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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힘겨운 세상의 깊은 밤 괴단에서 옛날을 추억하다

최열

숲과 골짝 의연 수묵화와 같아               林壑依然水墨圖

바위 절벽 절로 푸른 옥병풍을 이루었지           巖崖自成蒼玉屛

부자 형제 한 자리에 앉아                 父子兄弟一堂席

바람과 달, 거문고와 술로 사시사철 즐거웠네         風月琹樽四時樂


- 김상헌, <근가십영(近家十詠)>, 『청음집(淸陰集)』


겸재 정선, <괴단 야화도(槐壇夜話圖)>, 1752, 종이, 32 × 51 cm, 개인소장.


1752년 2월 깊은 밤 정선(鄭敾, 1676-1759)이 한 폭의 그림을 그렸다. 이병연(李秉淵, 1671-1751)과 박창언(朴昌彦, 1677-1731)과 어울렸던 옛 추억의 한 장면이다. 두 사람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므로 상상 속의 그림인데 여기에 정선은 “추억하노라. 이병연(一源)과 박창언(公美)을[憶一源公美]. 홰나무 아래 쌓아 올린 흙 터[槐壇]에서 깊은 밤 이야기 나누던 일을[槐壇夜話]. 1752년 2월 어느 날에[壬申二月]”라고 썼다.


여기서 괴단(槐壇)이란 지명이 나오는데 어느 곳에 자리한 누구네 집 괴단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정선의 외조부 박자진(朴自振, 1625-94)의 집 후원 담장 안에 높이 솟은 측백나무단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그림에 나오는 괴단은 이곳이 아니냐는 추론도 있다. 박자진의 손자인 박창언이 이 집 별당에서 정선과 이병연 그리고 이병연의 아우 이병성(李秉成, 1675-1735)과 더불어 강론(講論)했다는 기록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에 나오는 괴단은 인왕산 북쪽 기슭 아래 청풍계(淸風溪)에 있는 정선의 외가집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청운동 경복고등학교 길 건너 청운초등학교 북쪽 담장 옆의 자하문길 어느 어간이다. 이곳 청운동 52-8번지는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후손들이 살고 있던 곳으로 장동김문(壯洞金門)의 태고정(太古亭)이며 영당인 늠연당(凜然堂), 산앙루(山仰樓)가 자리한 땅이었다.


특히 태고정 바위에는 중국 청나라에 복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송시열(宋時烈, 1607-89)이 명나라 사람 주희(朱熹, 1130-1200)의 글을 모아 쓴 ‘대명일월(大明日月) 백세청풍(百世淸風)’이란 새김글씨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저 김상용 집터로 알려졌을 뿐 그 집은 어떤 개인의 집이 되어 버렸고 그 집 담장 안쪽에 ‘백세청풍’이란 네 자만이 남아있을 뿐이라고 한다. 사라진 왕조인 명나라를 숭상하는 저 송시열은 중화주의자(中華主義者)였다. 중화주의란 오랜 세월에 걸쳐 중국대륙을 정복해 나간 한족(漢族)의 종족이데올로기로 동북아시아를 지배하는 유일한 종족주의, 또는 민족주의다. 그같은 한족 왕조인 명나라가 멸망시킨 여진족(女眞族)이 중원대륙을 장악하여 세운 청나라를 멸시하는 일은 오직 중화주의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큰 명나라, 해와 달처럼 끝도 없이 맑고 푸른 바람’임을 뜻하는 ‘대명일월 백세청풍’이란 글자가 지금 저토록 어리석게 느껴지는 건 무슨 까닭일까.


그러니까 ‘백세청풍’이란 글씨가 저렇게 누군가 집에 처박혀 갇혀버린 건 오늘날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중화주의를 포기하고 이민족인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처지니까 말이다. 뻔히 일제잔재인 줄 알면서도 미국과 시간을 맞추기 위해 일본 동경 표준시간을 따라야 하는 운명임을 생각하면 감히 어디서 ‘대명일월 백세청풍’을 운운할 수 있을까. 김상용의 아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시절, 북악산이며 남산을 비롯해 자신이 살던 곳 일대를 추억하며 <근가십영(近家十詠)>이란 시를 지었다. 그 가운데 <청풍계>는 부자 형제 모두 모여 ‘사시사철 즐기던 날’을 노래하는 내용이다. 그리움이 아름답고도 슬퍼 힘겨운 요즘 세상을 견디는 추억처럼 들린다. 정선의 그림에 감도는 쓸쓸한 분위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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