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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 평론 60년 회고와 반성

오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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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미술의 전개에 있어 미술 비평의 기능과 역할이 제대로 인식되고 수행되었던 것은 1920년대에 와서야 가능했다. 서양의 조형방법이 이식되던 1910년대를 현대미술의 기점으로 잡는다면, 비평은 창작의 일정한 습작기를 지나고 나서야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관점에서다. 근대적 미술 비평이 살롱평에서 효시되듯이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도 살롱평에서 근대적 성격의 미술비평이 출발하고 있다.

1920년의 <서화협회전>, 21년의 <조선미술전람회>는 이 땅에서의 본격적인 미술전시의 시작임과 동시에 미술비평이 이루어진 계기가 되고 있다. 주지하듯이 <서화협회>는 이 땅의 최초의 미술단체로서 이른바 화단이란 예술사회가 이로부터 성립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에 의해 주재된 <서화협회>는 근대적인 의미의 혁신을 시도하였던 바, 미술전시, 미술서간, 미술교육을 천명하였으며 미술전시는 최초로 창작과 향수의 근대적 제도를 실현한 것이었다. 창작이 특수한 계층에 의해서만 소통되고 소유된 전시대의 관성을 벗어나 작품이 일반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은 일종의 미술의 민주화 현상으로 간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소통되고 소유될 수 있다는 것은 미술작품이 어느 특정한 계층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미술작품의 작품으로서의 성립은 감상이라는 체널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창작가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은 작품은 작품으로서의 객관적 평가가 유보된 상태일 뿐이다. 작가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감상되고 평가되었을 때 비로소 창작은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비평은 여기서 생겨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비평이란 가치판단으로서의 감상의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전문적인 안목과 기술이 수반되지 않고는 불가능 하다. 누구든지 작품을 감상하고는 자기 나름의 소회를 밝힐 수 있다. 그것이 얼마만큼 전문적인 소양과 판단의 예리함을 수반하느냐에 따라 비평이 성립될 수도 있고 단순한 감상문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20년대의 살롱평을 보면 아직도 비평과 감상문이 제대로 구획되지 않는 경우를 목격하게 된다. 뛰어난 안목을 지니고 있는 경우에도 이를 기술하는 능력이 없으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반대로 기술적인 능력에 비해 안목의 수준이 따라가지 못 할 때 가치판단의 오류를 범 할 수 있다. 대개, 창작을 하는 작가가 쓰는 미술비평이 높은 안목에고 불구하고 기술의 능력이 수반되지 않아 전혀 핵심을 전달하지 못하는가하면, 문필가로서 기술(記述)은 뛰어나지만 정작 작품이 지닌 장, 단점은 파악하지 못하여 화려한 수사에 그치는 경우가 그렇다. 어떤 점으로 보면 창작과 비평은 같이 가는 것으로 간주 할 수 있다. 창작의 빈곤이 곧 비평의 빈곤을 낳는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작의 수준이 아직은 성숙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평의 수준 역시 여기에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양화의 선구자들」을 쓴 정규에 의하면 우리 근대미술은 1920년에서 30년까지가 서양화의 도입기를 겸하여 서양미술의 계몽기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30년에서 37년까지를 제2계몽기로 분류하고 있다. 35년에 출범한 <목일회>의 동인활동으로부터 진정한 화단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지적한 그의 논지에 따르면 다양한 개성의 시대에 들어가면서 비로소 창작다운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비평 활동이 전에 없이 활기를 띄는 것도 이 무렵에 기해서임을 감안할 때 왕성한 조형이념이 비평의 기능과 역할을 더욱 자극시킨 것임에 틀림없다. 30년대 일본에 유학했던 일부 젊은 미술가들에 의한 진취적 조형 체험은 한국미술을 더욱 풍요롭게 가꾸는 자양이 될 수 있었다.

30년 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비평은 본격적인 비평가의 출현이 있기 이전의, 일반 문사들에 의해 이루어 졌다. 단순한 전시 인상기에 머문 것이 태반이며 거의가 익명 또는 예명에 의한 감상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확고한 비평적 안목이 부족 할 뿐 아니라 논객으로서의 사명감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했다. 대부분이 언론에 관계하고 있었던 문사들이며 그나마 본명을 밝힌 경우는 김안서, 이광수, 변영로, 임화, 이태준 정도였다.

작가가 직접 비평에 관여한 것은 다양한 개성의 시대에 있어 제대로 작품의 내면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도의 기술적 영역인 서양화의 내면을 분석하기에는 아마추어 적인 일반문사들에겐 너무 벅찬 것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직업적, 전문적 비평가의 출현이 기대되지 않았던 시대이니만큼 그 대역은 자연 창작가의 몫이 되지 않을 수 없지 않았을까 본다. 김유방(김찬영), 나혜석, 고희동, 안석주, 김복진, 권구현, 이한복, 이용우, 김종태, 심영섭, 김용준 등이 20년대 후반경부터 평필을 구사한 창작가들이었는데, 이 가운데 김유방, 안석주, 김복진, 김용준 등은 일시적이 아니라 오랫동안 비평에 가담한 예이다. 대부분이 일본유학을 거친 서양화, 조각영역의 현역작가들이었다. 30년대엔 윤희순이 여기에 가담되고 있다.

