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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청송당, 소나무를 스치는 당쟁의 바람

최열

그대 멀리 떨어져 있어도      之子之遠

그 도를 걱정하는구나        而道之憂

언제나 만나 볼 수 있을까     曷之觀乎

꿈에서 나마 만나 놀았으면     要之夢遊


- 조식, <성수침 어른께 드림>, 『 남명집(南冥集)』


정선, <청송당>, 『장동팔경첩』, 종이, 33.1 × 29.5 cm, 국립중앙박물관.


나로부터 17대를 거슬러 가면 초계 최씨(草溪 崔氏)의 중시조 최산두(崔山斗, 1483-1536)가 계시는데 그분은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양팽손(梁彭孫, 1488-1545), 기준(奇遵,1492-1521)과 더불어 기묘사학사의 한분이다. 개혁을 지나치게 밀어붙이다가 역풍을 만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당한 저 젊은 사학사의 중심에 사림의 태산북두라는 조광조가 있다. 정선의 그림 <청송당>은 바로 그 태산북두 조광조 문하에서 자라난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이 살던 집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 그림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까닭은 그 집의 주인 성수침이 내 시조할아버지 친구의 제자였기 때문인 셈이다. 그림 <청송당>은 두 점이 있는데 하나는 간송미술관 또 하나는 국립중앙박물관이다.


청송당 앞 냇가 어느 어간의 큰 바위에는 ‘유란동(幽蘭洞)’이란 글씨가 있었고 또 뒷날 청송당이 사라지자 누군가가 청송당이 있던 터라는 뜻으로 ‘청송당 유지(聽松堂 遺址)’란 글씨를 새겨두었다. 지금 그 글씨 바위는 경기상업고등학교 뒤뜰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게 학교 터에 들어가서 그렇게나 보존된 것이지 만약 학교담장 너머 갖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마을로 바뀌었다면 흔적조차 사라지고 말았을 거다. 그 터의 원래 주인 성수침은 스물일곱 살 때인 1519년 기묘사화로 스승과 그 친구들을 포함한 당대의 인걸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떠나는 걸 지켜보고는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곳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경복궁 바로 뒤쪽이어서 숨었다 하기에는 궁궐이 너무 가까웠다. 그렇지만 그 동네 이름이 유란동임에서 알 수 있듯 계곡이 깊은 땅이라 웬만한 산속보다도 훨씬 깊은 땅이었다. 사실 한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머물며 벼슬에 나가지 않고 있어도 궁궐 소식을 훤히 꿰고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저 남부지역 재야산림 따위를 생각한다면 궁궐 바로 뒤에 있으면서도 둔세의 거사처럼 살던 성수침이야말로 참된 성시은자(成市隱者)였음이 분명하다.


그래서였을 게다. 동시대의 조식(曺植, 1501-1572)이 어린 시절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가 평생 우정을 나누었고 또 세상을 떠나자 이황(李滉, 1501-1570),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이이(李珥, 1536-1584)가 나란히 글을 써서 그의 생애를 추모했다. 학문과 행장 모두에서 눈부신 업적을 쌓은 위대한 인물이자 여러 당파에 의해 비조로 추앙받는 이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여 애도를 한 것이다. 이런 일은 그 뒤 당파로 갈라진 이래 찾아볼 수 없던 일이다.


그런데 본시 이 땅 일대는 임진왜란 이후 당파의 갈래가 뚜렷해지면서 서인당의 장동김문이 독점하다시피 하던 터라 동인, 남인, 북인 당원은 범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였을까, 서인당의 윤순거, 윤선거 형제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청송당을 1668년에 중건했다. 물론 그 주역 윤순거, 윤선거 형제는 성수침의 외손자 니까 이런 추숭사업이 당파의 일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이 곧 노론, 소론 당으로 나뉘고 보니 저 청송당은 갈래갈래 찢어져 가는 당파의 소란스러움이 교차하는 거점처럼 보인다. 이제 청송당은 사라졌지만, 당쟁에서 비켜선 채 흐르는 물과 불어대는 바람에 씻겨 날려 버리며 살던 성수침과 청송당이란 이름은 여전하다. 성수침의 삶이 워낙 맑아서일 텐데 그 땅 유란동의 기운이며 그 이름 청송당도 한몫했을 터이다.


가끔 자하터널을 향하거나 창의문 고개를 넘을 적에 경기상업고등학교 교정을 스치곤 하는데 그때마다 청송당에서 흘러나오는 그 맑은 노랫소리, 당쟁의 피바람 따위는 흔적도 없는 그 노래가 들리곤 한다. 조식이 성수침에게 보내준 시 구절로 ‘노인성 뜨는 남쪽 끝 땅’에서 ‘빨래하는 직녀가 머무는 북쪽 땅’에 사는 벗을 그리워하는 가락인데 그리도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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