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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매봉이 보이는 비변사에서 비상한 시국을 생각한다

최열

말 위의 갖옷 차림에 언 모자는 삐딱한데       馬上貂裘涑帽斜

강 하늘 저물녘에 눈발 날리는구나          江天薄暮雪飛花

동풍은 저렇게도 무정한데              東風大是無情思

중년의 흰 머리카락 마구 불어 들이네         吹入潘郎兩鬕華


- 서거정, <도중에 눈을 만나다>, 『사가집(四佳集)』


작자미상, <비변사문무낭관 계회도(備邊司文武郞官 契會圖)>, 17세기, 종이, 63 × 107.8 cm, 개인소장.


<비변사 문무낭관 계회도(備邊司文武郞官契會圖)>의 모임은 1630년 비변사(備邊司) 비변랑(備邊郞) 선약해(宣若海, 579-1643)가 국서를 가지고 청나라 심양(瀋陽)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그의 공적을 치하하는 자리로 보인다. 선약해는 『심양사행일기』를 남긴 인물로 심양에 갔을 적에 청나라의 위력에 굴복함 없이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하여 인조로부터 금으로 도금한 말 채찍인 금편(金鞭)과 담비 모피로 만든 갑옷인 초구(貂裘), 옥으로 만든 술잔인 옥배(玉盃)를 하사품으로 받았으며 품계도 승진되었다. 당연히 비변사로서는 경사였고 따라서 선약해를 위하여 비변사 낭청 12명 전원이 참가하는 축하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비변사란 북방 야인(野人)이나 해안 왜구(倭寇)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무관도 대책 논의에 참여시킬 수 있도록 설치한 특별기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비변사는 중부 정선방(貞善坊)에 있고 다른 하나는 경희궁 흥화문 밖에 있다고 하였다. 김정호가 1846년 무렵 제작한 『청구도(靑邱圖)』 중 <오부전도(五部全圖)>에는 두 곳의 비변사가 등장하는데 먼저 정선방 비변사는 창덕궁(昌德宮) 돈화문(敦化門) 밖 오른쪽에 있다. 지금 돈화문에서 서서 정면을 바라보면 길 건너편 오른쪽 자리로 주소지는 종로구 와룡동 5-9번지다. 경희궁 흥화문 밖 비변사는 흥화문 앞 왼쪽에 있다. 주소지는 종로구 신문로2가 2-1번지인데 지금 서울역사박물관 터다.


이 그림의 비변사는 창덕궁 돈화문 밖 건물이다. 화면 상단 왼쪽 우뚝 솟은 봉우리는 응봉(鷹峯)이며 산줄기를 따라 성벽을 그렸는데 한양성곽의 모습이다. 성곽 너머 멀리 듬성듬성 솟은 산들은 북한산 봉우리들이다. 화면 중단 오른쪽의 건물이 비변사 건물로 그 뒤편에 있어야 할 창덕궁은 화면 밖으로 빼버렸다. 돈화문의 위용이 자칫 비변사의 모습을 짓누를지도 모르니 배치를 바꿔버린 것이겠다. 12명의 비변랑은 오늘의 주인공 선약해를 비롯해 최유해(崔有海, 1588-1641), 심연(沈演, 1587-1646), 서정연(徐挺然, 1588-?), 김원립(金元立, 1590-1649), 이지훈(李之薰, 1596-?), 정효종(鄭孝宗, 1573-?), 강진흔(姜晉昕. 1592-1637), 박성오(朴省吾, 1589-1651), 김여수(金汝水, 1600-70), 배시량(裵時亮, 1604-57), 정취도(鄭就道, 1596-?)인데 한 사람은 지각했고 또 한 사람은 불참했던 모양이다. 행사장엔 10명만 보이고 문밖엔 한 사람만 오고있기 때문이다.


그림에는 모임이 열린 연대 및 제작연대를 밝히지 않았지만 1630년 무렵에 열린 것이다. 참석자 가운데 배시량이 과거에 급제한 해가 1630년이므로 그 이전에는 이 그림을 그릴 수 없고 또 생몰년이 밝혀진 참석자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사망한 강진흔의 사망연도가 1637년이다. 그러므로 1630년부터 1637년 사이에 그린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1630년에 사행을 다녀온 선약해의 시조가 명나라 출신이었다는 사실이다. 선약해는 보성선씨로 그 시조는 선윤지(宣允祉)였다. 1382년 명나라 태조의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하여 보성을 관향으로 삼아 후손을 퍼뜨렸는데 보성에 출몰하는 왜구를 물리쳤으며 그 지역에 유학을 널리 보급한 인물이었다. 그렇게 강인하고 영민한 선조를 둔 인물이었기에 명나라와 싸우고 있던 청나라에 가서도 명나라 유민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비변사는 임진왜란 이후 의정부(議政府)를 압도할 만큼 큰 기관이었다. 세월호니, 탄저균이니, 메르스니 온갖 사태가 연이어 터지는데도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이 정부에 저 비변사를 설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최고의 관료이자 당대의 문장가로서 비변사 기문을 지었던 서거정(徐居正, 1420-89)이 눈보라 몰아치는 매봉 넘어 우리 곁에 온다면 비변사를 설치하여 우리를 구하였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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