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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정변으로 집권한 왕의 두려움이 뒤엉킨 신영동 총융청의 추억

최열

내 옛날 알던 스님 찾아 절에 들어가              我昔尋僧一歸去

밤늦도록 밝은 달 아래 정담 나누니               夜蘭明月供軟語

새벽 종소리 들려와 깨우침 깊은데               曉鐘一聲發深省

흰구름이 땅을 가득 메워 어느곳인지 알 수 없구나        白雲滿地不知處


- 서거정, <장의심승(藏義尋僧)>, 『사가집(四佳集)』


권신옹, <북악십경 총융영(摠戎營)>, 1753, 종이, 41.7 × 25.7 cm, 개인소장.


화폭 복판 명당의 기와집 건물은 지금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총융영(摠戎營) 건물이다. 총융영이 들어서기 전에 이곳에는 장의사(藏義寺)가 있었다. 장의사는 신라 시대 때 백제와 싸우다 전사한 화랑 춘랑(春郞)과 파랑( 罷郎)을 기리기 위해 659년에 지은 800칸의 큰 절이다. 조선을 개국하고서 이곳이 너무도 아름다워 경도십영(京都十詠)의 하나인 장의심승(藏義尋僧)으로 뽑힐 정도였다. 하지만 장의사는 세종 때인 1426년 폐쇄당해 독서당(讀書堂)으로 바뀌었다. 불교를 배척하던 국가권력의 폭력이었다. 그 뒤 연산군은 독서당을 폐쇄하고 유흥시설로 바꿔버렸다. 이러한 변천사는 이곳이 워낙 빼어난 승경지여서 겪은 수난인데 이 일대에는 명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 그림 왼쪽 아래 바위에 탕춘대(蕩春臺), 그림 오른쪽 가운데 숲에 조지서(造紙署)란 글자가 쓰여있으며 한복판의 기와집에는 영(營)이란 글씨가 보인다. ‘영’이란 총융청 본영 건물이란 뜻으로 그렇게 쓴 것이다. 화가 권신옹이 이곳 풍경을 그리던 1753년에는 총융청 건물 규모가 무려 300칸이 넘는 신청사를 지었다니까 800칸 장의사 건물과 합쳐 그 위용이 대단했었을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총융청은 원래 1624년 지금의 사직동 북쪽에 설치했었다. 현종(顯宗) 때인 1669년에는 삼청동으로 옮겼고, 영조(英祖) 때인 1747년에는 북한산성 사무를 관리하던 경리청(經理廳)을 흡수, 병합하여 규모가 커졌다. 조직이 커지자 1750년에는 성 밖 장의사(藏義寺) 터로 옮겨버렸다. 이렇게 새로운 군영(軍營)이 들어섰으므로 이 동네를 신영동(新營洞)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니 총융청은 사라졌어도 마을 이름 만큼은 총융청을 머금고 있는 셈이다. 실로 이곳 신영동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지금이야 도로를 넓히느라 연융대(鍊戎臺) 바위도 파괴해 버렸고 탕춘대 위에 연립주택이 들어섰으며 세검정은 그 주위를 침탈당해버려 아름다움을 잊어버린 상태다. 게다가 그 아름답던 개울물마저 주민들이 쏟아낸 오물로 썩어버렸다. 


총융청은 조선 오군영의 하나라고 하지만 설치 계기는 이괄(李适, 1587-1624)이 반역사건을 일으키자 이에 겁을 먹은 인조(仁祖)가 새로이 설치한 군부대다. 그 활동영역도 한양에 한정하지 않았다. 궁궐 바로 옆 사직동의 한양 내청과 수원, 광주, 양주, 장단, 남양 다섯 지역의 외청으로 구성해 놓고 순환근무를 하도록 하였다. 밀도 있는 보호망을 쳐둔 것이다. 정변으로 집권한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불안했던 인조의 두려움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괄은 인조와 함께 당시 왕이었던 광해군(光海君)을 축출한 정변공신이었다. 물론 공신이었음에도 겨우 한성부판윤을 제수받았다가 끝내 평안병사로 좌천당하고 말았다. 영변 땅에 머무르던 이괄은 1624년 1월 24일 휘하의 1만 군대를 이끌고 바람처럼 진격하여 토벌군을 제압하고 벽제까지 진격했다. 겁에 질린 인조는 충남 공주까지 도주했다. 자신이 정변을 일으켜 옥좌에 오른지 한 해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제 자신을 향해 겨눈 반란의 칼끝이 다가오니 혼비백산했던 것이겠다. 왕이 비운 도성을 점령한 이괄은 2월 11일 흥안군(興安君)을 추대해 왕으로 삼았다. 하지만 토벌군에 밀려 도주하던 중 2월 15일 내부의 배신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환궁한 인조는 두려움에 어쩔 줄 모르다가 새로운 군영을 창설하였고 그것이 바로 총융청이었다. 총융청은 그러므로 인조의 두려움을 씻기 위한 장치였다.


그런 총융청이 탕춘대며 세검정이 있는 이곳 승경지로 옮겨 온 일은 반란의 두려움과 기억이 사라진 시절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보다 훨씬 전 조카를 폐위시키고서 왕위에 오른 세조(世祖) 시대의 문인 서거정(徐居正, 1420-89)도 그 정변의 추억을 이곳 장의사에 들어와 밤새도록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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