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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영의정 상진의 집에 모인 청년들의 선택

최열

내가 죽은 뒤 행적을 기록할 적에 달리 적을 것은 없다

다만 공(公)이 만년에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여

얼근히 취하면 ‘감군은(感君恩)’ 한 곡조를 타는 것으로

스스로 즐겼다고 쓰도록 할 것이다.


- 상진, 『유언(遺言)』(이긍익 지음, 「명종조 고사본말」, 『연려실기술』)


작자미상, <계회도-상진 집에서 바라본 백악산>, 1520년대, 비단, 95 × 57.5 cm, 호암미술관 소장.


젊은 날 그토록 가까이 지내다가도 세월이 흐르면서 살아가는 길이 길다 보면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강현(姜顯, 1486-1553), 김섬(金銛, ?-?), 박세옹(朴世蓊, 1493-1541), 상진(尙震, 1493-1564) 그리고 채무택(蔡無擇, ?-1537), 허항(許沆, ?-1537), 황사우(黃士祐, 1486-1536) 이들 30대의 젊은 청년들은 1506년 9월에 일어난 중종반정 이후 관직에 진출한 개혁청년들로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개혁정치가 일으키는 폭풍우 속에서 단련된 이들이었다. 1519년 12월 기묘사학사, 기묘팔현과 같은 풍운의 개혁당 인물들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사와 유배를 당함에 텅 빈듯한 한양 땅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다음 해 5월 광풍 속에서 살아남은 기묘사림의 한 인물 김식(金湜, 1482-1520)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또 다음 해 10월 기묘사림의 우익이란 평을 듣던 안당(安瑭, 1460-1521) 부자와 더불어 기묘사림과 교유하다가 사화를 목격하고서 유람과 시서화, 음악에 탐닉하던 최수성(崔壽峸, 1487-1521)이 모두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는 신사무옥(辛巳誣獄)이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리고 겨울이 오자 이들 살아남은 청년들은 텅 빈 가슴을 쓸어내리며 서로 위로의 말이라도 주고받기 위해 한자리에 모이기로 했다. 그림 <계회도-상진 집에서 바라본 백악산>을 살펴보면 이들이 모인 곳을 짐작할 수 있는데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남대문 쪽으로 가다가 남대문로지하쇼핑센터 8번 출구가 있는데 이곳 중구 남창동 2-4번지에 상진의 집터 표석이 서 있다. 이곳 부근 특히 지금 한국은행 본점 부근은 소나무고개[松峴]라고 해서 그 이름처럼 소나무가 많은 곳이었는데 이 그림의 하단 중앙에 바위처럼 솟은 언덕 위로 곧게 솟은 소나무 몇 그루가 바로 그곳이다.


화폭 상단 중앙에 삼각형으로 우뚝 솟은 산이 백악산인데 왕국의 땅을 호령하는 진산(鎭山)답게 우뚝하다. 산의 중앙을 바위처럼 하얗게 처리하고 양옆을 흙과 숲처럼 검게 처리하여 마치 외유내강(外柔內剛)을 형상화한 느낌이다. 바위, 흙, 숲이 겹겹이 싸고 있어 중첩의 강인함이 절로 느껴지는 데 지금껏 보아오던 여느 백악산 그림보다도 위엄이 넘치는 것이다. 뒤쪽으로 삼각산과 멀리 도봉산이 아득하여 백악산의 장엄을 더욱 강화하는 풍경 연출도 좋다.


하지만 이 그림의 핵심은 화폭 중단의 안갯속을 가로질러 도열하듯 서 있는 나무숲이다. 16세기 초의 한양이 도심 한복판을 가로질러 나무 숲을 조성한 것인지 아니면 그 도심을 가로지르는 청계천 변을 따라 나무를 일렬로 심어 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 그림에서는 백악산을 향해 경배하는 만조백관이나 백성이거나 또는 억울하여 떠나지 못한 채 도성에 머물고 있는 기묘사림의 혼백처럼 보인다.


그러나 풋내기 관료 시절 기묘사림의 생애를 추모하고 저 사림의 이상과 가치를 계승해 나가자며 소나무 아래서 맹약을 했다고 해도 흐르는 세월과 유혹하는 권세 앞에 갈가리 찢겨 누군가는 탐욕의 길을 가고 또 누군가는 지사의 길을 선택하였으니 인생 무상함이 여기에도 있음을 알겠다. 이날 모임에 참가했던 채무택, 허황, 황사우 세 사람은 뒷날 간악한 김안로(金安老, 1481-1537) 일당이 되어 이른바 정유삼흉(丁酉三凶)이라 불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상진, 강현, 박세옹, 김섬 네 사람은 저들의 불의와 탐욕을 비판하며 고난의 길을 걸었지만, 그 이름은 아름다운 향기를 남겨두었던 것이다. 영의정을 포함 16년간 정승을 지낸 상진은 청렴, 관용의 관료를 상징하는 인물인데 상진의 집터를 지나갈 때면 그가 남긴 유언 한마디가 귓가를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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