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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 귤, 열매 가더니 향기마저 가다

최열

집집마다 귤과 유자 가을 서리에 잘 익어      萬家橘柚飽秋霜

상자마다 가득 따 담아 바다를 건너오는데     採著筠籠渡海洋

고관이 이를 받들어 대궐에 진상하면          大官擊同彤墀進

빛과 맛과 향기가 완연 그대로라네                宛宛猶全色味香


- 김종직, <탁라가(乇羅歌)>, 『점필재집(佔畢齋集)』


김남길(金南吉), <귤림풍악(橘林風樂)>, 탐라순력도5, 종이, 30 × 30 cm, 국립제주박물관.


지금은 없어진 감귤농장을 그린 <귤림풍악(橘林風樂)>은 그 화폭이 너무 아름다워서 한눈에 다 들어오지 못할 만큼 눈부시다. 1703년의 작품으로 그 해는 물론, 18세기 초 조선 미술사에 이런 작품은 다시 볼 수 없는 걸작이다. 네모의 화폭 전면에 아롱진 귤나무와 복판에 제주목사 이형상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풍악을 즐기는 일군의 인물들이 뽀얗게 스며들어 간다. 위쪽엔 검은색 울타리가 부드러운데 키 큰 대나무가 복판 귤나무 숲을 곱게 감싸고 아래쪽 망경루(望京樓)와 귤림당(橘林堂)이 울긋불긋 자리 잡아 호위하는 위엄을 드러낸다. 오른쪽 병고(兵庫)와 교방(敎房)은 자칫 딱딱한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는 추임새 역할을 하는데 무기창고인 병고는 화살로 쓰이는 대나무 울타리를 보조하고 기생의 교실이자 근무처인 교방은 숲을 살짝 파고들어 욕망을 자극한다. 제주목사 이형상은 망경루 뒤편의 이곳 귤나무 숲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겨울이 오고 있음을 깨닫지 못할 만큼’ 즐거움에 빠져 스스로 그 과수원에서의 풍악을 『남환박물』에 다음처럼 그려놓았다.


“가을과 겨울에 낙엽 질 때 유독 과수원은 봄철 녹음으로 단장하여 하늘을 가린다. 누런 열매가 햇빛에 비치니 나무마다 영롱하고 잎마다 찬란하다.” 


이렇게 무르녹는 귤나무 숲 속 풍악이야 제주목사와 수행원만이 누리는 특권일 터, 부럽다면 부러울 뿐이다. 그렇게 농익은 귤은 제주사람 몫이 아니었다. 고르고 골라 저 육지 한양으로 봉진(封進)하는 것이었으니 열매는 가고 향기만 남을 게다. 한양으로 가면 제사용은 예조로, 진상용은 왕실로 들어갔다. 처음엔 그리 많지 않았으나 국가의 규모가 정비되고 활력이 넘치던 세종대왕 시절 점차 증가하였다. 나아가 민가(民家) 과원의 감귤마저 징수를 시작하였더니 이들은 민가의 감귤나무 숫자를 세어 장부에 기록하고 열매가 맺기 시작하면 열매 숫자를 세어 기록하고, 심지어 주인이 열매를 따면 절도죄로 몰아대는 국가범죄가 시작되었다. 폐해가 극심하자 중종 때인 1521년 별방, 수산, 서귀, 동해, 명월의 방호소에 관립 과원 30곳을 설치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도 잠시뿐, 매년 제주목사가 7, 8월에 민가 과원을 순시할 때면 관리들은 붉은색 물감 붓으로 표시하고 기록했다가 귤이 익는 날이면 모두 헤아려 가져갔는데 까마귀나 까치가 쪼아버리기라도 하면 주인이 대신 납부하도록 하였다. 민가에서는 귤나무가 독약 나무와도 같아졌고 혹 자기 땅에서 귤나무가 자라면 잘라버리고 말았다. 임진왜란의 영웅이자 개혁군주인 광해로서는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즉위한 바로 그 해 제주 사람들이 호소하는 말을 듣고 진공해 오는 감귤 수량을 크게 줄여주었다. 광해는 뒷날 정변으로 쫓겨나 제주로 유배를 왔는데 사람들은 그 은덕 기억이나 했었을까. 그보다 150년 전 사림의 종장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읊은 제주노래 <탁라가(乇羅歌)>엔 그저 곱고 아름다울 뿐, 제주 사람 힘겨움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곳엔 간 적도 없이 그저 소문만 듣고 했던 노래니까 그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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