일본에 있어 1920년에서 30년대에 이르는 기간은 사회적인 변화에 따른 담론의 형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23년에 일어난 일본의 간토재진재(관동대지진)는 엄청난 사회적 변화를 초래했으며 대정초기의 자유사상과 안정적인 무드는 급진적 사회주의 사상의 만연으로 내달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러시아 혁명의 영향은 일본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NAPF)을 낳았으며 예술의 사회참여와 기존가치체제의 부정은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강한 반발로 이어졌다. 그러나, 일본군국주의의 대두는 만주사변(31), 중일전쟁(37), 태평양전쟁(41)을 일으키면서 반전, 반제국주의, 사회주의의 사상에 대한 급속한 탄압을 진행하였다.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반발과 세계적인 경제공항에 따른 사회의식의 고양은 당시 조선에서도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PF)의 출현을 가져왔으나 이 역시 일본국군주의의 탄압에 의해 구속, 해산, 잠적의 과정을 밟게 된다. 당대 가장 뛰어난 논쟁이 다름 아닌 김용준과 임화의 프롤레타리아 미술논쟁이었음은 이 땅에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실제 창작보다는 비평적 논의의 풍성함을 보여준 것이었다. 예술운동이 정치투쟁전선에 적극 참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 임화에 대해서 김용준은 프로다운 예술형식을 먼저 창조 할 것을 요구하였다.

프롤레타리아 예술 활동에 대한 탄압에 이어 이 땅에 새롭게 전개된 예술적 담론은 소재에 있어 향토주의와 더불어 민족적 정서에 대한 자각이었다. 28년 <녹향회>의 출범을 기점으로 회화에 있어 향토적 소재의 만연은 자연스럽게 민족적 정서로 연계될 수 있었다. “평화로운 세계를 통하여 있는 고향의 초록 동상을 창조하여 녹향 - 초록고향의 본질을 발휘 할 것” 이란 녹향회의 창립선언은 소재의 향토성이 고유한 정서의 발견이란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 고유섭에 의한 조선미의 특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된 것도 이와 견인됨은 물론이다.

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일본유학에 있었던 젊은 세대의 전위예술에의 체험은 불행히도 이 땅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그들의 활동은 일본전위미술의 전개에 한 인자로서 포괄 되었을 뿐 당시 조선의 화단에는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한 것이 되었다. 이에 따른 비평적 담론이 전혀 형성 될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자유미술가협회>가 개명한 <미술창작협회>로 경성전이 당시 부민관에서 열리었고, 이 단체에 관여하였던 조선인 화가들이 출품하였던 정도 밖에는 이들 작품의 경향이나 이를 에워싼 전위미술 - 추상미술, 초현실미술 -에 대한 관심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이들에 대한 평가는 해방이 되고서야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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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공간(45-48)에서의 쟁점은 왜색의 탈피와 민족미술의 건설이었다. 일제 강점기를 통해 감염되었던 일본적감성과 방법의 제거는 시급한 문제였다. 전통적인 회화양식인 동양화의 일본색감염은 특히 진채와 도안풍의 방법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되고 있으며, 서양화에서의 일본적 감성의 침투는 단순한 기법 면에서 뿐 아니라 저들의 미의식에 의해 해석된 서양화란 형식으로 부각되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나 미묘한 문제여서 그 극복의 방법이나 단계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대한 대안이 민족미술의 건설이었다. 당연한 논리다. 왜색을 제거한 자리에 당연히 고유한 미술양식이 자리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있어 창작과 비평은 새로운 비젼을 제시해주는 모색과 판단에 경주되었어야 함은 물론이다. 오지호의 일제 잔재청산과 창작 방법론, 윤희순의 전통의 비판적 계승론은 괄목할 만한 것이나 그 외 대부분의 논의는 단순한 명분에 의한 구호적 발언에 머문 것이었다.

해방 공간에서 간과 할 수 없는 것은 좌우이데올로기에 의한 진영의 투쟁이 논쟁의 중심을 이룬다는 점이다. 이 점은 20년대의 프롤레타리아 미술운동의 재연을 연상시키게 하고 있다, 이 시기 가장 활발한 좌익 논객은 박문원이었다. 전전부터 비평 활동을 이어왔던 이로는 윤희순, 구본웅, 오지호, 김주경, 길진섭, 안석주, 김용준 이 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오지호를 제외하곤 해방공간에서 6.25동란을 거치는 과정에서 작고하거나 월북하였다.

