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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권세 있는 주인에겐 모습 감추는 대은암

최열

술 취해 바위틈의 눈 씹어 먹고      醉嚼巖間雪

광기 부리다 두건도 잃어 버렸네     狂遣頭上巾

이런 때 급하게 흘러 흩어지고      時應投瀨散

이런 곳 절로 맑아 머물겠지        境自着淸眞


- 박은, <만리뢰>,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


정황, <대은암>, 18세기, 22.7 × 16.3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대은암(大隱岩)은 지금 궁정동 백악산 기슭 청와대 서쪽 끝에 붙은 육상궁(毓祥宮) 바로 북쪽에 있는 큰 바위다. 지금은 길도 뚫리고 집도 짓고 웬 군부대가 들어와서 그 흔적조차 볼 수 없지만, 예전엔 개울물이 흐르고 바위가 제법이어서 무척이나 깊고 아름다웠다. 대은암을 그린 그림은 정선이 그린 두 점과 정선의 손자 정황이 그린 한 점 합해서 모두 세 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정선의 작품 두 점은 가까이서 본 풍경으로 육상궁이며 개울가와 민간의 띠집까지 아기자기하게 그렸지만, 정황의 작품은 멀리서 구도를 잡아 백악산 봉우리가 우뚝하고 육상궁은 하단 오른쪽으로 배치한 다음 복판에 담벼락을 타고 올라가는 중턱 기슭만을 그림으로써 바위는 보이지 않게 해 두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대은암과 더불어 만리뢰(萬里瀨)를 하나로 엮어 두었는데 정선의 그림에 등장하는 개울이 바로 만리뢰다. 『동국문헌비고』에 따르면, 만리뢰는 대은암에서 시작해 경복궁 서쪽으로 돌아들어 갔다가 삼청동 물줄기와 합쳐서 혜정교를 지나 대광통교 쪽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개울이다. 저 만리뢰의 발원지이기도 한 대은암은 당대 문장의 권력으로 영의정에 이르른 남곤(南袞, 1471-1527)의 집 바로 뒤에 있었다. 이곳에 해동강서시파의 두 거장 박은(朴誾, 1479-1504)과 이행(李荇, 1478-1534)이 드나들곤 했다. 박은은 「이행과 함께 남곤의 북원(北園)에 노닐며」에 다음처럼 기록했다. 


“주인(*남곤)은 산봉우리를 가졌으니 그것이 우리들(*박은, 이행)의 향로인 셈이고, 주인이 계곡을 가졌으니 그것이 우리 집 처마 낙숫물인 셈이네. 주인의 벼슬과 권세가 대단하여 문 앞에 찾아온 수레 많기도 하다. 3년 가야 하루도 찾지 않는 동산이라 산신령이 있다면 꾸지람을 당하리라. 찾아온 손님 다른 사람이 아니라 주인과 오래 사귄 벗이지. 대문 앞 지나며 차마 안 들어갈 수도 없고 냇물 따라 되돌아가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라 바위틈에 잠시 쉬니 풍경을 다시 만나 참으로 반갑구나. 여울에 감춰진 곳, 안개 개어 나를 위해 열리니 학과 원숭이도 놀라 달아나며 울지 않는구나. 금이며 옥이며 가진 주인, 열 겹으로 싸 두어 누구에 함부로 주리오. 자물쇠 굳게 채워 밤중에도 지키지만 대낮에 산이며 냇물을 옮겨 갈 줄은 모르는구나. 오래 앉아 날 저물고 흰 구름 먼 산봉우리에서 일어난다. 무심하기로 치면 내가 ‘저 구름보다’ 못하여 자취 남기니 스스로 부끄럽구나.” (박은, 『읍취헌유고』)


박은과 이행 두 사람이 이곳에 올적이면 정작 집주인 남곤은 승지로 새벽에 출근해 깊은 밤에야 퇴근하므로 서로 마주치지 않았는데 이날 박은이 이행과 함께 술을 가지고 남곤의 집 뒷동산에 놀았으나 남곤이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이에 박은이 그 바위를 ‘대은암’이라 이름 하고, 그 여울을 ‘만리뢰’라고 이름 하였으니 희롱하여 놀린 것이다. 주인은 바위가 있는 줄조차 몰랐으므로 대은이 되는 셈이고, 여울은 만 리나 떨어져 있는 셈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래서 이 시를 바위에 적어 두고 돌아왔다. 


권세를 누리던 남곤에겐 제 모습마저 감추던 바위가 저 박은과 이행 앞에 나타나 함께 어울리곤 했으니 자연은 해맑은 이들을 사랑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갑자사화가 일어나 이행은 거제도로 귀양가고 박은은 죽임을 당했으니 또 자연은 사랑하는 사람을 일찍 거두어 가시기도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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