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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순철의 아티스트데자뷰(4) 이종상 b. 1938

변순철

변순철의 아티스트데자뷰(4)
글 / 이종상
사진 변순철



그림, 공부, 그림공부
아버지께서는 완고하신 할아버지의 반대로 고암 이응로 선생을 따라 동경 유학길에 오를 수 없게 되자, 청운의 뜻을 접고 본래 전공하셨던 원예학으로 복귀하시어 지방 군청의 연구기관 공무원이 되셨다. 아버지께서는 직접 과수원을 경영하셨고, 예산 읍내 발연리 120번지에 손수 설계하신 집 울타리 안에 미니 동물원을 방불하게 할 만큼의 갖가지 관상용 조류들을 사육하며 나와 함께 스케치 하시는 것이 유일한 취미셨다. 내가 아버지를 따라 곧잘 그리는 걸 대견스레 칭찬하시며 늘 “작은 놈은 화가로 키울 거야” 라고 어머니에게 자주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광복 이듬해에 텅스텐 광산업을 하셨던 할아버지가 거래하시던 서울의 명동성당 부근에 있던 적산 전구공장을 불하받아 경영하게 되셨다. 그래서 아버지를 따라 서울 용산구 후암동으로 이사를 오게 된 나는 곧바로 삼광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고 가장 자신 있는 도화(미술)시간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그림 그리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태어난 예산에서 유치원을 같이 다닐 때까지 아버지로부터 그림 수업을 단단히 받은 바가 있어 어린 나이에도 도화시간만은 칭찬을 들을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광복 직후라서 인쇄술이 낙후되어 원색도판이 들어가야 하는 새 나라의 도화책을 새로 발행 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2년이나 지나도록 일제시대 도화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바로 그 일제시대 도화책을 1학년 학생들의 고사리 같은 손에 나눠주고 밖에 나가 임화를 그려오라는 것이 첫 도화시간의 수업내용이었다. 해방직후 아무리 궁색하고 질서가 아직 잡히지 않았을 때라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도무지 이해 할 수없는 대목이었다. 어찌되었던 아무 짬도 모르던 어린 나는 나눠 주는 도화책을 운동장 등나무 밑, 벤치 위에 펼쳐놓고 구도가 그럴싸한 그림을 골라 이를 앙다물고 아주 열심히 그려댔다. 도화 책의 내용이 하나같이 일장기를 그린 비행기와 군함이 미·영 연합군과 싸워 이기는 전쟁기록화 같은 그림이었다. 어려서부터 닮게 그리는 그림이라면 제법 많이 그려 보았던 터여서 남들보다 쉽게 가미가제의 멋진(?) 공중전 그림을 거의 원본과 같게 그려 낼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고대하던 도화시간에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우리 반 담임선생님께서 내가 그린 그림에 대해 의심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그려 주었는지 바른대로 대라”며 어린 나에게 무조건 꾸중부터 하시니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거짓말을 한다는 이유로 방과 후에 울면서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 큰 교실의 청소를 혼자 해야 했다. 나를 끝내 믿지 못하시던 담임선생님은 나를 직원실로 불러 마지막으로 도화전담 고학년 교사에게 확인을 하셨다. 전문가의 눈으로 보았을 때 1학년 학생의 수준으로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곱슬머리 조봉현 선생님은 내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시더니 뜻밖에도 “소질이 있는 학생이라면 이 정도를 그려 낼 수도 있습니다.” 라며 내 어깨에 손을 얹어 품안에 감싸 안으시며 단호한 어조로 결론을 내려주시는 게 아닌가. 그 바람에 나는 담임선생님의 지독한 혐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덕분에 3학년부터 들어갈 수 있는 도화반에 들어가, 전문 화가 선생님으로부터 특별지도를 받게 되었으니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후에 나는 화가가 되었고 선생님은 문교부 장학사와 국정교과서 편수관으로 광복직후 한국미술교육에 크게 이바지하셨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고 있는 나에게 “종상아! 넌 싫증도 않나니? 온 종일 ‘그림공부ʼ만 하게…….” 참다못해 곁에 다가오시어 짐짓 조용한 말투로 꾸중(?)하시곤 했다. 종일 그림만 그리고 있는 아들에게 ‘그림공부’만 한다고 하셨던 어머니의 당시 말씀은 그림도 ‘공부’라는 잠재의식을 은연중 심어 주심으로써 나를 한국 최초의 화가철학박사로 만들어 주신 무언의 교육이었음을 늘그막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만일에 그때 어머니께서 “하라는 공부는 않고 그림이나 그리고 있냐! ”라고 윽박지르셨다면 나는 분명, 그림은 ‘공부’가 아니고 ‘다른 짓’으로 치부하고 ‘그림’ 아니면 ‘다른 짓’을 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공부’라는 개념을 매우 비좁게 생각하여 ‘공부’하는 척하면서 어른들 몰래 뒤에서 ‘그림’을 그렸을 터이다. 그림도 엄연한 ‘공부’라는 생각을 갖게 해준 어머님의 말씀 한 마디가 오늘의 나를 만들어 놓은 원동력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이론공부와 그림공부가 다르지 않은 하나이며 동전의 앞뒤와 같은 거라고 믿고 있다. 내가 평생 붓을 들 때 마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좋은 그림을 그린다. ”라고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을 되뇌면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기 위하여 숨을 거두는 그 날까지 ‘그림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영원한 미완을 향하여, 텅 빈 충만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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