48년 민국수립을 기점으로 본 한국 현대미술비평은 김용준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활동도 6.25동란이 나던 50년까지로 막을 내리고 있어 현대미술비평의 출발은 더 없이 쓸쓸한 편이다. 50년에서 53년에 이르는 전쟁기간 중 52년,53년경에 와서야 그나마 피난지에서의 미술활동이 재개되어 극히 단편적이나마 비평활동 역시 점검된다. 50년대 전반을 통해 활동한 대표적 논객은 남관, 박영선, 김영주, 김환기, 이경성, 김병기, 김흥수, 정규, 이봉상, 도상봉, 박고석, 김영기 등이다. 50년대 후반으로 이어지면서 꾸준하게 평필을 구사한 이로는 김병기, 이경성,정규, 김영주, 김영기 등이다. 이들 외에 한묵, 이준, 백영수, 최순우, 이응노, 박갑성, 김향안, 김기창, 한봉덕, 이활, 김영삼, 유엽, 김규동, 이봉래, 조병화, 방근택,천승복, 유서화 등이 가담하여 가히 평단의 풍요로움을 반영해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창작겸임의 비평가 외에 전문적, 직업적 비평가의 출현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창작겸임의 비평가 속에 순수 비평가로 꼽을 수 있는 이는 이경성이 가장 앞서 등장 했으며, 이어 최순우,박갑성,김향안,이활,김영삼,유엽,김규동,이봉래,방근택,천승복 등이 출현했다. 이 가운데 이활,김영삼,유엽,김규동,이봉래,김향안(시인, 문학평론, 수필)등이 문인이었으며 최순우는 박물관에 종사하는 미술사학자이고 박갑성은 대학의 미학교수였다.

천승복은 당시 코리언리퍼블릭에 적을 두고 있었던 언론인이긴 하나 미술관계 컬럼이나 전시리뷰를 꾸준히 쓴 점에서 순수비평가로 꼽을 수 있다. 50년대 후반엔 역시 언론에 종사하는 미술전문기자로서 이구열이 활발한 비평 활동을 펼쳐보였다.
신문사의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꾸준하게 전시리뷰를 쓴 이로는 창작겸임의 한봉덕이 있다. 다소 예외적인 인사로는 미대사관 문정관 분인 마리아핸더슨과 주한독일대사 귀하르트 헤르츠를 들 수 있다. 이들 중 마리아˙헨더슨은 조각분야에 뛰어난 비평안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창작겸임이나 순수비평가의 활동이 왕성해지면서 이들의 상호교류와 결속이라는 요청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모임체가 결성되었다. 최초의 미술평론가협회로 등장된 것이 56년의 <한국미술평론가협회>였다. 회원은 김영주, 최순우, 이경성, 김중업, 한묵, 정규등 창작겸임과 순수 비평가가가 혼재되어 있다.
58년엔 또 다른 단체 <한국미술평론인 협회>가 등장되었는데 회원은 천승복, 김중업,김영기, 헤르츠,핸더슨으로 되어있다. 불과 2년 만에 또 하나의 단체가 만들어 졌다는 것은 아마도 56년에 출현한 단체에 불만을 가진 비평가들의 결속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두 단체는 이후 단체로서의 어떤 활동을 보였는지는 파악되지 않는다. 아마도 단순한 친목단체였지 않았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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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활동이 왕성해졌다는 것은 창작활동이 상대적으로 활기에 넘쳤다는 것을 말해준다. 50년대 후반은 우리 미술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변혁의 기운이 화단 전체를 뒤덮은 시대였다. <국전>을 중심으로 하였던 미술계 구조가 서서히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이를 촉진하는 재야 세력의 궐기는 거센 폭풍을 연상시키게 하였다. 폐쇄적인 미술계의 구조를 열린 의식의 장으로 바꾸려는 노력은 특히 젊은 작가들의 이념적 결속과 이에 동조된 비평 활동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57년에 출현한 <모던아트협회><창작미술협회><신조형파><백양회><현대미술가협회>는 이념에 의한 조형 활동의 결속체로서 한 시기에 이토록 많은 단체가 출현했다는 것은 사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사건을 촉매 시킨 것은 비평 활동이었음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봉상의 「전환기의 고민」(동아57.12.24),김영주의 「화단과 그룹 활동」(세계57.6.29),김영주의「한국미술의 당면과제」(연합57.1.24),이봉상의 「미술운동의 당면과제」(한국58.2.24)등 당시 비평의 논조는 한결같이 새로운 조직에 의한 조형운동의 절실성과 이에 따른 미술계 구조와 의식의 전환을 독려하는 것이었다. 김영주의 「화단과 그룹 활동-확립되어 가는 작가의식」의 일부를 여기 소개한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첫째로 화단이 지니고 있는 후진성을 혁신시키고자 하는데 큰 원인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왕의 집단적인 세력권이 자아낸 온갖 부조리를 시정하는 동시에 자유로운 행동이념을 통해서 작품을 실현하는데 그룹 형성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사실 한국화단은 너무나 오랫동안 후진성에 사로잡혀 있었다. 대공투쟁을 위한 공동체로서의 미술인의 집결은 이념의 빈곤으로 말미암아 어느덧 세력권을 조성하였고 그리하여 인위적인 층계와 보스가 생겼다.-(중략)-

