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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탑동의 추억들, 문예와 3.1민족해방운동의 요람

최열

다행히 안죽고 살아 있다가 이 좋은 소식 듣는구나           未死得聞消息好

한창 만발한 국화꽃 곁에서 미친 듯 노래하여 어지러이 춤추네     狂歌亂舞菊花傍


- 김택영, <의병장 안중근이 나라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을 듣고>, 『창강집(滄江集)』(1412)


이방운(전), <탑동계회(塔洞契會)> -탑동연첩(塔洞宴帖) 중, 종이, 19.6 × 27 ㎝, 개인소장.


19세기 전반기 집정자 김조순(金祖淳, 1765-1831)은 당대 예원의 종장과 어릴 적부터 우정을 쌓은 이래 평생을 서로 경애(敬愛)하는 사이였다. 소론가 출신으로 신위(申緯, 1769-1845)가 위태로움을 겪을 때 막강한 실력자 김조순은 그를 진심으로 옹호하여 여러 차례 힘이 되어 주기도했다. 탕평 정치의 계승자인 김조순은 비록 당파가 다르다고 해도 사람을 아우르는 포용력을 갖추고 있었으니 1812년 7월 신위가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떠날 적에 ‘넓은 학식 큰 문장[博學宏詞]’이라고 칭송하는 전별시를 짓기도 했으니 말이다. 김조순의 이같은 후원 덕분이었던지 신위의 자하문하에는 당파와 가문을 가리지 않고 소론당은 물론 노론당, 남인당 그리고 중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세대 거장들이 드나들곤 했던 것이다. 물론 그 근본은 신위의 역량에서 비롯하는 것이겠으나 김조순의 후광이 없었다면 그렇게 폭이 넓었을지는 의문이다.


1803년 7월 2일 훈련도감(訓鍊都監) 대장 김조순은 탑동암(塔洞庵)에서 휘하의 군사 108명에게 잔치를 베풀면서 몇몇 장수를 따로 불러 모임을 가졌다. 이 그림 <탑동계회(塔洞契會)>는 당시 장면을 그린 것으로 화폭 중앙 상단 멀리 오똑 솟은 원각사(圓覺寺) 십층석탑이 보인다. 이 작품은 2012년 4월 13일 옥션단경매에 출품되었을 때 그 작가를 이방운(李昉運, 1761-1822 이후)이라고 했다.


이 작품은 모임 그림의 특징을 따라 화폭의 복판에 6명을 배치하고 둥그런 평지를 두어 중심부를 확보한 뒤 그 주위를 빙 둘러나무로 감싸두었다. 이런 구도는 모임 그림의 전형으로 애용되어오던 것이지만 왼쪽 하단은 절벽을 암시하는 텅 빈 여백 그리고 그 반대쪽인 오른쪽 상단에는 해가 걸려 있는 삼각산(三角山) 봉우리를 배치하여 사선의 긴장구도를 연출한 것이 빼어나다. 그리고 이 그림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상징으로써 중앙 상단의 원각사십층석탑이 뽐내는 자태가 매우 아름답다. 그 왼쪽으로는 울창한 나무에 둘러싸인 두 채의 거대한 기와집을, 오른쪽으로는 숲이 뻗어나가다가 아래쪽으로 두 채의 집을 배치하여 이곳이 번화한 도시임을 암시해 두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석탑은 그 터에 자리잡고 있던 사찰인 원각사 가람의 주인행세를 하던 것인데 연산 때 폐지하여 기생집인 연방원(聯芳院)으로 만들었다가 중종 때 철거하여 지금껏 그 탑만 덩그렇게 남았다. 그런데 도심에 우뚝 솟은 이 흰빛의 드높은 탑은 18세기 문예부흥기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된 적이 있다. 백탑시사(白塔詩社)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을 중심으로 하는 당대의 중인 문사들의 단체였다. 이들은 모두 탑동(塔洞)에 살았는데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1766년 5월 이곳으로 이사를 와 합류하면서 유득공(柳得恭, 1749-1807), 서이수(徐理修, 1749-1802),박제가(朴齊家, 1750-1805)와 더불어 백탑시사의 활동이 제대로 시작되었다. 그 장소는 주로 서상수(徐常修, 1735-1793)의 서재인 관재(觀齋)였는데 대개 1779년까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검서관으로 발탁되면서 또 다시 백탑 일대는 빈 터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한 세기가 흐른 뒤인 1896년 영국인 브라운이 흰빛의 원각사탑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이곳 일대를 공원으로 개설하자고 정부에 건의함에 따라 또 다시 이 탑은 저 파고다공원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이 탑은 1919년 3월 1일에 특별한 장면을 지켜 본 역사의 증인이다. 민족대표들이 사전 연락조차 없이 독립선언 장소를 음식점인 태화관으로 바꿔버렸다. 이에 학생대표들은 태화관에 들러 항의 방문한 다음 처음 예정했던대로 이곳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른 뒤 시위에 나섰다. 이로 말미암아 이 탑은 3.1민족해방운동의 발화지점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된 것이다. 지금은 노인들의 안식처가 되어 어딘지 야외 양로원같은 분위기를 짙게 풍기고 있지만 3.1민족해방운동의 발원지다운 기분을 회복하면 좋겠다. 바로 그 시대의 4대 시인 가운데 한 분인 김택영((창강 滄江) 金澤榮, 1850-1927)이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의 의거 소식을 듣고 춤추었던 그 마음처럼 아름답고도 슬픈 노래가 흐르는 장소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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