 없는 실태였다. 그러니까 전시라는 것이 자문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전혀 기획의 의도가 없는 끌어모이기식 전시가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관장이었던 윤치오씨에게 모름지기 미술관이라면 상설전은 물론이고 1년을 통해 최소 몇 차례의 기획전을 가져야한다고 건의한바 있다. 윤치오관장이나 뒤이어온 윤탁 관장은 전문가인 나의 의견을 흔쾌히 수용하였으나 이에 따른 예산확보가 걸림돌이 되어 1년에 두어차례 기획전을 여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때 기획된 것이 <청년작가>전이었다.
<청년작가>전은 작가의 연령제한을 35세미만으로 하였다. 35세미만을 대상으로 한 전시는 이미 1950년대 후반<파리청년작가비엔날레>에서 시도된바 있다. 대체로 청년의 개념이 35세미만의 젊은 작가란 통념이 이때 성립되었다고 할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 개념이 처음 적용된 것은 1967년 <청년작가 연립전>이 아닌가 생각된다. 무동인, 신전, 오리진 등 세 개의 젊은 그룹이 연립전을 개최함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바 있었다.
35세 미만의 젊은 작가란 아직도 미완의 연령대이며 작품세계가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작가를 가리킨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부담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 청년작가비엔날레>가 기획되고 동시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 자체가 혁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의 <베니스 비엔날레><상파울로 비엔날레>가 이미 완성된 작가, 자기세계를 확고히 지닌 예술가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식의 권위주의를 지향한 반면, <파리청년작가비엔날레>는 그러한 권위주의에 도전하는 젊은 의식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도전의식은 말할나위도 없이 변혁과 실험이었다. 현대미술의 가치를 미의 완성에 두지 않고 끊임없는 모색에 둠으로써 가능성의 발굴이라는 테제를 표방한 것이었다.
67년에 열린 <청년작가연립전>역시 기존의 가치체계를 거부하고 새로운 미술질서를 꿈꾸는 젊은 작가들의 의기투합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국전>류의 아카데미즘과 제도적 미술권력에 도전하는 한편 앞선 선배들이 이루어놓았던 뜨거운 추상미술의 아성에서도 벗어날려는 대담한 시도들을 펼쳐보였다. 누보리얼리즘으로 명명되는 일상적 기물의 소재화, 옵티칼아트의 차가운 논리화, 행위로서의 표현형식을 추구함으로써 기존의 미학적 답습에서 벗어나 생경하지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바 있다. 한 시대를 접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기폭제가 되었다. 8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청년작가>전은 이상과 같은 젊은 예술의 실험정신과 정신적 맥락을 같이하면서 70년대를 통해 구현된 단색파의 미학에서 벗어날려는 젊은 의식을 대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청년작가전>은 기성작가들을 대상으로 해온 현대미술관의 제도적 관성을 깨고 대담하게 젊은 작가들을 초대함으로써 기존의 세대는 물론 젊은 세대에게도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 전시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한다는 의미외에 에폭메이킹의 기폭제 역할을 다하겠다는 상황적 의식을 강하게 표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단색파로 대변되는 현대미술의 포화상태를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실한 욕구를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전시는 어떤 주제, 어떤 통일된 색채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다양성속에서 가치의 공존을 모색하겠다는 의미를 다분히 내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개념예술에서 하이퍼리얼리즘까지 그 진폭이 넓었던 것도 이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강남미, 김아영, 김용익, 김용진, 김용철, 김장섭, 김창영, 김천영, 김태호, 김호석, 백철수, 이동엽, 이두식, 이윤희, 이청운, 장영숙, 정현주, 주태석, 지석철, 진옥선, 신옥주, 한운성 등 81년 1회전에 초대된 작가들의 면면을 보아도 그 다양성이 파악될 것이다. 전시 서문을 쓴 이일은 <청년작가전>의 의의를 이렇게 평가한바 있다.