실로 한국미술의 현대적 의의는 이렇듯 그룹운동을 통해서 작가의식이 확립되고 공동과제를 밝힘으로써 여러 이념을 발판으로 하는 예술성의 추종에서 찾아야 한다.-(중략)- 공동발언을 꾀하여 상호비판을 함으로써 작품의 질의 향상에 이바지할 것-(하략)-”
그룹운동에 의해 작가 의식을 일깨우고 그를 통해 예술의 질적 향상을 약속 받을 수 있다는 신념은 당시 뛰어난 의식의 비평가들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봉상의 「미술운동의 당면과제」에서도 이념의 결합을 중심으로 한 그룹운동이 중요하다는 취지를 내세웠다.
“.....한 개의 창작품을 골라보기 어려운 이 불건전하고 결실이 없는 설정에서 미술운동을 운위함은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될는지 모르나 오히려 현실에 적응하는 행위는 이 운동을 통한 미술전반에 걸치는 해결이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까닭에 구태어 미술운동을 들고 나와 본 것이다. -(중략)- 창작에 있어 가장 결여되기 쉬운 비판적인 환경이 구성될 뿐만 아니라 상호작용에서 오는 개인적인 발전에 보다 건전한 형태가 아닌가 생각된다.-”
개인에 앞서 그룹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음은 그룹을 통한 조형이념의 전개에서만 새로운 질서를 획득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부응한 것이 57년의 다섯 개의 그룹의 출현이었으며 잇따른 이합집산의 과정에서 미술계의 질서가 재편되어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그룹운동 가운데 가장 진취적이며 혁신적인 것이 <현대미술가협회>였다. 57년에 창립된 이 단체는 58년에 가서야 공통된 이념을 보여주었는데 이른 바 뜨거운 추상미술-앵포르맬-의 집단적 전개가 그것이었다. 이 운동과 밀착된 비평가로 58년경에 등장한 방근택을 들 수 있다. 그의 등장의 배경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50년대 중반경 광주보병학교에 근무하는 장교로서 자주 광주시내에 나와 미술가들과의 교류를 가졌다는 이 지역의 몇몇 원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아마도 강용운, 양수아 같은 당시로서 이질적인 작업을 하던 작가들에서 큰 공감을 지녔던 것이 아닌가 유추 해 볼 수 있다. 이미 50년대 중반경부터 비정형의 작업을 펼쳐보였다는 강용운, 양수아의 주장과 앵포르멜은 자신이 처음 시도하였다는 방근택의 주장엔 시점으로 보아 분명한 교감의 관계가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방근택이 서울로 진출하면서 당시 젊은 작가들의 아지트로 통용되었던 안국동 이봉상연구소에서 박서보, 김창열, 김서봉 등과 밀찰 되었던 것으로 본다.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던 이봉상의 추천으로 연합신문에 글을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비평가로서 등장한 것이다. 그는 일본, 미국등지에서 흘러들어오는 미술 잡지를 통해 국제적인 미술동향에 밝았으며 새로운 조형 방법인 앵포르멜 미학에 대해서도 자기 나름의 해석을 지니고 있었다.

새로운 것에 목말라했던 젊은 의식의 작가들이 흥미를 보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자신에 의해 처음 앵포르멜이 시도되었다는 것이나 자신이 주도하여 뜨거운 추상미술이 파급되었다는 주장은 다분히 아전인수격이다. 뜨거운 추상미술이 이 땅에 전파되고 파급되어간 내역에 있어선 좀 더 많은 연구가 수반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여러 영향의 루트가 있을 것이다. 외국에서 흘러들어오는 새로운 정보는 결코 일방적일 수 는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새로운 방법을 흡수하기에 충분한 상황과 조건이 구비되어 있었느냐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58년 <현대미술가협회>에 의해 전개된 공통된 조형이념으로서 앵포르멜 - 뜨거운 추상미술-은 뜨거운 방법만큼이나 급속한 파급을 가져왔다. 불과 1,2년 사이에 젊은 세대에게 이토록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조형운동은 이전에는 없었다.

방근택은 이후 80년대까지 꾸준하게 비평가로서 활동하였으나 정작 그의 비평가로서의 생명은 앵포르멜운동과 같이 다한 것이 아닌가 본다. 마치 밋셀타피에의 앵포르멜, 레스타니의 누보레아리즘, 하롤드로샌버그의 액션페인팅과 같이 새로운 조형이념을 주도하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비평적 소임을 끝낸 것처럼 말이다. 이점에 있어선 방근택은 이념형의 비평가로서의 모습을 들어 내 보인다. 뜨거운 속상미술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법의 모색을 서두른 대부분의 <현대미술가협회>의 회원등과 달리 그는 여전히 뜨거운 추상미술의 권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점에서 유일한 이념형의 비평가로서 남아난 것이라 할 수 있을듯하다.

