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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 민간신앙, 그 질긴 생명력

최열

한 해 걸러 다시 온 곳인데도      隔歲重來地

전에 있던 승려 태반이 사라졌네     居僧太半空

시내와 산만은 옛 그대로라       溪山依舊在

향기로운 풀잎 여전히 봄바람이네    芳草常春風


- 이형상, <절에 올라>, 『병와집(甁窩集)』



검은 연기 치솟는 풍경 대할 때면 소리 없는 외침이 가슴을 파헤친다. 육지의 권력을 배경 삼았을 뿐 아니라 제주의 모든 권력을 한 손아귀에 쥔 수령 이형상 목사가 1702년 12월 20일 제주의 유생, 무사를 비롯한 관리 300여 명을 모은 자리에서 ‘음사(陰祀)’의 폐해를 낱낱이 설파하였다. 제주 무당인 ‘심방’을 비롯한 민간 신앙을 쓸어버리겠다는 의지였다. 수령의 호령을 듣고서 129개 마을의 관리는 “공의 명령이 있는데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서 곧장 각자의 마을로 달려갔다. 이들은 12월 21일에 신당(神堂) 129개소는 물론, 심방의 신의(神衣), 신철(神鐵), 민가에서 제향하는 신물(神物), 심지어 당산나무 뿌리 같은 길가나 숲까지 파헤쳐 버렸다. 다음날인 22일 관청 기록인 ‘무안(巫案)’에 이름을 올린 심방 수백 명이 목사 앞에 나아가 변명하고 이름을 지워주면 “영원히 무명(巫名)을 폐하여 범민(凡民)이 되겠습니다”고 청원하였으며 이어 노인과 선비가 나아가 “음사는 없어졌으나 의약(醫藥)에 힘써 주십시오”라고 호소하였다.


사방에 검은 연기 솟구치는 풍경을 그린 <건포배은> 하단 해안선에 줄지어 관리들이 엎드려 있는데 건들개(健入浦)에 나아가 북쪽 한양을 향해 네 번 절하는 장면이다. 관덕정 앞마당에도 마을의 향리들이 엎드려 수령의 교시를 받들고 있고, 성 밖 마을마다 불타는 신당이 즐비하다. 어떤 신당은 기와집으로 번듯하고 또 어떤 신당은 지붕도 없는 허술한 구조물이라 심방과 관련 있으면 무엇이건 가리지 않고 방화한 것을 드러낸다. 붉은 불꽃은 없고 검은 연기만 빗겨 치솟는데 모두 한라산 오름으로 날아든다. 결코 사라지지 않음이요, 이곳저곳 오름으로 피난하는 모습일 것이다.


유가의 성리학(性理學) 사상이 아닌 민간 사상을 사악한 이단이라고 여기는 이 독단은 중세 마녀사냥과도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였을까. 이형상 목사는 이러한 사실을 『남환박물』 「풍속」조에 ‘관청에서 금지한 것도 없었는데 수천 년 나쁜 습관이 하루아침에 싹 쓸리어 없어졌다’고 기록했다. 강제로 한 일이 아니었다는 변명이다. 또 ‘소각하고 없앤지 반년이 되었지만, 이익이 있고 폐해가 없으니 전에 속았음을 알아 분하게 여기며 남녀노소가 만나 서로 축하하고, 무당을 원수 보듯 하며, 어울렸던 일을 부끄러워한다’고 자랑을 늘어 두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형상 목사가 파직당하고 후임 목사 이희태(李喜泰)가 부임한 바로 다음날 아주 커다란 규모로 신을 기리는 제사를 올린 일이다. 누구에겐 음사였던 것이 누군가에겐 신사(神祀)였음에랴. 나아가 이희태 목사는 심방으로 하여금 빠르게 신당을 설치하게 하고 폐지한 ‘무안’도 복구하였다. 이형상은 이러한 소식을 듣고 “가히 한심스럽다”고 탄식하였지만, 이희태 목사가 한심스러운 줄은 모르겠고 오히려 이형상 목사가 우스워졌음은 알겠다. 심방의 노래인 『영천이 목사본』에 이형상 목사의 아들 형제가 당신(堂神)의 저주로 졸지에 죽음을 당한다는 내용이 있음을 볼 때, 이형상 목사의 신당파괴 행위는 좁게는 제주 심방의 분노, 넓게는 믿음 깊은 제주 민인의 원한을 산 폭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처럼 심방이나 스님을 죽음의 궁지로 몰아넣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통치자의 폭력이라는 업보를 덮을 수는 없을 게다. 그래서였을까, 뒷날 절집에 들러 부른 노래가 참회의 곡조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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