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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아계동에서 노인의 청소년 사랑법을 배우다

최열

나의 꿈이 참이던가 손자의 꿈이 참이던가           我夢然乎爾夢然

할애비와 손자 마음 맞아 같은 산천 꿈 꾸었네         祖孫心契一山川

높은 곳에 앉은 것도 기이한 일인데              高高坐處還奇事

또 다시 그 앞에는 아름다운 경치 있구나            又是前頭別色泉


- 권섭, <높은 곳에 있는 절과 쌍폭포[危寺雙瀑]>, 『몽기(夢記)』


권신응, <북악팔경 아계동(丫溪洞)>, 1753, 종이, 41.7 × 25.7 cm, 개인소장.


충무로역을 나와 남산골 한옥마을에 들어서면 시멘트 바닥으로 다져진 광장이 나오고 그 위쪽으로 오르다 보면 필동천(筆洞川) 상류를 연상케 하는 냇가를 복원해두었다. 그 냇가가 바로 아계(丫溪)다. 연못과 정자도 만들어 두어 이곳이 천우각인가 상상하며 잠시 머무르지만 아무래도 조선시대 그 풍경은 그림 속에서나 찾을 수 밖에 없음을 깨우치곤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서곤 한다.


아계는 오랜 세월 감춰져 있었는데 1998년에야 남산골 한옥마을이란 이름으로 개방했다. 왜냐면 이 일대는 일본이 점거하기 시작하여 일본헌병사령부, 정무총감관저, 조선주차군사령부 따위가 주둔하였고 해방 뒤엔 미국군, 수도방위사령부가 1991년까지 주둔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조선시대 때에도 남부 수도방위의 본영으로서 금위영(禁衛營)의 분영인 남별영(南別營)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139칸이나 되는 거대한 규모의 군영이 설치된 때는 1730년이었다. 하지만 군부대가 주둔한다고 해서 계곡 길을 막아놓지 않았다. 남별영 설치 이후 20여 년이 흐른 뒤 권신응(權信應, 1728-86)이 그린 <북악팔경> 여덟 폭 가운데 한 폭인 <아계동(丫溪洞)>에서도 민간인이 자유로이 드나들고 있으니 말이다.


<아계동>의 구도는 계곡 물줄기를 아(丫) 모습으로 그리고 그 복판에 정자를 그려 두었는데 정자는 천우각(泉雨閣)이다. 그 조금 아래 오른쪽으로 한 채의 건물은 금위남별영(禁衛南別營)이다. 아계는 남산골 한옥마을을 상류로 하는 필동천(筆洞川) 상류지역인데 이 그림에 나타나는 아계의 계곡물길은 대단히 씩씩해 보인다. 물길 따라 줄지은 바위와 나무가 울창해 보이는 것이다. <천우각>을 실감나게 그린 또 한 폭의 그림이 있는데 김윤겸(金允謙, 1711-75)의 작품으로 남산까지 시원하게 보이지만 권신응의 이 <아계동>은 계곡과 건물 그리고 가까운 언덕만을 묘사해서 세부가 잘 보인다. 붓질도 시원스레 내달려서 가볍고 빠른 것이 시원스럽다.


입구에 시동을 데리고 가는 두 사람과 이미 천우각에 당도해 앉아 있는 두 사람이 보이는데 권신응의 할아버지 권섭(權燮, 1671-1759)과 권신응 일행이 아닌가 싶다. 권섭은 한양의 승경지 여덟 곳을 골라 손자 권신응으로 하여금 모두 그리도록 하였으므로 한곳 한곳 데리고 다니며 즐겼을 테니 말이다. 아계는 딱히 한양팔경의 하나는 아니었지만 아계에 있는 천우각은 잘 알려진 승경이었다. 『한경지략』에서 천우각을 여름철 피서지하기에 좋다고 소개하였으며 그 석벽에 ‘丫溪’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을 정도였으니까 명성이 상당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권섭이 이곳을 ‘북악팔경’의 하나로 찍어둔 것이겠다.


연못과 정자 위쪽엔 1994년에 조성한 서울 1,000년 타임캡슐 광장이 엄청나게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볼 때마다 낯설다. 400년이 지난 뒤 열어보게 한다는 건데 요즘 나쁜 어른들이 청소년에게 저지르는 ‘막돼먹은 짓’을 보면 400년이 아니라 40년 뒤 이 나라가 제대로 남아있을지 걱정이다. 꿈속에서 본 풍경을 그리는 손자 권신응을 그윽히 바라보는 할아버지 권섭이 젊은이로부터 희망을 발견하고 <높은 곳에 있는 절과 쌍폭포[危寺雙瀑]>를 읊조리는 것처럼 요즘 어른들은 청소년 사랑법을 배워야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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