방근택과 같은 어떤 일정의 조형사조에 얽메어 있지 않지만 현대미술운동에 있어 새로운 사상에 민감한 유형 역시 넓은 의미의 이념형으로 간주한다면 이일도 이념형으로 볼 수 있다. 인중미술을 통한 미술의 사회적 역할에 치중하고 있는 김윤수 역시 따지면 이념형에 속할 것이다. 인문학적인 소양을 바탕으로 특히 문기짙은 언술에 뛰어난 김용준, 최순우, 정규등은 문사형 비평가로 명명해도 좋지 않을까. 56년 <신태양>지에 연재한 정규의 「한국화의 선구자들」은 우리의 근대미술의 사적기술의 뛰어난 예이지만 언술은 다분히 문사적인 체취를 풍기는 에세이 풍이다.

김용준, 최순우의 문장에서도 문학적인 향기가 물씬 베어나고 있다. 반면, 자료를 바탕으로 면밀한 사적기술을 보이는 윤희순, 이경성, 이구열등은 사가(史家)적 비평가로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경성은 최초의 순수 비평가이면서 동시에 우리 근대미술을 체계적으로 기술해준 미술사가로서의 뛰어난 과업을 남기고 있다.
어떤 새로운 미술운동도 초기의 신선함에 못지않게 한편에선 급속한 유형화가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뜨거운 추상미술 - 앵포르멜 - 역시 예외는 아니다. 파급이 크면 클수록 이에 비례한 영향의 되해가 따르기 마련이다. 58년에 일어나기 시작된 앵포르멜운동도 59년 60년대에 들어가면서는 한편에선 퇴조의 유형과가 진행되었다는 것은 역설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김병기는 이에 대해 예리하게 비판해주고 있다.

“금일에 있어서의 자아의 설정이란 특수한 성격의 표현이 아니라 국제적인 일환으로서의 자아의 위치를 의미할 것이다. 문화의 교류라는 구호로 국제문화의 흐름에서 무엇을 얻을 것이냐에 그치지 않고 동시에 무엇을 줄 것이냐를 전제하여 성립될 수 있다. -(중략)- 아직도 우리의 생활 주변과 사고방식에는 권습적인 동양과 근대라는 의미의 서구가 양식적 착종 속에 미해결의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중략)- 일전 경복궁에서 개회를 본 제3회<현대작가초대전>은 한국 화단의 새로운 의욕의 단적인 표현이라는 의미에서 화단적 의의는 큰 바가 있지만 많은 작품에서 산견되는 일종의 유형성, 작품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작가들의 사고가 양식의 도입에서 그쳐버린 지난 시기의 그림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를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다. -(중략)- 저항하는 자세에 독자성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너무나도 판에 박힌 듯한 작품들, 이를테면 너무나도 앵포르멜적이고 추상표현적인,,,앵포르멜의 이데가 지난 수십 년 간에 있어 마련된 모던아트의 뜻하지 않은 고정개념을 다시한번 박차려는 과감한 부정이라 할진대 이것을 하나의 유형으로써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미 앵포르멜의 기본태도에서 벗어나는 것이된다.”

