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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정의가 흐르는 의금부를 복원하는 꿈

최열

장백산은 바다를 끌어당겨 마천령에 이르고        白山控海摩天嶺 

흑룡강이 땅을 가로질러 두만강에 닿았더라        黑水橫坤豆滿江

여기는 이후(李候)가 말을 달리는 곳           此時李候飛騎處

오랑캐가 절로 와서 항복하는 것을 실컷 보리라      剩看胡虜自來降


- 유성원, <송별가(送別歌)>, 『육선생유고』


정선, <의금부(義禁府)>, 1729, 종이, 34.5 x 46.5 cm, 개인소장.


의금부(義禁府)는 왕명을 받들어 추국(推鞫)하는 일을 관장하는 관아로 금오(金吾) 또는 왕부(王府)라고도 불렀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부정하여 단종 복위거사를 진행하다 발각당함에 귀가하여 자결한 사육신 유성원(柳誠源, 1426-1456)이 지은 『의금부 제명기(題名記)』에 따르면 의금부는 도적이나 폭력배를 형벌하는 형조(刑曹)와는 다른 특수조직으로 반역과 같은 사건 및 처결이 아주 어려운 사건만을 담당하였다. 관리 및 양반에 의한 국가와 강상(綱常)에 관한 죄인들을 다루는 특별재판소였던 것이다. 이처럼 공직자와 권력자의 범죄를 다스리던 의금부가 조선시대 때부터 있었음을 생각할 때 오늘날 저 의금부 정신을 잇는 공직자 감찰부 및 특별재판소 하나 없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2011년 공직자범죄행위 근절을 목적으로 삼는 이른바 ‘부정청탁 및 금품 수수 금지법’ 다시 말해 ‘김영란법’이 발의된 지 무려 5년이 지났는데도 입법책임을 지닌 여야 국회의원 모두가 통과를 가로막고 있다. 왜 곧장 제정하지 않고 있는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의 온상이 바로 국회 아니던가. 서글프고 서글픈 일이다.


정선(鄭敾, 1676-1759)의 이 <의금부>는 1729년 여름 어느 날 의금부 관원 모임을 그린 기록화다. 이 그림의 별지에 참석자 명단이 있는데 다른 이들의 경우 ‘무과(武科)’ 또는 ‘사마(司馬)’라는 표기가 있음에도 정선의 경우 ‘병신(丙辰, 1676)’ 이라는 표기만 있을 뿐, 그런 표기가 없음을 보면 과거시험을 통한 관직진출이 아니라 음직(蔭職)으로 나아갔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 이 무렵 의금부 종5품의 도사(都事)로 임명되었다. 의금부 도사는 관리의 감찰과 규탄을 수행하는 직책이었으므로 오늘날의 검찰관(檢察官)이었다. 의금부 도사는 돌아가며 매일 당직을 하는데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따르면 당직청(當直廳)은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밖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임진왜란 이후 왕이 창덕궁에서 집무를 보면서부터 당직청을 추가로 증설한 듯하다. 그 당직하는 도사는 죄수를 가두고 체포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정선도 당직 날 사건이 생기면 죄인을 체포, 구금하는 일을 했을 것이다. 54살의 저명한 화가 정선이 당직 도사 임무를 수행할 때면 호령을 하며 위엄있는 모습을 갖추었을 터이니 그 장면이 궁금하고 또 궁금하다.


의금부는 중부 견평방(堅平坊)의 종로 1가 도로변이다. 김정호(金正浩, 1804-1866)가 제작한 <수선전도(首善全圖)>를 보면 지금 종로 1가 스탠다드차티드은행 한국 본사 건물 일대인데 종각역 네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또한, 죄수를 관장하는 전옥(典獄)은 중부 서린방(瑞麟坊)의 의금부 길 건너편 영풍빌딩 일대에 있었다. 의금부와 전옥서가 대로 네거리를 사이에 둔채 마주 보게 함으로써 그 위세를 두렵게 하였던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이 건물은 세조 때 감찰(監察) 정보(鄭保)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서 그가 살던 집에 의금부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정보는 정몽주의 손자로 사육신을 옹호하다 한명회에게 미움을 사 끝내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그러고 보면 의금부는 서글픈 사연이 얽힌 땅이라 억울한 죄인은 풀어주고 악독한 죄인은 처단하는 정의로움의 장소로 제격인지도 모르겠다.


멀리 남산을 배경으로 삼고 그린 그림에는 ‘ㄴ’자 건물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여러 채가 들어서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정보의 집을 의금부 정아(正衙) 대청(大廳)으로 삼았고 남쪽에는 호두각(虎頭閣)이 있으며 서쪽에 연정(蓮亭)이 있고 서쪽의 세 칸은 모두 관원중 경범죄인, 동쪽 13간, 남쪽 15간 모두 중죄수를 가두며 부속건물로 경력소(經歷所)와 당직청이 있다고 했다. 그림을 통해 각각의 건물을 유추할 수 있지만 지금 의금부 터는 흔적조차 찾을 길 없이 거대한 고층건물이 들어서 있을 뿐이다. 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이곳 종각 네거리 의금부 터를 지날 때마다 이곳에 부정과 부패한 공직자를 처벌하는 공직자 감찰부와 재판소인 ‘의금부’가 들어서는 꿈을 꾸곤 한다.


유성원은 자신이 제명기를 썼던 의금부에서 육시(戮尸)의 형벌을 당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가 남긴 단 한편의 호쾌하기 그지없는 시 <송별가(送別歌)>가 슬픈 까닭은 정의로워야 할 의금부가 왕의 개가 되어 사육신같이 정의로운 이들을 처단하는 기관으로 전락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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