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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심사정, 남산에서 북한산을 보다

최열

옆으로는 남산을 끼고 앞으로는 관악산이 보이니     傍對南山煎冠岳 

짙은 신록과 연한 분홍 빛이 아름다움을 다투네     濃靑淡赭紛爭姸

작은 섬에 드리운 버들 사립문에 비쳐          小嶼垂楊映柴門

다시금 강가에다 전원을 만들었네            還從水國開園田


- 강세황, <소동파의 연강첩장도(烟江疊嶂圖)에 차운하여 쓴 창랑정(滄浪亭)>, 『표암유고(豹菴遺稿)』


<경구팔경(京口八景) -1 남산에서>, 1768, 종이, 13.5 × 24 cm, 개인소장.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미술사학자 이동주는 『우리나라의 옛 그림』이란 책에서 심사정(沈師正, 1707-69)이 그린 <경구팔경(京口八景)> 여덟 폭을 가리켜 “도대체 서울 근교의 어디인지 알 길도 없거니와 과연 이것이 서울 근교일까 의심나는 화면이 하나둘이 아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심사정의 벗인 강세황(姜世晃, 1713-91)은 이 그림 옆에 붙인 글에서 “깎은 절벽, 높은 산마루는 구름 하늘을 높이 받치고 큰 소나무는 안개 낀 마을을 가리어 어른거리는데, 여기에 하늘 밖 기이한 봉우리 우뚝 서서 푸른 병풍 치듯 하였으니 물론 화품을 떠나 이런 풍경이 어찌 왕성 근처에 있는 것일까”라고 썼다. 강세황은 벗의 그림을 보고 아주 감동했던 모양이다. 정말 우리가 사는 이곳 도성에 어떻게 이런 풍경이 있느냐[王城近地耶]고 탄식을 금치 못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상상력으로 만든 게 아니라 사진을 찍은 것처럼 과장됨 하나 없는 실경이다. 남산에는 소나무가 참으로 많았다. 그 소나무 아래서 벗들 몇이 모이고 보니 그 바로 옆 절벽인데 실로 남산의 서쪽 기슭은 가파르게 깎아지른 절벽 지대였다. 화폭 상단에는 멀리 북한산 봉우리가 북쪽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오른다. 이쪽 석벽과 저쪽 석봉이 서로 마주 응대하는 모습이라 그 사이를 수놓는 공간감이 아득하다.


북한산 바로 아래로는 경복궁의 배경을 이루는 백악산이 마치 용이나 되는 것처럼 등 줄기를 길게 늘이고 있는데 밑으로 흐르는 안개 구름이 신비롭다. 화폭 중앙에는 깨알 같은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청계천을 경계 삼아 위로는 북촌이요 아래로는 남촌이다. 20세기 들어 이리저리 파헤침에 따라 아예 풍경이 바뀌어 버린 오늘날에도 남산 서쪽 기슭에 서서 보면 이 그림이 보여주는 풍경은 사실 그대로다.


그런데도 이동주는 앞서 말한 강세황도 “실경의 소재에 대해서는 오직 한숨만 짓는다”고 썼다. 이것은 심사정이 “실경을 그린다고 하는 경우라도 중국산수의 전통을 따르려 하였다”는 이동주 자신의 견해를 강조하다 보니 강세황의 감탄사를 그렇게 풀어버린 것이다. 나아가 “화선지 바탕의 중국첩책(中國帖冊)으로 그렸다”고 덧붙였는데 심사정이야말로 중국냄새가 나는 화가임을 강조하려는 이동주의 의도가 엿보이는 문장인 셈이다. 물론, 이동주는 <경구팔경> 가운데 “아취(雅趣)가 넘쳐 흐르고 섬세한 선의 흐름이 굽이치며 나가는 묘품(妙品)도 있다”면서 이 작품을 '가작(佳作)'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다. 그림의 품격이야 어떡하건 정선은 조선풍, 심사정은 중국풍이라고 구별하다 보니 심사정이란 화가는 자주성없이 대국을 추종하는 아류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오늘의 기준을 어제에 들이대는 오류일 뿐이다. 정선, 심사정, 강세황이 활동하던 시대는 중국을 중심으로 삼는 유가 문명권에 편입되어 있었고 따라서 중국 옛 시인, 화가를 따르는 일은 소중화(小中華) 관념을 바탕에깔고 살아가는 지식인들의 상고주의(尙古主義) 태도일 뿐이다. 강세황이 소동파의 <연강첩장도(烟江疊嶂圖)>에 차운하여 읊은 시편 <창랑정(滄浪亭)>도 남산 기슭에서 남쪽 관악산을 보며 읊은 시인데 두 사람이 남산 기슭에 모여서 강세황은 남쪽 관악산을 노래하고 심사정은 북쪽 북한산을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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