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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맛과 먹의 기운 / 송영방전을 보고

오광수

동양화(한국화)란 말이 더없이 생소하게 들리고 동양화전이란 전시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동양화전 - 개인, 단체전을 통 털어 - 이 전체 전시의 3분의 1은 차지하였다. 동양화 인구수에 비하면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최근에 와선 한심할 정도로 균형이 깨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더더구나 젊은 세대로 내려올수록 내용과 형식에 있어 동양화(한국화)란 찾기가 힘들어졌다. 한국화과 출신인데도 내용은 서양화에 훨씬 가깝다. 그들 자신들도 한국화니 동양화니 하는 말을 쓰는 것이 영 어색함을 느끼는 듯하다. 우리의 고유한 양식이니 전통적인 형식이니 하는 말로서 급변하는 시대의 풍조를 제어할 수가 없다. 오히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뛰어난 우리 것의 모델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열린 조선시대 초상화전 인물화전, 그리고 조선시대 화원전 같은 고전에 많은 젊은 세대들이 관심을 갖고 몰려왔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좋은 모델을 보여준다면 우리 것의 진수를 보여준다면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증명해보인 셈이다. 동양화가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 일차적 책임은 이영역의 작가들에게 있다. 누구를 탓할 노릇이 아니다. 상품의 내용이 좋고 디자인이 좋다면 모여들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현 송영방의 개인전에 대한 단평을 하기 전에 적어본 오늘의 상황에 대한 넋두리다. 송영방의 전시가 유독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상대적으로 위축된 동양화단에 대한 기우에 힘입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송영방은 작가적 위치로 본다면 화단의 중진이다. 확고한 자기 세계를 지니고 있는 작가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오랫동안 동양화의 전통을 이어오면서 오늘의 회화로서 동양화의 존재를 끊임없이 천착해온 역정을 아울러 말한다. 그가 화집에 자신의 회화관, 자신의 작업의 내면을 피력한 장문의 작가변에 이 점이 소상히 밝혀져 있다. 사람만큼이나 구수한 글맛에 단숨에 읽었다.

이번에 나온 송영방의 작품의 내용은 크게 인물, 화조, 산수로써 동양화의 전 화목을 아우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각 화목에서 그 독자한 화인들이 눈길을 끈다. 같은 산수인데도 그가 구현하는 산수는 전혀 다른 착상과 구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다루는 영역은 동양화의 전 화목에 걸쳐있지만 그것들이 그 독자의 영역으로 통일되고 있어 이것저것 많은 것을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어떤 화목이던 그 내용이 먼저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린 작가의 채취가 먼저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오랜 화업의 결정이라 보며 중진지 갖는 무게의 확인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세목별로 보면 산수에도 실경을 바람으로 한 것이 있고, 실경을 뛰어넘는 보편적 이상형의 산수가 있다. <우후계곡>(87), <화양동계곡>(85), <금강귀면암>(95), <윤필암>(01), <거창낙수정>(05) 등 계통은 실경산수다. 지명이 들어가거나 들어가지 않아도 자연을 앞에 한 실감이 확인된다. 보편적 이상형의 산수도 그렇지만 특히 실경산수는 맛깔스런 풍경이란 수식이 어색하지 않다. 맛깔이란 말 속엔 상쾌한, 경쾌한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다. 소담스럽기 짝이 없을 때 흔히 맛깔스럽다는 표현을 한다. 이들 실경산수를 앞에 하면 현장에서 느끼는 자연의 시원한 경관을 호흡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실경에서의 실감이란 으뜸가는 덕목이다. 실감이 가지 않는 실경이란 실패한 것이다. 그의 실경산수가 더없이 시원한 느낌을 주는 것은 물론 그 특유의 붓 맛이라던가 화선지에 닿아 일으키는 먹의 스며드는 여운에서 오는 것이겠지만 나아가서 조선후기부터 우리강산을 앞에 하고 그렸던 선인들의 발견의 감격이 겹쳐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 자연에 대한 감동이 없다면 이렇게 군더더기 없는 표표한 격조가 가능할 것인가.
그의 붓은 짧게 끊어지는 듯 길게 이어진다. 그러기에 필선의 맛이 유달스럽게 선명하다. 초서와 같은 빠른 행간을 유지하면서도 예서가 지닌 고졸한 기운을 잃지 않는다. 동양화에선 역시 필선과 먹 맛이 요체이다. 이를 잃는다면 그림은 제대로 서지 못한다. 송영방의 그림이 어떤 화목에도 불구하고 반듯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에 말미암는다. 필선과 먹 맛에서 그 고유한 조형성을 엿보게 한다.