김병기는 김영주와 더불어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에 가장 괄목할 활동을 펼쳐보인 비평가다. 오히려 직업비평가(순수비평가)보다 더 예리한 상황판단과 작품해석을 보여준 것이 김병기, 김영주가 아닌가 본다. 발표량에 일어선 김영주가 단연 앞선다. 이들의 논조는 때로는 선동적이기까지 했는데 한 시대 미술을 선도한다는 자의식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작가로서의 회귀를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직업비평가가 증가해갈 무렵인 65년을 경계로 비평활동을 접고 있기 때문이다. 65년 상파울로비엔날레 한국 커미서너로 참가한 김병기는 그 길로 미국에 정착했는데 이를 계기로 완전히 창작의 길로 되돌아 갔다. 김영주는 그의 창작활동이 더욱 활기를 띠어가는 6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역시 비평 작업을 접고 있다. 창작 겸임의 비평가가 거의 이 무렵을 기해 비평활동을 중단하는데 직업평론가의 수가 급증하면서 비평의 기류가 크게 달라진 데도 그 요인이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56년과 58년에 각각 한국미술평론가협회가 출현하긴 했으나 유명무실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던 차에 63년 <한국미술평론인회>란 것이 다시 창립되었다. 앞선 두 단체에 가담했던 비평가외에 새롭게 가담한 이들을 포괄해서 새로운 모습을 갖추었다. 이 단체는 다소 급조된 인상을 주기도 한다. 63년 상파울로비엔날레에 참가하는 조건이 그 나라에 미술관, 미술협회, 미술평론가협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미술관은 당시로선 현대미술관이 없었기 때문에 중앙박물관으로 대처 할 수 있는 반면 평론가 협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를 미루어 본다면 앞선 두 단체는 이미 없어진 것이 분명하다. 미술평론인회는 성파울로비엔날레 한국측 커미서너를 맡은 김환기의 발의로 서둘러 만들어졌는데 회장은 최순우가 맡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국립중앙 박물관 미술과장이었던 최순우의 과장실이 평론인의 연락처가 되었다. 필자도 63년에 등단하여 회에 가입되었는데 여러 차례 최순우 회장을 만나러 덕수궁에 드나들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이때는 김영주,김병기,최순우,정규,이경성,방근택,이구열,천승복 등이 회원으로 가담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단체도 김환기의 도미이후 몇 차례 모임을 가진 후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오늘날 존재하는 <한국미술평론가협회>는 65년에 출범하였는데 기존의 평론가협회와는 결연한체 순수 비평가들만으로 구성되었다. 최순우,이경성,이구열,방근택,천승복,석도륜,임영방,이일,유준상,유근중,오광수등이 회원이었다. 순수비평가에 의한 비평의 시대가 도래됐음을 알려주었다. 회원 가운데는 유럽유학에서 돌아온 임영방, 이일, 유준상이 가담되었으며 초대회장을 최순우가 맡았다. 이 단체는 이후 해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회원을 영입해들였다. 70년대에 들어오면서 회원수는 더욱 증가되었다. 70년대 중반 민중미술계열이 집단 이탈하고는 현재에 까지 그대로 지속되고 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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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의 출현으로 인해 65년 이전과 이후는 확연한 다른 분위기로 구분된다. 65년 이전은 몇몇 순수 비평가가 활동하긴 했으나 당시 비평을 주도해간 것은 창작겸임의 비평가였다.김영주,김병기,정규,박고석,이봉상등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경성, 방근택, 석도륜, 이구열등 순수 비평가의 활동 역시 어느 때보다도 활발한 편이었으나 양적인 면에서 창작겸임 비평가가 단연 앞선 형국이었다. 65년 순수 비평가들만으로 구성된 <한국미술평론가협회>가 출현함으로 비평은 순수 비평가들로 주도되었다. 화단 질서를 위한 시평이나 화단의 동향에 대한 담론이 주를 이루었던 65년 이전에 비해, 65년 이후는 국제적 동향과 현대미술의 방향제시 등 보다 넓은 시야와 구체적인 작품분석이 주를 이루었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비평의 시대가 도래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국전>을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즘과 <현대작가초대전>을 위시한 재야의 그룹에 의한 아방가르드의 대결에 있어 비평가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이어지는 국제전의 참여길이 열림으로써 비평가의 역할이 한층 강조되었다. <국전>이 중심이 되었던 화단의 분위기는 <파리청년작가비엔날레><상파울로비엔날레>의 참가로 인해 국제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보다 열린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특히 비평가가 현대미술의 동반자로 인식됨으로써 지금까지의 객관적인 입지에서의 담론의 형성에 참여하였던 역할을 벗어나 보다 깊게 창작활동과 이념의 형성에 관계하기에 이르렀다. 69년에 창립된 <한국아방가르드협회-약칭AG)는 창작가와 비평가가 동지적인 유대를 형성한 최초의 단체였다.
하종현,박종배,심문섭,최명영,서승원,김구림,관훈,김차섭,김한,박석원,이승택,신학철,이승조등의 작가와 이일, 김인환, 오광수 등 평론가가 회원으로 가담한 것이다. “전위 예술에의 강한 의식을 전제로 비젼 빈곤의 한국현대화단에 새로운 조형 질서를 모색 창조하여 한국미술 문화발전에 기여한다”란 선언에서 보이듯이 비젼빈곤을 탈피하여 새로운 조형질서를 모색하는데 창작가와 비평가의 동지적 유대가 절실함을 표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비평가가 현대미술운동에 동반자로서 관여한 사례는 없지 않으나 이처럼 정식회원으로 가입, 운동의 전면에 나선 경우는 처음이었다.
AG는 매년 기획전과 AG기관지를 발행, 상호 긴밀한 유대를 통해 새로운 조형질서를 모색하는데 경주하였다. 69년에서 75년에 이르는 약5년간의 기간을 통해 집단적인 모색의 기틀을 만들어나갔다. 젊은 세대 등에게 미친 영향 역시 적지 않았다. 비평가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작업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는 주기적인 모임체도 등장하였다. 이 때 만큼 비평가와 작가의 직접적인 논의의 장이 펼쳐진 적도 없었다. AG는 75년 <서울비엔날레>를 개최하고는 해산되었지만 창작가와 비평가의 공동작업에 의한 비젼의 모색이란 선례를 남겼다.