“현대미술관은 국전, 기타의 정부행사의 대행기구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 자체적인 활동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요컨대 살아움직이는 화단의 전체적인 추세와 유리된 채 힘겨운 명목만을 이어온 것이다. 그나마 국립현대미술관이 화 단의 움직임과 맥을 같이 하면서 어떤 독자적인 이니셔티브를 취하게 된 것은 1978년 이래 해마다 정기적으로 꾸며지는 작고 작가 및 국내외의 원로 작가의 초대회고전과 더불어서가 아닌가 싶다. -중략- 이번에 새로 기획된 <청년작가> 전은 현대미술관의 면목을 과시하는 획기적인 전시회라 생각된다” (이일, 청년작 가전의 의미, 제1회청년작가전에 무쳐, 청년작가전 도록)

이일이 지적한 획기적인 전시라는 대목은 전시의 방법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지금까지의 초대전 형식이 1인당 1점내지 2점 정도의 작품으로 이루어진데 비해 <청년작가전>은 일정한 공간을 배분하여 거의 개인전 형식을 띄게끔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출품작품수는 1인당 7~10점에 이른 것이 되었다. 22명의 출품자가 덕수궁서관 전체를 매꾸었다고 생각해보라. <국전>이 열리든 전시장에 22명의 작가들 작품만으로 전시가 꾸며졌다는 사실이 당시로서는 대단한 파격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엔 누가 이장소에 초대될것인가가 젊은 작가들에겐 커다란 관심사가 되었든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청년작가전>은 격년제를 택했는데 작가선정의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매년 열린다는 것은 자칫 내용이 빈약해질 수 있을 것이란 예견하에서 비엔날레 형식을 채택한 것이다. 2회전인 83년전부터는 전문가에 의한 관장체제가 되면서 추진위원수가 늘어났다. 참여작가는 고영훈, 공옥심, 곽정명, 금누리, 김강용, 김관수, 김영순, 김응기, 김진관, 문범, 박광진, 박권수, 박윤서, 송윤희, 신산옥, 예유근, 이명미, 이석주, 이인화, 이철량, 임영길, 정경연, 조상현, 형진식, 홍춘주, 홍순철 등 1회보다 4명이 늘어난 26명이 초대되었다.
<청년작가전>에 이어 90년부터는 <젊은 모색>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지만 애초의 기획의도는 꾸준히 명맥되고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청년작가전>과 <젊은 모색>에 초대되었던 작가들 가운데는 중견으로 우뚝선 이들이 적지 않은 반면, 작품활동을 접은 이들도 없지 않다. 이미 작고한 작가도 있는가하면(박권수, 이윤희)창작에서 평론으로 전향한(김영순, 윤진섭, 윤익영)이들도 있다. 30년이란 세월속의 변화를 엿보게 한다.

2. 한국화의 실험

1회 <청년작가전>에서 15회의 <젊은 모색>에 이르는 약 30년의 세월은 전시내용에 있어서도 많은 격차를 보여주고 있다. <청년작가>시절인 80년대는 비교적 한국화, 사양화, 조각, 판화 등 장르개념이 뚜렷한 것에 비하면, 90년대에서 2000년대로 이어지는 시기는 점차 장르개념이 희박해지고 단순한 평면, 입체외에 미디어아트나 설치 작업이 증가하고 있어 이를 통한 시대적 미의식의 반영을 파악할 수 있다.
80년대 초반은 여러부면에서 변화의 기미가 포착된다. 무엇보다도 70년대 미술을 대변해준 개념예술이나 미니멀리즘에 대한 대안으로서 손의 회복이 강하게 주창된 점을 꼽을 수 있다. 그리지 않는 예술, 손의 상실에 대한 그리는 예술, 손의 복권이 소리높이 구가 되었다. 1회에서 3회에 이르는 81년에서 85년까지의 80년대 전반의 초대작가들 면면을 보면 개념예술이나 미니멀리즘이 겨우 몇몇인 반면, 하이퍼리얼리즘계열의 작가수가 눈에 띄게 많다는 점에서 시대적 미의식의 변모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창영, 김천영, 주태석, 지석철, 한운성, 고영훈, 김강용, 김진관, 이석주, 조상현 등 하이퍼리얼리즘의 대표적인 작가들이 망라되고 있다. 이들은 현재에도 극사실의 고전으로 회자되고 있는 터이다. 하이퍼리얼리즘이 아니어도 드로잉적인 요소가 짙은 작품들이 적지 않은 편이다. 