세목의 두 번째 유형으로는 <계산무진><구름에 덮인 산과 물> <산과 물과 바위><산과 물과 구름> 등이 있다. 그가 지금껏 그려온 산수 가운데 <춤추는 산수>란 것이 있는데 같은 유형이다. 춤추는 산수란 명제에서도 느끼듯이 다분히 해학적인 요소가 함축되어있다. 이 계통은 실경이 아닌 일종의 보편적 이상형으로서의 산수로 이름 불일만하다. 보편적 이상형이면서도 동시에 그 독자한 화인과 구도가 두드러진다. 내용은 전자이면서 형식은 후자로 볼 수 있다. 산과 물, 그리고 바위와 나무와 구름이 어우러져있는 것이 산수화다. 보편적 이상형에선 산과 물, 또는 산과 물과 구름 등이 등장하는데 그러한 대상들이 원래 존재하는 양상으로 구현된다는 특징이 있다. 예컨대 화면엔 몇 개의 산 모양이 여기저기 솟아오르면 이를 에워싸고 물이 휘어져 흐른다든가, 구름이 역시 산 위를 피어오르듯이 감싸고 돈다든가하는 모양이다. 이는 어느 특정한 지명이 있는 풍경이 아니라 원형으로서의 풍경이다. 다분히 개념성을 띄면서도 심각하지 않는 것은 앞서도 이야기하였듯이 춤추는 산수와 같은 해학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산수를 보고 있으면 절로 경쾌한 느낌을 갖게 된다. 화면에 등장하는 음악적 율조 때문만이 아니다. 자연을 보는 예술가의 천의무봉한 감정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화조계통으로는 <청매>, <홍매>(96), <홍매>(11), <매화 수선도>, <홍시>, <연꽃>, <연밭>, <괴석과 수선> 등을 꼽을 수 있다. 매화를 중심으로 한 것과 연을 중심한 것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매화는 사군자중의 한 화목으로 예부터 많이 다루어왔다. 특히 문인사대부들에 의해 많이 그려졌다고 해서 문인화의 화목으로 취급된다. 사군자가 문인화의 대표적인 내용으로 다루어지지만 송영방의 화면에선 대나 난초나 국화가 그렇게 많지 않다. 아마도 사군자가 지닌 형식미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인지 모른다. 대나무도 대밭 속에서 두 스님이 바둑을 뜬다든가 또 다른 인물이 배경이 되는 경우를 볼 수 있을 정도다. 난초역시 형식으로서의 난초는 찾을 수 없다. 실경의 수선이 난초를 대신해주고 있을 따름이다. 실사구시의 태도가 자연 형식미로 다듬어진 화목을 배격함에서일 것이 분명하다. 그런 형식미가 많이 제거된 매화가 많다는 것도 이와 연관된다.

이런 화목 속에 간간이 등장하는 괴석은 그 개인적인 취향과도 연계되면서 독특한 맛을 지닌다. 지인들은 그를 가리켜 <돌 박사>로 지칭한다. 돌을 수집한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닌 돌에 뛰어난 안목을 지녔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작가들 사이에선 골동취향을 지닌 이들이 적지 않다. 우리의 옛 기물이나 조형물에 담긴 고유한 미의식과 조형감각에 대한 탐미적 접근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한때는 인사동 골동가를 누비는 작가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이들의 수집벽이 단순한 아마추어적 수준이 아님은 말할 나위도 없다. 작가들 화실에 옛 문방기구나 도자나 민화 등 한두 개쯤 없는 곳이 없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골동수집에는 크게 두 가지 양상이 있는데 수집벽과 또 이에 연계된 비즈니스가 그 하나이고 옛 조형물에 담긴 정서와 감각을 자신의 미의식으로 육화시키려는, 그리고 나아가서는 자기 작품 속에 어떤 형식으로든 구현하려는 의도가 또 하나이다. 작가들의 수집벽이나 취향은 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송영방의 돌 취미도 여기게 분류될 것이다.