75년은 한국현대미술에 또 하나의 전기가 마련된 시점이라 할 수 있다. 국제적으론 미니멀리즘, 컨셉츄얼아트가 풍미하고 있을 무렵이기도 하였다. 모노크롬회화가 등장한 것과 때를 맞추어 집단적 개성, 미술의 정체성이란 화두가 논의의 중심을 이루어 갔다. 일본의 미술관계자들- 작가, 비평가, 화상-이 자유롭게 한국을 드나들면서 한국미술이 지닌 독특한 현상에 주목 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과 겹친다. 동경화랑이 75년에 기획한 <한국5인의작가, 다섯가지의 흰색전>(이동엽, 서승원, 박서보, 허황, 권영우)은 한국미술 속에 나타나는 백색모노크롬을 최초로 집단적 현상, 감성의 항상성으로 파악해준 것이었다. 이 전시기획에 참여하였던 일본의 비평가 나까하라유스케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 ‘흰색’은 화면 색채로서의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회화를 성립시키는 근원적 요소인 것처럼 여겨진다. 형태 및 색깔은 그 ‘흰색’속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반대로 사라지기도 한다. ‘흰색’은 비전의 모태인 샘이다. 우리는 흰 모노크로이즘의 회화를 알고 있을뿐더러 흰색을 기조로 삼는 회화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는 터이다. 그럼에 반해 여기서 발견되는 작품은 색채를 고의로 회피함으로써 남는 백색화면, 또는 형태를 배제한 극한으로서의 백색 공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흰색’은 도달점으로서의 하나의 색채가 아니라 우주의 비전을 틀 짓는 그 자체 인 것이다. 이 전시를 시작으로 잇따른 한국 모노크로이즘이 일본에서 기획되었다. 77년 도쿄센트랄 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의 단면>전과 83년 일본 다섯미술관순회전-도쿄도미술관,도치키미술관,오사카국제미술관,후쿠오카시미술관,혹가이도 미술관-으로 꾸며진 <한국현대미술 70년대 후반의 한 양상>전은 모노크로이즘이 중심이 된 대표적인 기획전으로 꼽을 수 있다.

70년대와 80년대를 통해선 많은 비평가들이 등장하였다. 해외에서 귀국하거나 국내에서 수업을 마친 선진들이 대거 등장함으로써 평단은 전에 없이 풍성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해외에서 돌아와 대학에 자리잡은 정병관, 박래경, 송미숙, 유재길 등과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박용숙,윤우학,윤진섭,윤범모,서성록,박신의,유홍준,임두빈 등이 대개 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친 시점에 등장한 경우이다.

80년대 초반까지 모노크로이즘이 현대미술의 중심을 이루는 한편 또 다른 쪽에선 이와 반대 극부적인 경향이 생성되며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극사실주의는 이미 78년에 <사실과 현실>(권수안,김강용,김용진,서정찬,송윤희,조덕호,주태석,지석철)을 출범시키고 있다. 이와 유사한 또 하나 극사실주의 <시각의 메시지>(고영훈, 이석주, 이승하, 조상현)도 81년에 등장하였다. 이 경향은 주로 젊은 세대 중심의 소수로 결성되고 있으나 80년대 중반이후는 집단적 그룹활동보다는 개별에 의한 작가적 성숙을 보이고 있다. 반면, 수묵화운동이나 민중미술운동은 개별보다는 집단적 결성의 강화를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이념전개에 있어 치열함을 드러내는 특징을 보인다.
특히 민중미술운동을 반 민주화투쟁이란 정치적, 사회적 이념에 편승된 것이었다.
<현실과 발언><두렁><임술년><젊은의식><시대정신><일과놀이>등 많은 그룹이 등장하였는데 일부 그룹은 민주화 운동이란 한계를 벗어나 계급투쟁으로 진전되면서 과거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과 그 괴를 같이 한 것이 되었다.
<현실과 발언>은 AG와 같은 창작가와 비평가가 동시에 참여하고 있는 특징을 띤다. 성완경, 윤범모, 최민 등이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한 비평가로는 김윤수,성완경,최민,원동석,유홍준,윤범모,박신의 등을 들 수 있다.

84년<삶의 미술전>과 85년<20대의 힘전>을 거치면서 과격한 투쟁방식이 빌미가 되어 작품이 경찰당국에 압류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민중계열의 재정비의 필요성을 느껴 재출범 한 것이 <민족미술협의회>였다. 작품의 압류사건에 한국미술평론가협회가 이를 규탄하는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불만을 품고 일부 민중계열의 평론가등이 협회를 탈퇴하는 사태를 빚기도 했다. 김윤수, 원동석, 유홍준, 윤범모, 박신의 등이 이때 평협을 탈퇴하였다.

민중미술평론가협회를 구성, 발족시킨다는 소문은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로서 평협과 민중계열의 반목은 더욱 깊어졌다고 할 수 있다. 제도권과 민중권이란 대립개념도 80년대 후반까지 실감있게 회자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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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 과천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자리잡음으로써 미술관시대가 열리었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에 들어가면서 공, 사립 미술관의 출현이 잇달았다. 서울시립미술관,부산시립미술관,광주시립미술관,대전시립미술관,경남도립미술관,전북도립미술관,경기도립미술관,환기미술관,금호미술관,성곡미술관,이응노미술관,변종하미술관,김종영미술관,영은미술관(경기도광주)이영미술관(경기수원),백남준아트센터,문신미술관,박수근미술관,이중섭미술관,당림미술관,토탈미술관,사비나미술관,한국미술관,삼성리움미술관,대구미술관,전혁림미술관 등이 최근 2010년대에 이르기 까지 세워진 미술관들이다.

