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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순철의 아티스트데자뷰(3) 서용선 b. 1951

변순철

변순철의 아티스트데자뷰(3)

글 / 서용선
사진 변순철

아버지, 자유
“오늘에 와서 쉴러의 극개념과 예술의 사회적 기능 규정이 마르쿠제(<충동구조와 사회 Triebstruktur und Geselschaft>)의 심리 분석적 - 마르크스적 문화비판에 있어서 새롭게 현실성을 얻고 있다. 뒤렌마트는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 “예술과 자연, 정신과 인생, 이상과 공익 등이 쉴러의 사고 대상이었지만, 그는 이념세계로 도피하지는 않았다. 그는 한계를 설정하고 견디어냈다. 그는 누구보다도 준엄하게 자유를 간직했지만, 체계보다는 삶을 위해 불꽃을 일으키고자 긴장감을 조생했다. 보편적인 것보다도 더, 국가보다도 더 인간을 사랑했기 때문에 쉴러는 인간을 찬미했다.” 토마스만이 언급하고 있는 바처럼 쉴러에게 있어서는 “민족적인, 민족의 도덕과 교양, 민족의 영적 자유와 지적 수준을 위한 노력과, 인간의 스스로에 대한 구원의 경외심이 중요하였다.” -독일문화사 p.215

국가나 민족보다 인간을 사랑한 쉴러에게서 나는 자유의 본질을 본다. 초등학교 1,2학년 시절 사회에 통용되는 뚜렷한 직업이 없던, 아버지의 직업란에 쓰던 ‘자유업’이라는 단어는 왠지 그냥 가슴 뿌듯한 느낌을 주었다. 구체적 직업이 없다는 실제의 사실과는 별개로 추상적 개념인 자유업은 멋있는 생각으로 느껴진 것이다. 당시 매혹적이던 공무원, 은행원, 회사원 같은 구체적인 직업을 갖고 있지는 않았으나, 아버지는 꽃키우기를 시도하거나, 집도 지을 수 있는 다양한 재능을 가진 그야말로 자유업에 종사하셨다. 한 가지 전문업에 종사하지 않을 뿐, 때로는 가족을 위해 흙집을 짓는 노동을 즐기는 것 같은 자유업이 딱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노동을 경제적 수입으로 연결시키지는 못하였다. 때문에 셋째누나와 나는 새끼줄에 꿴 연탄덩이를 나르곤 하여야 했다.
그는 자연과 분리되지 못했다. 그는 근대형 전문직업인으로 훈련을 받지 못한 것이다. 젊은 시절 일본에서 운전을 배운 것이 유일한 훈련이라 하더라도 그는 전문화된 현대 산업체계에 적응하지 못한 자유인이었다. 때문에 가족은 고생하였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였으나 의무감 때문에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희생하지 못하는, 사회와 긴장관계로 맞대면하는, 그리하여 사회에 대한 분노심을 끝내 버리지 못한 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그의 자유정신을 지금도 좋아한다. 어머니에 의하면 가족의 생계가 막막한 날도 마냥 어항 속의 붕어만 바라보는 아버지가 너무 답답하였다고 한다. 내 생각에 그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사회 속 인간관계로 파고들 그 방법을 끝내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사농공상의 유교사회의 이념을 짙게 지니고 서구적 개명세계를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가족 모두에게 자연을 좋아할 수 있는 심성을 심어 놓았다. 뿐만 아니라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끔찍한 남북한 전쟁에서 한강을 넘나들며 가족을 지켜내지 않았는가…….극도로 아지네모토(화학조미료 편집자 주)를 싫어했고 반짝거리는 모든 인조적인 것들을 싫어했다. 그는 보석도 싫어한 것 같다. 그는 페인트칠도 싫어했고, 니스 칠도 싫어했다. 그런데도, 80년대 초 돈암동에 조그만 한옥을 사서 이사한 집 부엌마루는 정성 들여 여러 번 니스 칠을 해주었다. 부엌마루 청소를 위한 배려이며 가족, 어머니를 위한 마지막 그의 헌신적 노력이었다.

아버지는 돌이킬 수 없는 중병에 들어있었다. 자신이 손수 짠 탁상의 이중합판 밑에 보관해, 노년에 수년간 가족이 모두 나서다시피 한 주차장 관리를 통해 번 300만원 인가를 내게 유산으로 남겨 주셨다. 나는 그것을 식구들을 위해 쓰겠다고 말씀드렸다. 대학원 시절의 일이다. 그동안 나는 대학을 어두운 고민의 그들 아래 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미술도 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는 직업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 동아미술제에 응모하여 상금을 탄 내용을 보여주었으나, 그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였다. 그 이후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경력 란에 그 내용을 기록하지는 않았다. 나는 지금도 상금을 위해 공모제에 응모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그 그림에는 상금에 대해 모질게 집착하는 심리적 공간감이 스며들어 있다. 예술은 누군가를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근본적으로 예술은 자신을 위해, 자신도 모르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 삶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도 생각한다.
쉴러는 이것을 유희로 보았으며, 자유에 의한 것으로 생각했다







본문은 2006년 갤러리고도에서 열린 서용선의 개인전 도록 『이념과 현장들』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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