문방취향에 수석은 으레 끼는 것이지만 소재로서 수석이 그렇게 빈번히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특히 오늘날 동양화에선 그런 의고취는 점점 자취를 감춘다. 이 점에선 송영방이 심심치 않게 그리는 수석은 단순한 구색으로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돌이 있음으로 해서 동양화, 또는 문인화의 격조를 되살리려는 의도임이 분명하다. <돌 박사>란 애칭은 그가 돌을 좋아하는 수준이 맛과 분위기에 있음을 작가변에서 늘려놓고 있다. “나는 돌을 좋아한다...석물, 괴석 등 돌이 풍기는 맛과 분위기를 좋아한다. 동양화는 물과 나무와 돌을 빼면 안된다.” 돌이 지닌 묵직함, 자연스러움,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내는 맛과 분위기는 다른 어떤 대상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것이다.

화조계통의 세목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연을 소재로 한 것이다. <연꽃><연밭>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다루었다. 수묵으로 연을 다루는 경우는 많지 않다. 소재자체가 채색에 어울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의 경쾌한 붓 맛에 연이 어울릴까를 생각해본다. 염염한 연꽃의 자태나 흐드러진 연잎을 다루기엔 그의 붓의 운용으론 걸맞지 않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특히 그런 인상을 받는다. 무겁게 가라앉는 분위기의 연이 그의 소쇄한 붓 맛에 어떻게 어울릴까는 작가의 연구의 몫이다.

동물의 소재는 동양화에선 화조와 어울려 화조화의 일종으로 다루어질 때가 많다. 초충도 같은 것도 화조, 화훼의 세목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송영방이 다루는 동물로는 사슴, 개, 고양이, 호랑이, 학, 닭, 오리 등으로 나타나는데 대게 어떤 것을 곁드린다든가 배경을 지닌다든가 하는 풍경적요소를 배제한 채 개면 개, 호랑이면 호랑이 단위로 그려진다. 몇 장의 호랑이 그림이 있는데 한결같이 민화풍으로 그려졌다. 해학적인 맛이 일품이다. 민화에 나오는 호랑이, 까치 그림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해학적 소재로서 백미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터이다. 그런데 송영방이 그리는 호랑이는 발묵에 의한 먹의 번짐과 붓의 뒤엉킴이 특징으로 민화의 해학을 수묵에 의해 새롭게 번안시켜주고 있다. 아마도 그 특유의 경쾌한 붓 맛으로 처리했다면 이런 의and스러운 호랑이의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발묵에 의한 동물 그림으로 <개>가 있다.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 일필에 의한 속도와 더불어 개의 모습이 실감을 더해준다. 작가변의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작가변 자체가 비평을 대신한다. “내 그림은 먹 위주의 그림인데 발묵한 묵색이 퍼져나가길 ‘물이 촉촉한’임리이어서 마치 비가 쏟아진 뒤 구름이 개이는 맛이다. 그래서 바라보는 눈 맛에 ‘술 마신 듯 유장해지는’ 감창이 느껴져야 한다. 그런 것을 지향해서 기법을 구사하고 싶다.”

송영방은 인물을 잘 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변의 동양화가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인물은 표정을 걷잡는 것이 요체이다. 그가 인물을 잘 그린다는 것은 인물이 지닌 순간적 표정을 겉잡는데 뛰어난 면모를 보인다는 것이다. <완당 선생 적거도>를 비롯한 몇몇 인물화는 그 표치에 일어서나 동작에 있어 옛 화원들의 인물화의 잔흔을 보여준다. 인물들이 한결같이 소박하면서도 고격한 맛을 주는 것도 이에 연유함일 것이다.



송영방의 그림은 동양화가 지닌 먹 맛에 못지않게 여백이 주는 아름다움과 긴장이 뛰어나다는 것을 지적해야할 것 같다. 그려진 부분과 그려지지 않은 부분,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조화는 동양화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징으로 송영방은 이를 잘 터득하고 있다. 시원한 눈 맛이란 여기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의 그림이 주는 무심한듯하면서 세밀한 관찰과 뛰어난 직관은 자연에 대한 깊은 감동에서 오는 것임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단원 그림에 고양이가 나비를 바라보는데 제비꽃이 피어있었다.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긴 그림이다. 그걸 지나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어느새 나는 발끝에 밝히는 풀 섶에 자라는 들풀도 지나치지 않는 습관이 되었다.” 모름지기 중진 작가로서의 경지를 음미케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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