미술관의 증가에 따라 전문학예원(큐레이터)의 새로운 직종이 등장되었다. 미술관이 증가하기 이전엔 비평가들이 큐레이터의 기능을 대신했다고 할 수 있다. 각종 전시기획이 주로 비평가들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대형미술전 - 한국미술대상전,동아미술제, 중앙미술대전등의 조직운영과 심사에 비평가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과거 전시심사는 기성 작가들에 독점되었던 현상이 서서히 비평가와 공동의 운영과 심사로 제도화된 것이다.
국제전의 커미서너 역시 과거 작가 독점에서 비평가 위주로 인식아 바뀐 것도 90년대 이후 현저한 변모의 양상이었다. 9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이 건립되면서 매회 커미서너는 비평가등에 지명되었다. 95년은 이 땅에서 최초의 종합적 국제전인 광주비엔날레가 출범되었으며, 비엔날레의 창립과 이후 조직운영에 비평가의 참여가 두드러진 것도 비평가의 역할이 그만큼 신장되었음을 시사해준다.

비평가가 비평이란 본래의 업무 외에도 작가선정과 전시기획이란 상당부분 큐레이터의 역할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큐레이터의 증가와 미술관의 역할이 강화되면서 큐레이터의 기능이 한층 고양되고 있음을 목격 할 수 있다.

비평의 매체는 정기적 간행인 미술저널이 중심이다. 과거 5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서의 비평의 주요 매체는 일간지였으며 부분적으로 월간교양지가 일정 역할을 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는 본격적인 미술저널이 출간되어 비평행위는 주로 이 체널을 통해 이루어졌다. 70년대까지는 주요 일간지 - 동아, 조선, 중앙, 한국, 경향, 서울 등-에 게재되는 전시리뷰와 시평이 비평의 핵을 이루었었다. 그러던 것이 80년대는 상황이 전도되었다. 일간지의 전시리뷰는 미술기자들의 단순 소개기사로 바뀌었고 지면을 잃은 비평가들은 자연 본격적인 전문저널에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미술 출판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 된다. 열화당, 미진사, 예경, 재원 등의 미술전문 출판사가 등장하였고 기존의 일반 출판사에서도 간헐적으로 미술출판을 시도하였다. (일지사, 동화출판, 문예출판) 미술 전문서적이 속속 출간됨으로써 비평가들의 저술활동도 눈에 띄는 현상이 되었다. 그만큼 비평의 내용도 풍부해졌으며 비평적 개성이 현저해진 것도 물론이다. 비평가들의 직종도 과거엔 대학 아니면 언론관계에 속했던 것이 현재는 대학,미술관,언론,문화재단,후리랜스로 다양해졌다. 현재 한국 미술평론가 협회에 소속되어 있는 회원이 약 60명에 이르며, 협회에 소속되지 않고 활동하는 수를 합치면 약 100명에 이르지 않나 본다.

그러나, 이 숫자는 창작가의 등장에 비한다면 너무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미술평론가협회>는 기관지 <미술평단>을 통해 비평가를 등단시키고 있는 편이다. 신문의 신춘문예를 거친 윤우학,윤진섭,서성록,고충환,김해성,이재언,오세권,박계리,박일호,변동필,이선영,유한승,김남인 등 외에 <미술평단>을 통해 등단한 이로는 김진엽,조은정,김병수,서영희,임재광,최형순,공주형,김성호,김성희,임창섭,장준석,정용도,함지훈 등을 꼽을 수 있다. 주로 대학 강단에서 미학, 미술사를 강의하던 이들이나 미술관에 관계하였던 인사들로 자연스럽게 평협에 초대 영입된 경우로 김복영,유재길,윤익영,김현숙,강선학,권원순,김영재,김영순,김영호,김이순,윤난지,신항섭,이석우,장석원,정헌이,조광석등을 꼽을 수 있다.

과거 50,60년대의 평단과 비교해 보았을 때 엄청남 양적 증가를 보이고 있는 편이다. 50,60년대는 고작 10명 내외의 비평가들이 활동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거의 10배 가깝게 불어난 셈이다. 그러나 비평활동이 그때에 비해 활발한가 하면 반드시 그렇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질적인 면에 있어 풍성한 수확을 말하는 이들도 있으나 비평가의 역할면에 있어선 오히려 전시대에 비해 훨씬 위축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현대미술비평 60년에 즈음해서 비평가 스스로 자성의 계기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소망을 피력하면서 글을 맺는다.




① 김영주 「화단과 그룹운동」세계일보 57.6.29
② 이봉상 「미술운동의 당면과제」한국일보 58.2.24
③ 김병기 「회화의 현대적 설정문제」동아일보,59.5.30
④ 나까하라유스케 「한국5인의 작가, 다섯가지의 흰색전」카다로그, 동경화랑.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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