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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모란꽃 봉오리같은 백악산의 풍속

최열

춤추는 허리마냥 가늘다 하더니      皆言舞腰細

푸른 눈썹이 길다 또 일러주네       復道翠眉長

만약 한번 씽긋 웃어 준다면        若敎能一笑

남의 애를 끊는다 알만도 하지       應解斷人腸


- 정도전(鄭道傳), 「버들 노래[詠柳]」, 『삼봉집(三峰集)』


엄치욱, <백악산>, 종이, 39 × 28 cm,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의 진산(鎭山)이자 한양성곽의 주산(主山)인 백악산을 그린 화가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백악산 그림은 정선(鄭敾, 1676-1759), 김윤겸(金允謙, 1711-1775), 정황(鄭榥, 1737-19세기 초), 김득신(金得臣, 1754-1822)과 엄치욱(嚴致郁, 1770 무렵-?) 이렇게 다섯 화가의 작품 뿐이다. 그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작품은 김윤겸이 그린 것이다. 산의 양쪽에 날개를 달아 둔 것처럼 광활하게 펼쳐나가는 형상이어서 훨씬 장엄해 보이고 또 하늘 여백엔 글씨로 꽉 채워 조형의 맛을 크게 살리고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다른 화가들의 백악산은 본래의 생김새인 삼각형에 충실하여 웅장하되 단아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서 멈추고 있다.


엄치욱의 <백악산>은 다섯 작품 가운데 가장 곱고 아름답다. 그가 이처럼 부드럽고 곱게 그릴 수 있었던 까닭을 생각해 보면 백악산을 그리기에 앞서서 세상에 널리 소문난 바처럼 그 산의 모습이 활짝 펴기 직전 한껏 부풀어 올라 곧 터질 것만 같은 모란꽃 봉오리와도 같다는 이야기를 충분히 새겼음을 알려준다. 실제로 봉우리를 왼쪽으로 치우치게 배치하고 한쪽은 가파르게, 한쪽은 굴곡의 깊은 맛이 솟구칠 듯 가파르면서도 완만하게 처리하였다. 또 두툼한 산 주름이 꿈틀거리면서 휘어지듯 반복함에 따라 마치 살아 있는 기운이 샘솟는다. 그리고 태점(苔點)을 전면에 흩뿌리듯 찍음으로써 눈 내리듯, 잎이 날리는 듯 활기가 넘치는데 무엇보다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는 바위와 나무숲이 저 태점과 어울려 변화의 울림을 크게 북돋운다. 끝으로 이 그림이 다른 백악산 그림과 다른 점은 능선 양쪽에다가 성곽을 띠처럼 그려넣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이 산이 한양을 수호하는 주인임을 천명하고 있다. 유본예는 『한경지략』 「백악(白嶽)」에서 다음처럼 찬양했다.


“도성 북쪽에 있다. 평지에 솟아 있다. 경복궁이 그 밑에 있고 서울을 둘러싼 여러 산 가운데 이 산이 정북을 가로막았다. 개국 초기에 궁궐을 짓고 이 산을 진산으로 한 것이 잘 되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의 「면악(面嶽)」에서는 고려 숙종 때 이곳을 조사한 기록을 보면 백악산이야말로 산형수세(山形水勢)가 옛글에 부합한다고 지적하고 바로 이곳 백악산이야말로 주류골간의 중심지로 남쪽을 향하는 곳이니 이러한 형세에 따라 도읍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견해를 따른 이는 태조 이성계였고 그의 왕국은 오백년 성세를 누리기에 이르렀으며 그 뒤로도 일백 년을 훨씬 넘겨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도의 위용을 과시하는 중이다.


왕기(王氣)를 뿜어내는 백악산의 기운을 조절하는 백악신사(白嶽神社)가 고종 때인 1863년 이후 편찬한 『동국여지비고』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오백 년 동안을 존재해 왔다. 아마도 그 신사의 주인인 정녀부인(貞女夫人)이 그곳에 머무르며 백악의 기운을 모란꽃처럼 곱디곱게 다스린 건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1863년 이후 언젠가 신사를 철폐하고부터 왕국은 난국에 빠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신이 다스리는 산악이라서였던지 풍기(風氣)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침범하곤 했다. 1461년 그러니까 세조가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끝내 죽여버린 뒤 세상인심이 들끓는 가운데 이곳 백악의 곳곳에서도 흉흉한 기운이 끊이질 않았다. 한성부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매일 밤 불을 켜 촛불시위 하듯 하는 스님이 그치질 않았으며 그 거점인 초암(草庵), 굴암(窟庵)이며 또한 연산왕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 때인 1508년에도 높고 깊은 바위가 있는 밀덕(密德)에서 양반집 부녀나 잡인들의 질탕한 놀이인 유연(遊宴)을 펼쳐대곤 해서 이를 금지하는 조처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그 놀이는 천년왕국을 설계했던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보고 읊었던 <버들 노래> 풍경 같은 것이었을까.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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