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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김석신 <가고중류> - 저자도 입석포

최열

홑적삼 짧은 갓으로 연못가에 앉으니 單衫短帽繞池塘

언덕 건너 수양버들 늦바람 보내오네 隔岸垂楊送晩涼

거닐다가 돌아오니 달이 떠올라    散步歸來山月上

짝지머리에 연꽃향기 그래도 풍긴다  杖頭猶濕露荷香


- 한종유, <저자도(楮子島)>, 『신증동국여지승람』 



1805년 판서 이재학(李在學, 1745-1806)과 좌의정 서용보(徐龍輔, 1757-1824)의 도봉산 야유회를 그림으로 그렸던 화가 김석신(金碩臣, 1758-1816 이후)이 한강의 동쪽 동호(東湖)에 떠있는 저자도(楮子島)에 이르렀다. 피리와 북소리 흐르는 물결 사이로 흥겨움 넘치던 저자도는 지금은 사라진 전설의 섬이다. 그 섬은 중랑천(中浪川)이 한강과 만나는 삼각주로 금호동(金湖洞)과 성수동(聖水洞) 사이에 있었다. 고려말기 정승 한종유(韓宗愈, 1287-1354)가 조정에서 물러나 이곳 저자도에 별서(別墅)를 마련하고 유유자적한 이래 왕조가 바뀌어 정종(定宗), 태종(太宗)과 세종(世宗) 임금이 자주 찾아 주연(酒宴)을 즐기니 한양 명승으로 이름을 떨쳤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에 공을 세운 영민한 둘째딸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아름다운 저자도를 하사하였고 공주는 아들 안빈세(安貧世)에게 물려주었는데 이를 기념하여 화가로 하여금 저자도를 그리고 당대 문장 강희맹(姜希孟, 1424-1483)으로 하여금 발문을 짓게 하였고 이 때 강희맹은 <저자십영(楮子十詠)>을 따로 지었으며 당대의 문형 정인지(鄭麟趾, 1396-1478)는 ‘완연히 물 가운데 있는데 물굽이 언덕이 둘리고, 흰 모래, 갈대 숲’으로 이뤄진 섬이라고 묘사하였다. 


 화가 김석신의 <가고중류>가 저자도에서 북쪽을 바라본 입석포(立石浦) 풍경을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김석신이 다른 작품에서 이웃 금호(琴湖)며 압구정(鴨鷗亭)을 그린데다 또한 화폭의 뱃놀이와 경물의 생김새로 미루어 그렇게 짐작할 따름이다. 입석포는 한양 열 곳을 노래한 '경도십영(京都十詠)'의 한 곡 '입석조어(立石釣魚)'의 소재지인데 강희맹은 ‘긴 시내 할퀸 언덕에 선 바위’라 하였거니와 세조(世祖)의 특별한 신임을 얻은 재사(才士) 성임(成任, 1421-1484)이 서예와 음율, 사냥을 즐겼던 자신의 활달한 성품 그대로 비추어 읊조린 바 있다. ‘천 년의 위태로운 돌언덕 곁에 섰는데 일만 길 맑은 못물 푸르기도 한 것이, 노는 사람 낚싯대 들고 이끼 낀 낚싯터에 앉으니, 수없는 고기들 거울 속에 뛰노네. 금빛 양념 옥같이 흰 향기로운 국물 곁들이니 죽엽주(竹葉酒) 봄 향기를 몇 병이나 기울였나’라고 하고 ‘인생이란 뜻대로 지내는 그것이 즐거운 일[人生適意 是樂戱]’이라고 노래하였다. 


하단엔 나무줄기 흐드러져 이곳이 닥나무 많은 저자도요, 상단엔 남산(南山)이 끝나는 금호동의 작은 응봉(鷹峯) 밑 선돌개라 부르는 입석포라 참으로 깎아지른듯 우뚝하다. 중단엔 두 척 배를 띄워 모두 30명이 풍류를 누리는데 위쪽 입석포 중턱에 승려와 어린이에 아기업은 아낙네까지 구경하러 줄지어 서있고 아래쪽 저자도엔 두 선비가 미처 배에 오르지 못한듯 담배 물고 물끄러미 쳐다본다.  차양(遮陽) 지붕까지 친 호화로운 선상 풍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또 언제적 놀이인지 알 수 없으되 군복(軍服)을 갖춰입은 장수의 호위가 삼엄하니 아마도 재상가문의 경사(慶事)를 기념함이 아닌가 한다. 또한 이 그림이 저 서영보의 <도봉도(道峯圖)>와 같은 크기로 원래 한 화첩(畵帖)에서 띁겨 나왔다면 1805년 이재학, 서용보 일행의 유람이 분명하다.  


1967년 12월 서울시장 김현옥(金玄玉, 1926-1977)은 한강종합개발을 ‘민족의 예술’이라고 천명하였고 1969년 2월 현대건설에 압구정 앞 한강매립 허가를 내주어 1972년 12월까지 4만 8천평을 메꿨다. 그 많은 토사(土砂)는 강건너 저자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부가 아니라 통째였고 그렇게 하여 저자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시 등기권리자가 있었지만 10년의 소송 끝에 권리자의 권리는 짓밟히고 말았다. 법이 엄연함에도 사람인 판사는 가진 자의 편이었던 게다. 칠백년 전 한종유가 노래했던 가락은 그러므로 이제 전설 속 풍경이 되어버렸으되 천벌받아 한 번 무너졌던 성수대교 건널때면 홀연 솟아오를 저자도 환상을 만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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