드로잉의 재발견은 국제적인 추세로서 이른바 그리지 않는 예술에서 그리는 예술로의 일대 전환이 추구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린다는 것은 순수한 자동기술로서의 그리기와 대상 즉 이미지의 회복이란 두 경향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일련의 하이퍼리얼리즘이 대상의 회복이란 차원이라고 한다면, 분방한 서체적 추상이나 새로운 구상의 모색으로 지적될 수 있는 이미지의 작업이 역시 또 하나 대상의 회복으로 볼 수 있다. 80년대 전반, 민주화 운동과 연계된 민중미술도 이미지를 통한 사회적 비판, 메시지 전달이란 점이 두드러진 것으로 역시 이미지 회복의 맥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기의 회복과 더불어 특기해야할 사안은 수묵화에 대한 재발견이 이미지 회복과 더불어 80년대를 풍미했다는 사실이다. <수묵화대전>도 이 무렵에 열린 기획전으로 이를 통해 이른바 수묵화운동이 점화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지나칠 수 없다. 적지 않은 한국화계열의 작가들이 초대되고 있는 점과 <수묵화대전>의 기획은 침체된 한국화의 부흥을 의식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점차 높아지는 실험의 열기에서 떠밀려나는 한국화 영역의 젊은 작가들에게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전통적 회화양식의 현대적 모색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한국화 전영역에 걸쳐 피력하려는 의도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국화의 실험은 무엇보다도 재질에 대한 실험이 전제되지 않고는 안 된다는 사실의 확인과 한국화의 정신적 요체에 있어 수묵화가 지닌 조형적 가치의 재인식이 절실하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해방이후, 한국화는 몇 차례에 걸쳐 모색을 시도한바 있다. 왜색탈피와 민족미술건설이란 해방직후의 구호는 미술 전영역에 걸친 시대적 사명이었지만 특히 전통회화양식인 한국화에 있어 이 요청은 더욱 절실한 것이었다. 전통적 양식과 일본화가 동거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일본적 감성의 침윤이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심각했다는 사실이 절감되었기 때문이다. 몇몇 의식있는 한국화가들의 실험이 이 같은 시대적 요청에 부응된 것이었다. 김용준, 장우성이 수묵담채의 기조에 현실적 소재의 추구는 서울대를 통한 교육의 현장에서 실현되었고 그것의 뿌리가 다양한 결실을 가져왔다. 이응로의 대담한 묵법과 현실적 소재 역시 김용준, 장우성의 방법과 견인되면서도, 이응로가 수묵의 자동기술에 의지한 조형성에 치중된 반면, 김용준, 장우성은 격조 높은 문인화의 정신세계를 목표로 한데서 그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김기창, 박래현 부부가 보여준 실험은 대상의 해체와 재구성의 방법을 지향함으로써 입체파의 조형적 전개와 밀착된 것이었다.
60년대에 들어가면서 서울대출신들로 형성된 <묵림회>가 등장함으로써 또 하나의 실험적 국면을 맞았다. 이들은 김용준, 장우성의 영향을 받으면서 재질과 공간의 문제에 집착한 공통성을 보여주었다. 소재가 지워지면서 운필과 수묵재질이 만드는 분방한 표현의 자립성을 구가함으로써 서양화에서 풍미하고 있던 앵포르멜의 서정적, 표현적 추상과의 정신적 견인을 이룬 것이 되었다. 한국화에서의 비구상이란 말이 여기에 적응된 것이었다.
80년대에 일어난 수묵화운동은 <묵림회>를 중심으로 한 60년대의 한국화 실험에 이어 나타난 것으로 해방을 기점으로 하면 한국화에서 일어난 세 번째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 수묵화운동은 특정한 그룹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게릴라직이면서 융단폭격식의 잇따른 기획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데서 그 특이성을 발견할 수 있다. <청년작가전>에 초대된 김호석, 박윤서, 신산옥, 이철량, 안성금, 윤여환, 문봉선, 이윤호, 김선형, 김미순, 박인현, 이선우 등 주로 홍대출신들이 이 운동을 이끌었다.
6회(1990년)의 <젊은 모색>전이 한국화 중심으로 꾸며진 것은 아마도 한국화에 대한 집중적 조명을 가할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본다. 이때 초대된 작가는 강경구, 곽정명, 김미순, 김선두, 김선형, 김성은, 김성호, 김성희, 김은숙, 김호석, 김훈, 문봉선, 박성태, 박인현, 배성환, 사석원, 서도호, 성선옥, 신산옥, 심현희, 이만수, 이선우, 이승하, 이종목, 임정기, 정종미, 조순호, 저환, 차대영, 하철민, 허진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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