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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두물개, 그 꽃물결 놀이

최열

모쪼록 날 위해 다시 자리 앉으셔서      爲我更須坐

내 노래 한 곡조 귀 기울여 들어주게     聽我歌一闋

슬픔 중에 기쁨이 생긴다고 하지만      雖然哀生歡

또한 지나친 즐거움 누리지는 말게나     亦勿太樂極 


- 남효온, <두모포 건너 압구정에 오르다>, 『추강집(秋江集)』


한강 두모포, 신윤복, <주유청강(舟遊淸江)>,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35.6 × 28.2, 종이, 간송미술관 소장.


금강산과 오대산에서 시작해 흐르고 흘러 천리 길 달려온 물줄기 양수리를 지나 또다시 중랑천(中浪川)과 만나는 곳 지금 옥수동 응봉(鷹峯) 아래 나루터인 두모포(豆毛浦)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울의 강이라 하여 한산하(漢山河)라고 하였다. 중랑천과 남한강이 합하는 나루터였으므로 두물개 또는 개라 불렀던 두모포는 어떤 곳인가. 두모포 앞 강이 도성 동쪽 10리에 있다 하여 동호(東湖)라고도 했던 곳이다. 서울숲 공원에서 중랑천 건너 응봉을 보면 깎아지른 절벽이 멋진 입석포(立石浦)가 있고 또 이쪽 강 가운데로 닥나무며 뽕나무 숲의 저자도(楮子島)가 자리 잡고 있었던 곳이었으니까 동호는 왕이 머무는 도시 한양의 시작을 알리는 강물임에 부족함 없는 땅이었다. 


두모포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동빙고로서 유본예(柳本藝, 1778-1842)가 『한경지략』에 동빙고 얼음은 궁궐 행사에만 올리는데 그러므로 매년 섣달 낭관(郎官)이 나아가 사한제(司寒祭)를 올려 현명씨(玄冥氏)를 향사(享祀)한 뒤에야 한강 저자도 얼음을 깨다가 보관한다 하였다. 이러하니 일대에 얼음시장이 만들어졌다. 또 두모포는 강 건너 송파(松坡) 나루로 모이는 전국의 쌀이며 목재는 물론 토산품(土産品)과 연계하여 거대한 물류시장을 형성했던 번화가였다. 한강 나루터 어느 곳에건 시장이 서서 화려하였으니까 비단 이곳만은 아니겠지만 두모포 또한 요란한 여염(閭閻)집이 들어섰고 연이어 홍등가(紅燈街)도 번창했을 게 틀림없다. 두모포는 옥호루(玉壺樓)가 자태를 뽐내는 바와 같이 그 일대 산천이 아름다워 강기슭에 배 띄워 풍류를 누리는 세력가들이 즐겨 드나들었으니 더욱 번성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했으므로 숱한 시민이 모여들어 재물쓰길 아끼지 않는 성시(盛市)를 이루어 두모포는 한성부 관리들이 눈독 들인 세금 밭이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구두쇠로 소문난 경강상인(京江商人)이건, 공짜 좋아하기로 제일인 사대부 관료조차 한강 제 물 쓰듯 화폐를 남발했다. 심지어 세도가 윤원형(尹元衡, ?-1565)의 첩 난정(蘭貞)은 백성도 먹지 못할 쌀밥을 두모포 물고기 밥으로 매년 두 세 번씩 뿌려주기 놀이로 소문이 파다했다. 어숙권(魚叔權, 16세기)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백성의 먹을 것을 앗아다가 강물 고기에게 밥을 주니 이것을 앗아서 저것을 주는 것이 까마귀나 제비가 개미나 벌레를 잡아먹는 것보다 더 심하다고 수근댔다’고 기록해 두었다. 또한 윤원형 대감이 죽기 직전, 나룻배만큼 큰 흰빛 물고기[白魚] 두 마리가 죽어 강물위로 솟아오르자 이를 잡은 어부가 놀라 조정에 바치는 괴기한 일이 일어났으므로 성균관 유생들이 조롱하여 말하기를 ‘저만큼 큰 물건이 상공(相公, 여기서는 윤원형을 뜻함)의 밥을 기대하여 바다에서 멀리 왔다가 사람에게 잡히고 말았으니 가엽구나’라고 풍자하였다. 


신윤복(申潤福, 1758-1830 무렵)의 그림은 저 기생(妓生)을 데리고 노는 사대부 풍류를 노래한 것이다. 두모포 강기슭 어느 곳에선가 음탕한 놀이 드러내놓고 벌어졌을 터이니 여기저기 기웃기웃 이런 소재 수집하던 화가 신윤복의 눈길에 잡힌 어느 일행 행락(行樂)이라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알길 없다. 화가는 화폭에 ‘피리 소리 늦바람으로 들을 수 없고[一笛晩風聽不得] 흰 갈매기 꽃물결 따라 나른다[白鷗飛下浪花前]’는 화제를 써넣었는데 그저 갈매기 나른다는 압구정(狎鷗亭)이 강 건너 보이는 홍등가 나루터인 두모포라 짐작할 따름이다. 피리소리조차 듣지 못한 채 오로지 여색(女色)에 빠진 두 청년 난봉꾼의 표정이 볼만하다. 서 있는 중년 양반의 표정이 씁쓸한데 어쩌면 청년들은 권력을 누리는 탐관오리요, 중년의 인물은 기생을 상납해서 이권(利權)을 따내려는 사업가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선지 여덟 사람 몸짓이 한결같지 않고 제각각인데 기생의 표정이야 그렇다치고 배 끝에 노 저으며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살피는 사공의 표정이 자못 음흉하다. 탐욕으로 얼룩진 세상을 탄식하며 죽림(竹林)의 삶을 살던 생육신(生六臣)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은 일찍이 경계하였다. 부패와 타락으로 점철될 저 지나친 놀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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