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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무의자(無衣子) 권옥연

오광수

오광수 미술칼럼(74)

무의자(無衣子) 권옥연 화백이 지난 12월 16일 기세(棄世)하셨다. 해방 전 세대의 작가들이 하나 둘 우리곁을 떠나고 있다. 우리의 근, 현대미술을 풍요롭게 가꾸어주었던 거장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면서 미술계는 더없이 적막해지는 느낌이다.

우리의 근, 현대미술을 시대별로 구획해보면 1910년대에서 3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습작기 내지 정착기로 분류해본다면 30년대에서 45년까지는 조형을 통한 이념의 시대 즉 다양한 개성의 시대로 부를 수 있다. 우리미술에 있어 모더니즘도 이 시대를 통해 등장하였다. 후기인상파에서 입체, 미래, 추상, 초현실 등의 난만한 이즘이 관념적 인상주의의 아카데미즘의 풍토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권옥연은 일본유학의 마지막 세대로 그 역시 이 같은 새로운 물결에 감화를 받았다. 그의 데뷔기의 작품은 후기인상파의 고갱의 영향이 짙은 것이었다. 내용에 있어선 향토적 소재주의를 지향하였다. 30년대 미술계를 풍미한 향토적 소재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독자한 자기 스타일을 확립해간 것은 56년 도불 이후이다. 동란이 끝날 무렵인 53년부터 60년대 초까지 적지 않은 미술가들이 파리로 향하였다. 해방과 동란을 거치면서 극도로 위축된 창작에의 열망을 파리진출을 통하여 다시 꽃피워 보려는 기운이 그 어느 때보다 점고되었다. 대표적인 중견 작가들 - 남관, 김흥수, 이성자, 김환기, 박영선, 이세득, 김종하, 함대정, 장두건, 변종하, 손동진, 이응노, 문신, 한묵 - 이 이 시기에 파리로 진출하였다.

국제미술의 중심지(당시만 하더라도 파리는 명색이 국제미술의 메카로 인식되었다)에서 자신을 새롭게 가다듬으려는 의욕에서 기인된 것이었다. 50년대 초반에서 60년대 초에 걸친 시간대에 유독 도불전이니 귀국전이니 하는 전시유형이 많이 눈에 띄는것도 이에 연유함이다. 되돌아보면 이들의 파리진출과 그곳에서 체득된 국제적 감각과 자기세계의 과감한 변신은 한국미술의 촌스러움을 벗게 한 계기가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권옥연 화백은 당시 파리화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뜨거운 추상미술 - 앵포르멜 - 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초현실주의에 깊은 감화를 받았으며 초현실주의 초대전에도 출품하였다. 이점에 있어 그의 세계는 초현실주의의 유산이 빈곤한 한국화단에 이채로움과 더불어 신선함을 안겨준 것이 되었다. 그의 세계는 일반적으로 추상미술로 분류되지만 엄격히 따지면 초현실적 요소가 훨씬 풍부하게 잠재되어 있는 편이다. 편의적으로 명명한다면 초현실적 추상미술, 또는 추상적 초현실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작품 속에 내장된 민족적 감성
화면에 뚜렷하게 표상되는 현상은 있지만 그것이 현실의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풍부한 연상작용을 일으키는 신비한 내면을 지닌 것이었다. 때로는 신라 토기의 어떤 부분을 클로즈업 한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고려시대 범종의 육중한 표면의 어느 단면을 떠올리게도 한다. 또는 조선백자나 조선 목기의 소박하면서도 정갈한 조형세계의 정신에로 가닿는다. 이것들을 아우르는 민족적 감성이야말로 그의 예술의안의 풍경이 아닌가 생각된다. 청회색의 고도로 억제된 색조와 금선의 고저와 같이 흐르는 섬세한 선조는 그가 태어난 지방(함경남도 함흥)의 북방적 정서의 애잔하면서도 한편 강인한 내면의 표상이 아닐까. 그의 예술 속에 풍부히 내장된 민족적 감성은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목기와 자기를 비롯한 옛 기물에 심취되었을 뿐 아니라 거기서 받은 감화의 결정체이었을 것으로 본다.

80년대 이후의 작품은 풍경을 비롯한 정물, 인물 등 일반적인 모티브를 주로 다룬 것이 태반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초현실적인 정감이 흠뻑 베인 풍경은 또 하나의 독자적인 영역을 이룬 것이었다. 우수에 찬 여인상도 그 독자의 브랜드로 널리 알려졌다. 끝으로 그의 인간적인 면모 하나를 부기하고 싶다. 미술가들 가운데 음악적 재질이 풍부한 이들을 가끔 만나는데 권옥연 화백도 그 가운데 한분이다. 흥겨운 자리에서 한 가락 뽑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하였다. 화가가 되지 않았으면 분명 성악가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3절 또는 4절의 가사를 하나 틀림없이 다 부른다는 점이다. 멜로디만 기억하고 가사는 못 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는 가사로 곡을 익힌다고 했다. 그의 작품이 지니는 독자성만큼이나 독자한 인간적 면모가 아닐 수 없다. 삼가 영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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