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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줄 서는 자들의 탐욕이 보이는 자리 자하동에서

최열

자래로 큰 뜻 품고 숨은 자는            乃知陵藪居

높은 산 깊은 숲엔 살지 않았네          未爲大隱計池柳

어찌 꼭 새와 짐승을 벗삼고            何必群鳥獸春來

매미가 허물벗듯 세속을 떠나야만 하나       絶物同蟬蛻

 

- 홍대용, <잡영(雜詠)>, 『담헌서(湛軒書)』


정황, <이안와수석시축(易安窩壽席詩軸)>, 1789, 종이, 25.3 × 57.3 cm, 개인소장.


1786년 9월 3일 남기한(南紀漢 1726-95이후)이 회갑을 맞이하여 절친한 벗들을 불러 시회를 열었다. 남기한은 평생 출사하지 않고 유학(幼學)으로 생애를 살며 유유자적 시서화금기(詩書畵琴碁)에 젖어들던 인물이었다. 의령남씨 가문으로 남인당에 속한 남기한은 그러나 딱히 당색에 구애받지 않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주이씨 가문 출신 서예가 이한진(李漢鎭, 1732-1815 이후)같은 남인 인사는 물론, 안동김씨 가문의 김호순(金顥淳, 1726-95), 해주오씨 가문의 오재순(吳載純, 1727-92),기계유씨 가문 출신 문장가 유한준(兪漢雋 1732-1811)과 같은 당대의 노론 인사와 어울렸다. 남기한은 역시 이날 모임에도 모두를 초대했다. 특히 이날은 화가 정황(鄭榥 1737-?)도 특별히 불렀다. 기록화를 남겨야 했기 때문이다. 


남기한의 집은 자하동(紫霞洞)으로 오랜 세월을 대대로 살아온 세거지였다. 저택에는 별채가 따로 있었는데 그 이름을 이안와(易安窩)라 했다. 정황이 그린 <이안와수석시축(易安窩壽席詩軸)> 화폭을 살펴보면 여덟 명이 방석 위에 앉아 있고 늦게 도착한 두 사람이 막 입장하여 자리가 마련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안와는 가을날 꽃나무들이 화려하고 또 담장가를 꾸며 수석과 화분을 갖춰서 아주 우아하다. 화폭 왼쪽에 뾰족이 솟은 산은 생김새로만 보면 자하동 기슭을 만들어낸 백악산이지만 자하동에서 멀리 보이는 남산인 듯도 하다. 왜냐하면, 산 꼭대기에 큰 나무가 남산의 소나무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자하동이 남기한의 오랜 세거지였듯이 이웃 청풍계(靑楓溪)는 안동김문의 오랜 세거지였으며 그 이웃 인왕산 기슭 옥류동(玉流洞)은 기계유씨의 오랜 세거지였다. 그런 까닭에 서로 당색이 달랐지만 자하동 주인 남기한과 청풍계 주인 김호순은 어린 시절부터 절친한 벗으로 어울렸고 또 옥류동 주인 유한준은 6살이나 손아래였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자하동은 지금 종로구 청운동(淸雲洞)의 백악산 서쪽 기슭을 가리킨다. 흔히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부르는 창의문(彰義門)을 넘어가는 고갯마을부터 자하동굴이 뚫린 비탈진 마을까지를 자핫골[紫霞洞]이라고 하는데 저녁노을에 물든 불그스름한 안개가 그리도 아름다웠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보면 시야가확 트여 남산이 잘 보인다. 그러니까 화가가 화폭 상단 구석에 그려 놓은 산은 자하동에서 바라본 남산이다. 


참석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한진은 제자(題字)를, 유한준은 그림 양쪽에 서문을 썼다. 이한진은 퉁소를 잘해서 홍대용의 거문고와 짝을 이루던 인물로 당대 전서(篆書)의 대가였는데 그야말로 ‘서예계의 신선(神仙)’이라 불리우고 있었다. 고문주의자(古文主義者)로써 예술의 독자한 가치를 옹호하고 있던 유한준은 박지원과 당대 문장 제일인 자리를 다투던 인물로 ‘사원(詞苑)의 거장’이란 칭송을 받고 있던 동갑내기 친구였다. 서예와 문장의 쌍벽이한 자리에 참석했으니까 글씨와 문장은 당연히 이들 쌍벽의 몫일 수 밖에 없었다. 유한준은 그 날 이야기를 꼼꼼하게 기록해 나갔고 이한진은 그림과 어울릴 만큼 우아한 필체로 써내려 갔다. 


궁궐 가까운 곳 자하동, 청풍계, 옥류동에 살던 이들이 흰머리 흩날리던 이 날의 모임에 화제를 쓴 이한진과 함께 거문고의 짝을 이룬 홍대용(洪大容, 1731-83)이 노래한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 청와대 가까이 집을 마련해 두고 전화 울리길 기다리며 자리를 노리는 혈안들이 즐비한 요즘이다. 서로서로 높고 좋은 자리 차지하려 줄 서는 자리 그 반대편인 이곳 자하동에서 바라보니 그 탐욕이 어리석고 또 어리석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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