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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정선 <필운상화> - 꿈결같은 필운대풍월

최열

꽃다운 들 따스한 날 화창한 바람 불어 

하늘 맑고 옷 가벼운데 몸이 절로 열리네 

느린 말 가는 대로 평원 따르는데 

두견화 많은 곳에 잠시 머뭇거리네


- 이항복, <춘일춘류(春日出遊)>, 『백사집(白沙集)』



궁 서쪽에 있는 산에 이름을 붙여달라 하였다. 사신은 즉시 궁궐의 오른쪽에서 임금[雲龍]을 돕는다[弼]는 뜻으로 우필운용(右弼雲龍)이라 하였다. 인왕산(仁王山)을 필운산이라 하였던 것인데 이렇게 또 다른 이름이 생긴 바로 그 해 재상가문에서 태어난 권율(權慄, 1537-1599)의 집이 인왕산 끝자락 꽃이 많은 마을에 자리잡고 있었다. 권율 장군의 따님에게 장가를 간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곧바로 처갓집 권율 장군가에 들어가 살림을 살았다. 어린시절부터 재치 넘치는 기재인 이항복은 자신을 돌보아 주는 장인의 도움을 빗대 장인이 태어나던 해 명나라 사신이 중종에게 지어주었다는 필운이란 이름을 여기에 붙였다. 더하여 필운을 아호로 삼은 이항복은 집 뒤 바위에 필운대(弼雲臺)란 글씨를 아로새겨 두었다. 필운대는 지금 배화여자고등학교 뒷켠에 감춰져 숨어있지만 예전엔 이곳에서 보면 북으로 북한산, 동으로 경복궁과 종로, 남으로 남산 일대 모두 들어오지 않는 곳이 없었다. 게다가 ‘필운대 옆에 있는 사람들이 집에 꽃나무를 많이 심어 성안 사람들이 봄날 꽃구경 하는데 먼저 여기를 손꼽고 또한 거리 사람들도 술병을 차고 와서 시를 짓느라 날마다 모여들곤 하는 명승’이었으니 규장각(奎章閣) 검서관(檢書官) 유본예(柳本藝, 1778-1842)가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전한대로 이 곳이 곧 저 유명한 필운대풍월(弼雲臺風月)이었다.


필운대 아래 마을은 도성 꽃시장에 내다 팔았을 화초 재배단지였지만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정선(鄭敾, 1676-1759)의 관심은 필운대 근처에 모여 꽃놀이 하는 선비들이었다. 정선과 그 벗들이 필운대풍월 누리는 한 장면이었으므로 여기엔 농부도 꽃밭도 보이지 않는다. 정선과 같은 시대 살아간 중인 정래교(鄭來僑, 1681-1759)의 눈에는 이 땅에 살아가는 토박이들 모습이 보여 『완암집(浣巖集)』에 ‘가난한 집으로 유식(遊食)하는 사람’이라고 묘사하였다. 하지만 정선의 눈엔 저절로 피어난 것처럼 보이는 꽃들에 둘러싸인 도시가 누리는 태평성세 그 꿈결같은 풍경일뿐. 저 필운대 꽃놀이[賞花]하는 부유한 권세가들의 눈에 어찌 밭갈고 꽃파는 노동자의 모습이 보이겠는가.


화폭 왼쪽 상단에 안장없이 말 달리는 모습[走馬脫鞍]의 남산이 그윽히 제 모습 드러내는데 그 오른켠에 자리잡은 남대문 뒤로 멀리 경기오악(京畿五嶽)의 하나인 관악산(冠岳山)이 풍요의 도시 한양을 시샘하듯 넘본다. 도시 모습은 또 어떠한가. 남산 아래 남창동 마을엔 이항복의 정자 홍엽정(紅葉亭)이 있었는데 9대손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홍엽정을 물려받아 별서(別墅)로 경영하는 가운데 남쪽 산에 사는 나무란 뜻의 귤산(橘山)이란 글씨를 바위에 새겨두었다. 그 아래 화폭 한중앙이야 당연히 경복궁 모습일텐데 가장 큰 기와지붕 하나 빼고나면 어딘지 황량하다. 임진왜란 이래 정궁(正宮)의 지위 잃어버렸던 탓이겠다. 구름에 가린 종로 풍경도 너무 아득하다.


그림 속 선비들이야 정선이 소속된 노론당 일색이겠지만 그렇다고 풍경까지 그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18세기 정래교 이래 중인들이 필운대에 시사(詩社)를 개창하여 19세기까지 성세를 누렸고 20세기에도 1935년 필운대풍류가 넘치던 4월 나의 스승 김복진(金復鎭, 1901-1940)선생이 주인을 자처하며 미술연구소를 개설했다. 하지만 그뿐 겨우 다섯해만에 요절했고 지금은 그 흔적 찾을 길조차 없으니 사람이 풍경의 주인을 자처해도 산천은 다시 그 사람을 밀어내버렸던 것이다. 아마도 그와 같은 부질없음 알았기에 필운대를 개창한 참된 주인이 항복은 다음처럼 봄날을 읊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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